애초에 한국에서는 TV 드라마 PD였다. 그때만 해도 자신의 인생이 시쳇말로 '드라마'가 될 것이란 예상은 못했다. 드라마 전문 케이블 TV를 거쳐 홈쇼핑 TV PD로 적을 옮길 때까지만 해도, 지금 중국대륙에서 쓰고 있는 자신의 '신화'를 꿈꾸진 못했다.
운명이었을까. 10여 년 전 잠시 머리를 식히러 떠난 대만에서 닻을 내린 이후 인생은 순항이요, 승승장구였다. 현재 대만과 중국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홈쇼핑 전문가로 통하는 한국인 박흥렬의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다.
지난 7월 초. 한반도를 무서운 기세로 적시던 장맛비를 뒤로하고 중국 베이징(北京)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에 예상했던 '신화'가 16강 진출로 그쳐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을 때 베이징에서 들려온 한국인 박흥렬의 이야기에 필자의 '촉'이 꽂혔다.
중국에서 그의 이름은 '퍄오싱례(朴興烈)'. 한국을 떠난 지 10여년 만에 그는 지난 6월 17일 전파를 타기 시작한 베이징 소재의 CNR홈쇼핑 TV CEO로 변신해 있었다.
CNR홈쇼핑은 70여 년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중국 최대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인 '중앙인민광파전대(China National Radio·CNR)'가 전국 송출 라이선스를 갖고 출발한 홈쇼핑 전문 채널이다.
그는 CNR홈쇼핑의 200여 명 직원 중에 유일한 한국인이다. "더운데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서울과 달리 베이징은 작열하는 태양으로 뜨거웠다). 시장하실 테니 저희 직원들하고 함께 회사 앞 국숫집 가서 중국 국수 한 그릇씩 하시지요."
특유의 진한 중국 향초(香草) 냄새가 가득 밴 국숫집에서 중국어와 한국어, 영어가 오가는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됐다. 서울과 대만, 중국을 오가는 박 사장의 다이내믹한 인생 드라마도 함께 시작됐다.
Chapter 1
드라마 PD에서 홈쇼핑 PD로
문화예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그에게는 '딴따라' 본능이 있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는 자연스럽게 드라마 연출자가 됐고, 1991년 KBS TV 드라마제작국에 특채로 입사, 전문 조연출로 활동했다.
다수의 특집극과 90년대 초반 인기를 모았던 , 대하사극 < 삼국기 > 와 < 먼동 > 등이 그가 조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이다. '입봉(조연출자에서 연출자로 데뷔하는 것)'을 한 곳은 제일방송(MBC 드라마넷의 전신).
드라마 전문 케이블 TV에서 연출과 프로듀서로 KBS TV 드라마 < 인간의 땅 > , SBS TV 특집극 < 리조트 > , < 위층 남자 아래층 여자 > 등을 제작하며 드라마 PD로 '신바람'이 들었다. 1995년에는 한국케이블TV 대상 '우수프로그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케이블 드라마 채널에서 가장 힘든 것이 제작비 확보였어요. 연출자이자 프로듀서로 직접 제작비를 따다 드라마를 만들었죠. 그러다 홈쇼핑채널인 39쇼핑(CJ오쇼핑의 전신)이 제가 근무하던 제일방송을 인수했는데, 제작비 지원이 잘 안 돼 외부 영업을 혼자서 뛰어 다녔어요.
힘들어 하고 있던 차에 제일방송에서 39쇼핑으로 먼저 건너간 PD 선배가 홈쇼핑 PD로 일해보라는 겁니다. 드라마 하던 놈이 무슨 홈쇼핑이냐 그랬죠. (웃음) 하도 여러 번 권하길래 그래 한 번 해보자 하고 건너갔죠."
참 뜬금없었다. 홈쇼핑 방송 연출로는 초보였던 셈. 하지만 이내 그의 '끼'가 제대로 발동하기 시작했다. PD적 본능이었다고 할까.
"한번은 돗자리 방송을 맡았는데 예고편을 만들어야겠더라고요. 제작비가 없어 고민 중이었는데 한강변을 달리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강변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맨이랑 스태프들한테 제가 예고 멘트를 할 테니 찍으라고 했어요. (웃음)
'몇 월 며칠 돗자리 방송을 하니 고객 여러분의 많은 시청 바랍니다' 하는 간단한 멘트였는데, 그게 나가고 난 뒤에 회사에서 쇼호스트로 출연하라고 하더라고요."
더욱 뜬금이 없는 제안이었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싶어 몸무게를 7~8kg 감량하고 샤프한 쇼호스트로 변신했다. 이후 그는 회사 매출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컴퓨터를 비롯한 가전제품 판매의 '달인'으로 등극한 것. 그의 수완은 업계에 소문이 났고, 시간이 지나 본연의 업무인 PD 부서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쇼킹한 '사고'를 치기 시작한다.
"홈쇼핑 방송에 '쇼'를 도입했죠. 당시 S컴퓨터를 맡고 있었는데 컴퓨터 공장과 방송국을 연결해 이원방송 쇼를 기획한 적이 있어요. 중계차 대여를 비롯해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회사에서 제작비를 안주더라고요. (웃음)
담당MD랑 S컴퓨터 업체를 찾아가서 2000만 원만 지원해달라고 설득했죠. 사은품 기획 등 방송 준비만 2개월을 했는데, 결국 방송이 나간 날 컴퓨터 주문만 12억 원이 들어왔어요. 한마디로 '대박'이 났죠. 그 당시 메이저급 홈쇼핑 TV 하루 매출이 15억 원 선이었거든요."
안 될 거라 했던 일이 보기 좋게 '홈런'을 친 뒤 그는 탄력을 받았다. 쇼 같은 홈쇼핑 방송, 홈쇼핑 방송 같은 쇼를 잇따라 기획하며 홈쇼핑 방송 포맷의 새장을 열었다. 즐거운 '방송사고'는 이어진다.
"한여름에 모피코트를 팔겠다고 했으니 미쳤었죠. 하하하. 한여름 부산 해운대 바닷가에 야외무대를 설치하고 가수까지 불렀어요. 서울과 이원방송에, 연예인 출연료까지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는데 전례가 있어서 그런지 그땐 사장이 밀어주더라고요.
근데 방송 당일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니 전화를 받은 겁니다. 도저히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방송 준비부터 하기로 했죠.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송을 앞두고 비가 쏟아지는 겁니다.
모델들이 우산을 쓰고 리허설을 하는데 모피가 젖을까 봐 모피업체 사장이 아주 안달이 난 거예요. 앞이 깜깜해서 마음속으로 할머니께 부탁을 드렸어요.
'할머니 못 가뵈어 너무 죄송한데 저 한번만 도와주세요'라고요. 그런데 진짜 제 부탁들 들어주셨는지 방송 10분 전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어요. 그날 모피 매출이 6억 원 정도 나왔는데, 방송 끝나고 나니까 모피업체 사장이 한 시간만 더 하지 그랬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Chapter 2
대만, 운명의 터닝 포인트가 되다
1990년대 후반은 박 사장에게 있어 한국에서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사들은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포맷의 방송을 예의 주시했다.
하지만 홈쇼핑 TV들의 피 말리는 매출 전쟁에서 다는 훈장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그의 어깨를 누르는 부담감의 무게도 커져만 갔다.
"회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커지니까 부담스러워졌어요. 이렇게 퍼내기만 하고 채우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 유학을 계획했죠.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차에 마침 회사(당시 CJ홈쇼핑)로부터 대만 기업으로의 홈쇼핑 컨설팅 파견 근무 제안을 받았어요.
머리도 식힐 겸 대만에서 쉬엄쉬엄 일하면서 와이어 액션 연출도 공부하고 영화 시나리오나 한 편 써야겠다 싶었죠.
2000년도에 1년 계약직 고문직급으로 갔는데, 시나리오는커녕 영화 한 편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살았어요. 6개월쯤 지났을 때 한국의 홈쇼핑 TV들이 대만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냥 나와 버릴까 하다가 초기에 자리를 잡아야겠다 싶어 둥썬(東森)그룹에 얘기를 했더니 계약도 장기계약으로 전환하고 직급을 고문에서 부사장으로 높여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대만 최대의 미디어그룹인 둥썬그룹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5년간 그가 '산파' 역할을 해 탄생시킨 홈쇼핑 채널이 무려 5개. 한 회사에서 홈쇼핑 채널만 5개를 운영하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례다.
대만 최초로 홈쇼핑 생방송을 시도, 매출의 급진적인 증가라는 쾌거를 이루면서 홈쇼핑 분야의 전문가로 입지를 확실히 굳히며 승승장구한 끝에 최고운영책임자(COO)의 자리까지 올랐다. 물론 유일한 한국인으로서다.
어설픈 영어 또는 몸짓, 발짓을 섞어가며 하던 보디랭귀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곁을 떠났다. 어느 날부터 엘리베이터 안내 멘트가 귀에 들어오더니 뜻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하던 대만 뉴스앵커의 말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토록 신나게 달리던 고속도로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인은 그가 33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5년 장기계약이 끝난 뒤 다시 5년 재계약을 하고 딱 두 달 만에 사표를 쓰고 나왔어요. 뭐랄까. 외국인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혔다고 할까요. 5년쯤 지나고 홈쇼핑 시스템이 자리를 잡게 되자 대만 사람들이 제 말을 안 들으려고 하더라고요. (웃음)
자기네들도 충분히 알 때가 됐다고 생각한 거죠. 회사가 커질수록 각 개인의 욕심도 커지면서 갈등이 생겼죠. 일하느라 미룬 신혼여행이나 가자 싶어 미련 없이 그만두고 아내랑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Chapter 3
홈쇼핑 TV로 중국 정복에 나서다
사표를 날릴 때만 해도 그에게 계획이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둥썬그룹을 떠났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결국 유럽에 머물던 2주 동안 그는 휴대전화만 붙잡고 있어야 했다. 중국에서 그를 찾는 러브콜이 쇄도했던 것.
대만에 이어 홈쇼핑 성장에 가속도가 붙은 중국에서 개국만 하면 대박이 나는 홈쇼핑업계의 '미다스'를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무계획'은 다음 '무대'를 위한 적당한 쉼표가 됐고, 2005년 5월 그는 결국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중국의 홈쇼핑 TV '산파'로 첫발을 내디딘 곳은 후난성(湖南省) 지역. 후난성은 마오쩌둥의 고향으로 내륙지역의 특성상 홈쇼핑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사고' 치기 좋아하는 그가 중국에서라고 조용할 리 없었다.
'해피홈쇼핑(快樂購物)'이란 TV 홈쇼핑 채널을 개국하면서 중국 최초로 홈쇼핑 생방송을 시도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 생방송은 위험천만한 발상. 따라서 이전 홈쇼핑 방송은 모두 녹화 또는 인포머셜 형태였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사업기획서 작성에 착수했고, 결국 깐깐하기로 소문난 중국 국가개발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새로운 '다크호스'를 출현시켰다.
"공산주의 체제잖아요. 언제, 누가, 어떤 식으로 방송에 대고 반체제 발언을 할지 모를 일이죠.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바로 문을 닫게 됩니다. 해피홈쇼핑은 그래서 생방송은 생방송이되, 오디오가 비디오보다 30초 늦게 나갔어요.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죠. 제가 생방송을 시작하자 다른 홈쇼핑사들도 조심스럽게 생방송을 시작했어요."
그의 현주소는 베이징 소재 CNR홈쇼핑 TV의 CEO다. 해피홈쇼핑 이후 지난 2년간 홈쇼핑 시스템 셋업과 교육 전문 컨설턴트로 구이저우(貴州)홈쇼핑, 차오류(潮流)홈쇼핑 등 홈쇼핑 채널 개국을 진두지휘했다.
CNR홈쇼핑과 손을 잡은 것은 올 3월. CNR홈쇼핑 TV(央廣購物)는 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최대의 국영 라디오 방송인 CNR가 신매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억 위안(한화 약 180억 원)을 출자해 야심 차게 준비한 사업이다.
7억 명의 청취자를 확보하고 전국방송 채널 3개, 베이징지역 방송채널 4개, 디지털 TV 채널 1개를 보유한 세계 최대 라디오 방송국의 자회사 CEO는 한마디로 '대어급' 러브콜이다.
'춘추전국' 형세로 업체가 난립한 중국 홈쇼핑 시장에 제대로 된 '표준'을 제시함과 동시에 거물급 홈쇼핑 채널을 육성해 채널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CNR의 전략을 실현시키기에 박 사장이 최적의 인물이었던 것. CNR홈쇼핑은 전국방송 라이선스를 확보한 채널로, 베이징과 텐진(天津)을 시작으로 6월 17일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25~45세의 화이트컬러 전문직 여성과 주부가 메인 타깃입니다. 24시간 중에 6시간은 100% 리얼타임 생방송(저녁 6~12시 이외의 시간은 재방송)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간 큰 짓이죠. (웃음)
본사가 국영방송이다 보니 개국 당일에도 고위간부가 꼭 생방송을 해야겠느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녹화와 생방송 매출 차이가 세 배에 달해요. 30초라지만 오디오가 비디오보다 늦게 나오면 아무래도 실시간 방송만큼의 매출은 기대하기 힘들죠.
미국과 일본도 홈쇼핑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지만 현재 중국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잣대로 삼는 홈쇼핑은 한국 홈쇼핑 스타일이에요. CNR는 현지화를 강조하면서도 정직한 상품 정보를 이성적으로 전달하는 한국 홈쇼핑 스타일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베이징 고객들은 상하이에 비해 홈쇼핑에 대한 신뢰가 약한 편이지만 디지털 TV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매출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 믿습니다. 첫날 방송 때 벤츠 자동차를 팔았는데, 주문이 50대나 들어왔어요. 출발은 상당히 괜찮았죠."
현재 베이징의 디지털 TV 가시청 가구 수는 450만 명 정도. 중국 정부는 2015년까지 TV 송출방식을 디지털로 완료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케이블 TV 가시청 가구 수 1000만을 기점으로 홈쇼핑 TV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CNR홈쇼핑이 디지털 TV 가입자 수 증가에 따라 매출에 '순풍'을 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홈쇼핑 시장은 한 마디로 춘추전국 시대랄 수 있어요. 전 세계 홈쇼핑업계는 연평균 20%의 꾸준한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데, 중국 역시 급성장해 지난해에는 홈쇼핑 전체 매출이 234억 위안(약 4조6000만 원)에 달했습니다.
중국 홈쇼핑의 관건은 물류입니다. 땅이 너무 넓어선지 물류비용이 많게는 매출의 15%에 달해요. 하지만 CNR은 1일 내 배송, 3일 이내 환불 등의 고객만족 시스템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용카드 결제 정착을 위해 중국 최초로 홈쇼핑-은행 제휴카드 출시를 준비 중이에요."
'최초'가 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올 매출 1억 위안(약 180억 원), 내년 목표액 5억 위안(약 900억 원), 2012년엔 전국 송출을 통해 10억 위안(약 1800억 원)의 목표를 세워둔 한국인 CEO는 해야 할 숙제가 많은 만큼 자의 반, 타의 반 워커홀릭이 된 지 오래다.
Chapter 4
"칭기즈칸, 나는 아직도 그대를 꿈꾼다"
고질적인 물류 시스템의 문제 해결을 위해 박 사장은 현재 조심스럽게 물류회사와의 조인트 벤처 설립을 고려 중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중국인들이 신뢰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중국 고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매출 신기록을 세워볼 작정이다.
"일단은 한국 홈쇼핑 TV에서 검증된 베스트셀러가 가장 안전하겠죠. 한국에서 히트 친 H청소기와 H프라이팬은 이미 판매 중인데 반응이 좋습니다. 중국인들은 한국산 상품에 대한 신뢰가 매우 높은 편이에요.
고품질 홈쇼핑을 지향하는 만큼 자리가 잡히는 대로 한국에서의 제품 소싱을 위한 기업박람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업체의 상품을 소싱할 수 있는 장이 되겠죠. 한국 내 소싱센터 설립도 고려 중이고요."
2006년 중국으로 적을 옮긴 뒤 현재까지 직접 개국한 홈쇼핑 채널이 4개가 넘는다. 이미 대만과 중국 홈쇼핑업계에서는 '대박의 미다스'로 통하는 그는 과연 어떤 꿈을 남겨두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자산이 150억 원 정도까지 모이면 절반을 뚝 잘라서 노인들이나 가여운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짓는 데 기부하고 싶습니다. 평소 어머니의 뜻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75억 정도가 남죠.
거기서 절반은 서울 근교에 전원주택 단지를 지어서 내 집 마련하기 전까지 어려운 지인들한테 무료로 렌트해 줄 생각이에요. 나머지 돈으로 할 일은 딱 하나, 영화를 만들 겁니다.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역사물을 만들고 싶은데, 예전부터 구상해 둔 스토리가 있어요. (웃음)"
애초에 출발이 그랬듯 아직도 버리지 않은 꿈은 '영화'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의 홈쇼핑 '무림'을 정복하고 난 뒤엔 유럽과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 작정이다. '한국형 홈쇼핑'으로 대만과 중국 홈쇼핑업계의 '칭기즈칸'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그것은 어쩌면 '수순'일지도 모른다.
박흥렬
중국 CNR홈쇼핑 TV 사장
중부대 대학원 공연예술 석사
KBS 드라마제작국 전문조연출
MBC 드라마넷 PD
CJ홈쇼핑 PD
대만 둥썬(東森)홈쇼핑 COO
중국 후난성 해피홈쇼핑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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