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한 뒤샹은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예술로 둔갑시킨 가장 실험적인 예술가였다. 작품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은둔하다시피 살며 평생을 체스 두는 일로 보냈다.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20대 초반, 기원전 3세기의 화가이자 철학자인 피르로의 무소유 철학을 접한 그는 욕망이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글 | 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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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미술관에서 누드 모델과 체스를 두고 있는 노년의 마르셀 뒤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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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L.A의 파사데나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대표작인 ‘샘’앞에 앉아 시가를 피우는 뒤샹.
‘독신’에 대한 이른 깨달음
명성만큼 부유하지도 명예만큼 오만하지도 않았던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 그는 인생을 여자:아이들:별장:자동차 같은 의무의 짐으로 부자유스럽게 해서 는 안된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깨달았고, 이런 생각 때문인지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그에게는 보통 작가들에게 저주처럼 몰아닥치는 불행이나 슬픔, 신경쇠약 같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있어 그림은 자기 표현의 강제적인 요구가 아니었으므로 창작을 위한 피나는 노력도 경험하지 못했다.
뒤샹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비스러운 겸손함 때문에 오히려 도저히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위엄을 느끼곤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으면서도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며, 자기방어적인 면이 없고, 정중하며, 속임수에 전혀 오염되지 않았기에 일종의 호기심마저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적인 세련됨을 갖춘 뒤샹은 어떠한 내용의 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예술계에 자신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음을 밝히고 오히려 평가로부터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뒤샹의 멘토(mentor), 무소유의 철학
뒤샹은 부르주아 공증인의 여섯 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뒤샹의 두 형, 즉 자크 비용과 레이몽 뒤샹 비용이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예술가가 되려는 그를 이해하고 배려해주었다. 그러나 뒤샹은 유년시절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고 말을 해야 할 때면 그저 행복했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청각 장애인이였던 어머니와 의사소통이 여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유년시절을 회상하고 싶지 않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뒤샹은 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사립학교인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된다. 그 후 형들이 있는 파리로 와서 그림과 만화 사이를 배회하다가 결국 살롱 도톤느에 작품 세 점을 출품함으로써 데뷔한다. 뒤샹은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보조사서로 일하고 있었던 1912년, 블라크와 피카소를 만나지만 그들 사이에 특별한 의견교환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로 일하는 동안 지적 탐구를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던 그는 주로 철학서를 읽었다. 베르그송이나 니체의 영향도 받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기원전 철학자 피르로(Pyrrho)였다. 피르로는 회화를 포기하고 철학을 선택한 사람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부인하였다. 즉, 절대적인 것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객관적인 진리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무관심하게 태연한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어떠한 것에 의견을 갖거나 판단하는 것은 금하라면서 매사에 경계하는 태도를 가질 것을 권유했는데, 말하자면 불교적인 무소유의 철학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심취한 뒤샹은 그런 삶을 살고자 했으며, 그의 예술에서 보여지는 아무런 가치 없는 무의미한 오브제의 선택은 마치 불교의 화두와 같은 것이었고, 이를 통한 ‘무심함의 아름다움’이란 말은 그의 작품 철학을 대변하는 핵심적 표현이 되었던 것이다.
즐거운 레디메이드, 패러디의 대가
뒤샹은 1913년, 아모리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뉴욕 미술계에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종래의 누드와는 상반된, 도저히 누드라고 말할 수 없는 입체파적인 경향을 가진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를 가장 도발적인 예술가로 부상하게 만든 작품은 남성용 소변기인 ‘샘’이다. 1916년 뉴욕의 앙데팡당전에 도자기로 만든 소변기에 변기 제작자의 이름인 ‘무
트’ (R. Mutt)를 서명하 여 ‘ 샘 ’
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한 작품은 주최측에 의해 거부당해 전시 기간 동안 칸막이 뒤에 놓여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 작품이 출품되었을 당시에는 이에 대한 비평이 전혀 없었고, 재평가가 있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뒤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술 작품을 제작한 적은 별로 없다. 그는 예술과 일상과의 경계를 허무려는 의도 없이도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손쉽게 허물어버렸다. 이를테면 자전거 바퀴를 둥근 의자 위에 설치했을 때에도 그저 단순한 오락으로 생각했을 뿐 그것을 만들어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으며, 전시 의도를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또한 1919년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그림엽서 한 장을 사서 모나리자의 얼굴에 검은색 연필로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볼 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뜻이 된다.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에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보탠 것은 극도의 다다이즘적인 표현 방법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패러디로, 미술사에 등장하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일이 빈번해지게 된 계기도 바로 뒤샹의 모나리자 작품 이후로부터 보아야 할 것이다. 달리나 앤디 워홀 같은 작가들에 의해 인용된 모나리자는 모두 뒤샹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뒤샹은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배에 오르기 전, 약국에서 종 모양으로 생긴 주사약 병을 사서 병 끝을 잘라 약을 버린 후 다시 봉했다. 그는 그것을 ‘파리의 공기 500cc’란 제목을 붙여 후견인인 아렌스버그에게 줄 선물로 가방에 챙겨 넣었다. 부자인 그들 부부에게 기념품으로 가져갈 거라곤 파리의 공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시적이고 황당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가?
뒤샹의 많은 작품들은 애초부터 전시와는 상관없이 대부분 친구, 가족, 애인에게 선물로 그려주거나 만들어준 것이 많았다. 그래서 훗날 전시를 위해서 거저 준 작품을 비싼 값으로 다시 사들여야 하거나 빌려와야만 했다. 그런데 왜 뒤샹은 그러한 오브제들을 선택했을까? 뒤샹은 이런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선택이 시각적 무관심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취미나 판단의 부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뒤샹은 또한 이런 레디메이드를 일종의 우연한 랑데뷰에 비교하곤 했다. 이런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결국 미술이 제작이 아닌 ‘발견’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현대미술의 우상 파괴적인 요소와 조롱적인 태도를 반영한다는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레디메이드 예술은 팝아트와 신사실주의회화, 그리고 개념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뒤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현대미술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다이즘적 농담으로서의 첫 결혼, 말년의 평온한 두 번째 결혼
뒤샹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여자 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얼마 알려지지 않은 그의 연인 가운데 한 명인 장느 세레는 뒤샹의 첫 번째 여인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는 화가의 모델이 되기를 원했고, 뒤샹이 그녀를 다른 예술가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뒤샹과 장느 세레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연애 기간은 아주 짧았다. 훗날 전철역 계단에서 여덟 살 난 소녀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장느를 우연히 만난 뒤샹은 그 아이가 자신의 딸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뒤 뒤샹은 화가가 된 딸을 뉴욕의 예술가들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전시를 열어주기도 했다. 그의 딸은 “아버지는 신비로운 사람이었으며 그에게서 넘나들 수 없는 장벽을 느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뒤샹은 뉴욕에서 돌아와 파리에서 잠시 머물던 시기에 프랑스 자동차 거부의 딸인 사라쟁 르바소라는 뚱뚱한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뒤샹의 절친한 동료 피카비아의 소개에 의한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뒤샹이 돈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결국 피카비아가 만든 다다이즘적 농담의 극치라고 생각하게 된다. 뒤샹은 해프닝처럼 해치운 결혼을 두고 결혼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방랑자 생활에 싫증이 난 자신을 말릴 사람은 없었을 거라고 자신의 결혼을 정당화했다. 그런 그들의 결혼은 순탄할 리 없었다. 늘상 체스에 몰두하는 뒤샹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뒤샹이 잠든 사이에 아교로 체스를 체스판에 붙여버림으로써 자신에 대한 뒤샹의 무관심에 보복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6개월 만에 이혼하고 만다. 뒤샹은 이 결혼생활을 통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은 독신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그후로 오랫동안 줄곧 혼자 살면서 여러 여자들을 만났다.
뒤샹은 섬세하고 지적인 외모로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는 멋진 청년이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과 섹스를 엄격히 구분했으며, 한 여성만을 사귀지도 않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깊은 관계를 피하면서 즐겼다. 존재의 품격이란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뒤샹이야말로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이 적당한 거리두기를 실천했던 것은 아닐까?
결혼을 피하면서 지낸 뒤샹은 67세인 1954년에 ‘티니’라 불리는 알렉시나라는 45세의 이혼녀 알렉시나와 결혼한다. 화랑을 경영하던 피에르 마티스의 전 부인으로 세 자녀의 어머니인 그녀는 조각을 전공하여 미술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있었고, 요리를 잘하고, 체스를 잘 두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다. 여전히 가난한 단벌 신사였던 뒤샹이 마다할 이유가 없을 만큼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들은 자주 여행을 떠났으며 결혼이 주는 새 생활의 안락함과 평온함을 만끽했다. 뒤샹은 티니에게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새삼스럽게 애정 표현을 하곤 했다.
체스를 두는 예술가, 모순투성이의 인생
뒤샹은 자신들을 반쯤 신으로 착각하는 예술가의 권위의식이나 특권의식을 경멸했다. 유머 감각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지나치게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작품을 보는 일을 곤혹스러워했으며, 예술의 상업화 현상이 심화되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 1년에 회화 한 점만 그려주면 1만 달러를 주겠다는 요청을 받는 등 뉴욕에서 그는 더할 수 없는 명성을 얻었지만,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1923년 예술활동을 중단해버렸다. 뒤샹은 자신은 굉장히 게으른 사람으로 살며 숨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좋아한다는 평상시의 생각을 실천으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미적인 것보다는 삶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했고, 삶은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판단 하에 작품 활동을 포기했던 것이다. 뒤샹의 이런 행위는 어떤 것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은둔적인 성품에서 비롯된다. 그는 프랑스어교습으로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면서 체스 게임으로 지적인 에너지를 소모했다. 체스클럽 회원이 되었고, 체스경연대회에 참가했으며, 극장이나 레스토랑에 가는 대신 체스클럽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직 이기기 위해 지나치게 신중한 게임을 이끌어나가거나 거친 게임을 하지 않았으며, 아슬아슬하고 멋지게 게임을 이끌어나갈 줄 알았던 명선수였다.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체스만이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체스냐 예술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체스를 두는 예술가일 뿐이었다.
뒤샹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그의 시간 사용이다
자신의 개인전에도 불참할 만큼 무심했던 뒤샹은 나이 들면서 더욱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하듯 살았다. 단지 우정과 관련되었을 경우에만 사람들 앞에 타협적으로 나섰다. 그는 늘 반(反)예술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다른 화가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자신의 말대로 어쩌면 뒤샹은 과대평가되고 있는 예술가일지도 모른다. 특정 예술을 의도하지 않으면서 그저 물 흐르듯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쉽게 설명되거나 재단할 수 없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누구보다도 실험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즐겁게 눈감을 수 있기를 원했던 뒤샹은 자신의 소원대로 절친한 동료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사망한다.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미국과 프랑스의 반응은 판이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1면 기사로 다루면서 20세기의 비중 있는 인물의 죽음으로 보도했지만,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부음 소식이 체스란에 보도되었다. 따라서 조국에서는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여전히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묘비에는 그의 요청대로 “하기야,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다다이스트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아이러니한 언어 유희를 생이 끝나는 순간에까지 실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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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미술관에서 누드 모델과 체스를 두다가 촬영한 모습. 그에게 체스는 숨쉬기와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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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있는 여인이 뒤샹이 63세에 만난 18세 연하의 부인 ‘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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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레디메이드 작품인 ‘샘’, 1916년 作.
글을 쓴 유경희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 과정 디플로마를 취득했다. 현재 연세대 영상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미술비평을 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