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ㆍ행운 부르는 모란의 미학
목단은 다른 말로 모란이라고도 한다. 목단그림은 옛날부터 부귀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알려져 왔다. 목단은 모양이 크고 색이 아름다워 꽃 중의 왕이라고 말하는데, 임금에 견주어 일컬을만한 훌륭한 자태에다 부와 귀까지 갖춘 존재라 부귀화라고 불리우며, 우리 조상들이 부자가 되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아서 그렸고, 귀댁에 부귀가 깃들기를 빈다는 부적과 같은 주술적 역할을 하는 그림으로 가정에 많이 걸었다.
모란(牧丹)은 꽃이 크고 그 색이 화려하여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화왕(花王), 부귀화(富貴花) 등의 별칭으로 알려져 왔다.
원산지는 중국의 사천, 운남지방이다.
중국 진한(秦漢)시대 이전부터 약재로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남북조시대(429-589) 초기에 감상의 대상인 관상용 꽃으로서 문헌에 등장하였으며, 唐代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꽃의 크기가 15-20㎝ 정도로 매우 크며 5월에 꽃이 핀다. 백
색, 자색, 적색, 연분홍색, 황색 등 다양한 색깔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모란과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으로, 선덕여왕(?-647)과 모란꽃 이야기가 있으며, 모란이 꽃 세계의 왕으로 등장하는 설총(7세기말-8세기 전반 활동)의 글 <화왕계(花王戒)>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왕이 모란을 감상한 기록이나
모란꽃이 피는 것을 길조로 기록한 것이 있다.
조선후기 선비 유박(柳璞, 1730-1787)이 쓴 <화암수록(花菴隨錄)>의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서
모란을 작약, 철쭉, 석류, 파초와 함께 2등으로 분류하며 그 특징을 '부귀'로 평한 것을 보면 모란은 풍요로움과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모란도를 부귀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다.
유명한 모란도를 살펴보자면,
모란도 10폭 병풍/ 각 폭 145×58㎝
작자미상,조선 18세기,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색색의 꽃과 무성한 잎이 돋은 모란 나무가 자연을 배경으로 다양한 모양과 색의 괴석과 어우러졌다. 10폭에 이르는 대형화면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모란 나무들은 화려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모란 나무를 괴석의 앞, 뒤에 배치하거나 9, 10폭에 보이는 것처럼 다소 화면의 뒤쪽에 그려서 일률적인 반복을 피하고 변화를 주었다.
이번에 특별공개되는 모란 병풍은 1921년 박물관에 입수된 후 보존처리를 거쳐 선보이게 된 것으로, 조선시대 원래의 장황(粧황, 표구)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궁모란병(宮牧丹屛)'으로 지칭되는, 각 폭에 모란 또는 괴석과 모란이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형식의 병풍보다 이른 단계의 양식을 보여준다.
즉, 10폭이 모두 이어지며 자연 속에 피어난 모란꽃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조선시대 모란병풍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모란과 나비] [묵모란]
남계우, 19세기, 종이에 색 심사정, 1767, 종이에 먹
유명한 현대민화 작가님들 작품을 살펴 보자면,
박생광 화백의 모란도
엄옥경 화백의 모란도
홍지연 화백의 모란도
김중근 화백의 모란도
김지혜 화백의 모란도
중국 최고의 모란화가로 손꼽히는 왕시우(王繡·65·여)화백의 모란도
모란꽃만 그리면 부귀도(富貴圖)라 하고
모란꽃을 크게 그리는 것은 대부귀도(大富貴圖 - 크게 부귀를 누리다)가 된다.
모란꽃과 바위를 함께 그리면 부귀장수(富貴長壽)이며(동양화에서는 바위가 장수를 뜻함)
모란꽃과 장닭을 함께 그리면 부귀공명도(富貴功名圖 -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 부귀를 누린다)
모란꽃과 병(甁)을 함께 그리면 부귀평안(富貴平安 - 평안하게 살면서 부귀를 누리다)
모란꽃과 백두조를 그리면 부귀백두도(富貴白頭圖 - 머리가 하얗게 셀때까지 부귀하다) 이때 백두조는 반드시 두 마리를 그린다. 한마리나 세마리는 부부해로(夫婦偕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모란꽃과 목련(玉), 해당화(堂)를 함께 그리면 부귀옥당(富貴玉堂 - 귀댁에 부귀가 깃들기를 기원하다)의 뜻이 담겨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덕여왕과 모란도 일화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 자주빛, 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 여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는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여왕의 말처럼 향기가 전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여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란 것을 아셨습니까?" 여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매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의 배우자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타난 지기는 초능력적인 예지라기보다는 선덕여왕의 세심한 관찰력과 뛰어난 분석적 판단력이다. 꽃에는 으레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인데 그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으니 그 향기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일화 속에는 당태종과 선덕여왕의 수준 높은 지혜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당태종은 남편없이 혼자 사는 여왕을 향기 없는 모란에 비유해 은근히 조롱하고, 당태종의 의도를 간파한 선덕여왕은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 분황사를 설립하며 그의 공격에 한수 높게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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