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에게 미술사의 대표적인 화가를 꼽아 보라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많은 화가들이 꼽힐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인들에게 물어봤다면?
정답이 있다. 바로 아펠레스(B.C. 352∼308).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화가였던 아펠레스는 무수한 일화를 만들어내면서 후대의 화가와 학자들로부터 ‘아펠레스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미술의 역사에서 최고의 예술가는? 그건 단연 다이달로스다. 미로를 건설하고, 크레타 왕비 파시파에에게 아름다운 암소를 지어주고, 밀랍을 녹여 붙인 깃털날개로 신화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올랐던 만능 천재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예술가의 전설이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에서 최고의 화가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가서 질문을 던진다면, “아 그건 당연히 아펠레스지” 하는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아펠레스는 두말할 나위 없이 화가의 제왕이요, 붓의 신기를 이룬 예술적 천재의 본보기로 통했으니까. 가령 멋진 그림을 감상하면서 화가를 추켜세울 요량으로 “아펠레스 저리 가라로군” 하고 말하면 더없는 찬사로 얼굴이 상기되곤 했다.
피렌체 화가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리고 “아펠레스라도 이만큼은 못 그렸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는 〈악타이온의 죽음〉을 그려서 “두 번째 아펠레스”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 밖에도 벨리니, 시뇨렐리, | |
플링크, 브뢰헬, 홀바인, 렘브란트 같은 뜨르르한 화가들이 ‘아펠레스가 다시 태어났다’는 입 발린 말에 뻑 가는 ‘아뻑 클럽’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아펠레스의 발치라도 붙들려고 그의 일화를 흉내내는 화가들이 도처에서 잇달았다. 아펠레스가 그렸다는 그림 소재를 똑같이 따라하는 화가부터 그의 생애와 일화를 시시콜콜 꿰는 인문학자들까지 아펠레스 신드롬이 근대 예술계를 휩쓸었다.
아펠레스는 코스 출신의 그리스 화가다. 코스는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의 모교가 있던 섬이다. 지금도 학교와 병원 터가 남아 있다. 아폴론이 샛바람을 피워 얻은 아들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사람을 살려낸 죄값으로 제우스한테 죽임을 당하기 전에 바로 이곳 코스에다 그리스 최초의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히포크라테스가 의술을 이어받았다고 전한다. 화가 아펠레스도 해부학쯤은 능통했을 것이다.
아펠레스는 기원전 352년께 태어나서 쉰을 못 채우고 308년에 죽었다. 활동 시기가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하고 겹치는 셈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런 일화도 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다 아펠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초상을 그려서 걸어 두었는데, 대왕이 와서 보고는 제 얼굴하고 하나도 안 닮았다고 투덜댔다. 그런데 타고 있던 애마 부케팔로스가 그 그림을 보고는 콧바람을 내뿜으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대왕이 의아해하자 아펠레스가 짐짓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차라리 주인보다 말이 더 낫구먼, 그림 보는 눈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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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을 물 먹였다는 이야기는 또 있다. 아펠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화가가 된 다음이다. 미술과 문예에도 식견이 있다는 대왕은 툭하면 아펠레스의 작업실에 들러서 노닥거리곤 했다. 문제는 올 때마다 이 그림은 여기가 어쩌네 저쩌네, 토를 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 들으란 이야기겠지만, 아펠레스는 대왕의 아는 척이 꼴 같지 않아서 심사가 뒤틀렸다. 마침 작업실에서 시중드는 시동이 입을 가리고 킥킥대자, “엔간히 하시지요. 애들이 듣고 웃습니다” 하며 일격을 날렸단다.
이런 일화는 힘없는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통쾌하게 들렸을까? 당대를 호령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조차 〈다윗 상〉을 세울 때 피렌체 시장 소데리니가 “그런데 말이지, 코가 좀 높은 것 같지 않나?” 하고 아는 척을 하자, 차마 반박은 하지 못하고 사다리 위에서 끌을 톡톡 치는 시늉을 하면서 미리 준비한 대리석 가루를 살살 뿌렸다지 않는가! 그러니 군주나 귀족처럼 권세 높은 주문자들 눈치 보느라 밤낮 없이 시달렸던 예술가 | |
들에게 아펠레스의 시원한 일화는 묵은 체증을 삭혀 주는 특효 처방이었다.
아펠레스는 톡톡 튀는 행동과 언사뿐 아니라 붓으로 말하는 진짜배기 화가였다. 한번은 밤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단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그래, 구렁이 한 마리를 큼직하게 그려서 나무에 걸쳐 놓았더니 당장 새들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단다. 꼭 선배 화가 제욱시스가 포도를 그렸더니 새들이 그림 속으로 다투어 날아들었다는 이야기하고 비슷하다. 이처럼 아펠레스의 그림은 자연을 쏙 빼닮았다고 한다. 관상쟁이 하나가 아펠레스가 그린 초상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언제 죽을 팔자인지, 몇 해나 살았는지를 맞추었는데 그야말로 족집게였다고 한다. 관상쟁이나 화가나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화가 여럿이 모여서 누가 말 그림을 제일 잘 그리나 내기가 붙었다. 다 그린 그림은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심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펠레스의 작품을 가지고는 다들 졸작이라고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군말 없이 마구간으로 달려간 아펠레스는 말을 한 마리 끌고 왔다. 잡고 있던 수말의 고삐를 놓자 다른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뜸 아펠레스가 그린 아름다운 암말을 향해 돌진했다고 한다. 자연의 눈을 빌려서 엉터리 예술가들의 콧대를 꺾은 셈이다. 그때 수말이 어찌나 호되게 몰아붙였던지 그림이 남아나지 않아서 아쉬울 뿐이다. 아펠레스의 암말 이야기는 프로토게네스가 붓으로 그린 자고새를 보고 진짜 자고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목청껏 구애를 했다는 일화하고도 같은 줄기다.
자연을 깜빡 속여넘기는 아펠레스의 신기한 붓 솜씨는 곧 새끼 일화들을 낳는다. 피렌체 화가 조토가 스승 치마부에의 그리다 만 초상 위에다 까만 파리를 한 마리 그려 넣은 것도 그렇다. 집에 돌아온 치마부에가 “이놈의 파리가!” 하면서 팔을 여러 차례 휘둘러 날려 보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또 뉘른베르크의 화가 뒤러가 미켈란젤로의 그림 위에다 거미를 그려서 거장을 헷갈리게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아펠레스의 자연주의 미술에 대한 헌사다.
대왕의 애첩을 사랑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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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펠레스의 평생에 가장 통쾌한 일화를 대라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애인을 찜했던 사건이다. 대왕은 잘 알려진 대로 춤 솜씨가 현란한 록사나와 결혼을 하지만, 그 전에는 더 아름다운 총희를 하나 데리고 살았다. 이름은 판카스페. 르네상스 이후에는 캄파스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대왕은 판카스페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젊음이 시들기 전에 알몸 그림 하나쯤 기념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플리니우스는 이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또 한 차례 특별한 일화를 통해서 화가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판카스페라는 이름의 총희가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늘 경복을 금치 못하던 대왕이 명을 내려서 아펠레스로 하여금 그녀의 벗은 몸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대왕의 명대로 작업을 시작한 아펠레스가 대왕의 총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대왕은 화가에게 여인을 선물로 하사한다. 위대한 대왕의 너그러운 천성 탓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이기는 대왕의 자제심은 더욱 | |
위대했고 그의 관대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대왕이 거두었던 어떤 다른 승리에 견주어 모자라지 않는 위대함을 이루었다. 이유는 이렇다. 대왕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을 이겨냈으며, 자신이 소유했던 총희뿐 아니라 그의 애정까지도 화가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때 자신이 소유했으나 지금은 화가의 품에 안기게 될 여인에 대한 사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접어둔 채로!”
“아니, 저것들이!” 하고 눈을 부릅떴던 대왕이 화가 아펠레스에게 애첩을 양보했다는 이야기는 지상의 권력이 예술의 천재에게 아름다움의 영광을 넘겨주었다는 미학적 도식으로도 읽힌다. 플리니우스는 뒷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아펠레스는 판카스페를 모델로 삼아서 〈바다 거품에서 태어나는 비너스〉를 그렸다.” 새벽 별처럼 아리따운 아내를 얻은 화가가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판카스페도 세계 제국의 안주인 자리를 놓치긴 했지만 회화의 영토에서 더없는 신성을 꿰찼으니 그리 밑진 장사도 아니었다. 아펠레스 이야기는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아테네의 정치 실세들을 품에 넣고 주무르던 아름다운 창녀 프리네를 아내로 취해서 〈크니도스의 비너스〉를 조각했다는 일화와도 퍽 닮았다.
아펠레스는 또 붓 솜씨 덕분에 생명을 건지기도 했다. 루키아노스의 기록을 보면 그의 재능을 시기하던 화가 안티필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아펠레스가 왕위 전복을 꾀했다고 위증한다.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이 된 아펠레스는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등장하는 우의화를 한 점 그리는데, 이 그림을 본 왕은 그의 결백을 믿고 오히려 위증자를 처벌했다고 한다. 〈아펠레스의 모함〉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이론가 알베르티가 화가들이 마땅히 익혀 두어야 할 시학 주제의 본보기로 꼽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아펠레스의 그림은 이랬다고 한다. 커다란 귀를 가진 남자 옆에 여자 둘 이 서 있는데, 하나는 무지, 다른 하나는 시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맞은편에서 모함이 다가온다. 모함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교활해 보인다. 모함은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왼손으로는 한 소년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끌고 오는데, 소년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뻗고 있다 … 맨 뒤에 따라오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부끄러움과 수치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림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이렇게 좋은데, 그 유명한 화가아펠레스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면 얼마나 우아하고 사랑스러울지 그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회화론》 3권)
아펠레스가 제 재능을 믿고 콧대만 높았던 것은 아니다. 다 그린 그림은 대문간에 세워 두고 그 뒤에 몰래 숨어 있곤 했는데, 집 앞을 지나치던 행인들이 그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비판을 달게 수용하는 겸손한 화가였다는 것이다. 또 주문자만 마음에 들어하면 그만이라는 그 당시 화가들의 관례적 사고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파격이었다. 하루는 구두장이가 트집을 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 속 등장인물의 신발에 끈을 매는 고리쇠가 하나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림 뒤에 웅크리고 있던 아펠레스는 비판을 귀담아 두었다가 냉큼 고쳐 그렸다. 그런데 이튿날 그 구두장이가 또 와서는 등장인물의 다리 모양이 어째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며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아펠레스가 참을 수 없었다. 이래봬도 해부학 전통이 살아 숨쉬는 코스 출신이 아닌가. 아펠레스는 주제넘은 구두장이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구두장이는 구두 깔창에나 신경 쓰시지.” 이 말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풍자집 《아다지오》에 ‘주제넘게 아는 체하면 몸에 해롭다’는 뜻으로 인용하면서 뭇 예술가들이 즐겨 입에 올리는 격언이 된다.
아펠레스 이야기는 플리니우스가 《박물지》 35권에 써서 전하는 내용이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었던 플리니우스는 군인 출신답게 근육질의 무뚝뚝한 문체가 특징이지만, 아펠레스만 나오면 사뭇 물기 넘치는 문장을 술술 뽑아낸다. 플리니우스는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어디서 얻어들었을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 궁정 조각가 리시포스가 크세노크라테스라는 제자를 두었는데, 글재주가 비상해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적이 있었다. 이 책을 또 다른 조각가 안티고노스가 읽고 내용을 조금 더 붙여서 예술가의 전기를 다시 펴낸다. 두 책 모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플리니우스는 아마 기원후 1세기까지 남아 있던 안티고노스의 책을 읽고 정리했을 것이다. 그의 《박물지》가 지금껏 살아남은 것은 미술사의 행운이다.
플리니우스는 마찬가지로 없어지긴 했지만 사모스의 두리스가 쓴 책도 참고했을 것이다. 한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한테 늘 기록을 채집하고 분류해서 글로 정리하라고 당부했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많은 미술관련 저작이 쏟아져 나온 것은 그런 전통 덕분이다. 심지어 나중에 가서는 하도 많은 예술가의 일화가 잡다하게 뒤섞여서 어떤 것이 원조 일화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화가가 지우개로 쓰던 스펀지를 던져서 헐떡거리는 개의 입 거품을 재현했다는 이야기를 두고 플리니우스는 프로토게네스의 일화로,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아펠레스의 일화로, 플루타르코스는 네알케스의 일화로 소개하는 식이다. 화가 공방에서 일어난 우연찮은 사건이 이름난 화가의 일화처럼 각색되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말이나 개의 주둥아리 거품을 스펀지를 눌러서 재현하는 방식이 고대 화가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의 예술가 가운데 아펠레스의 일화는 특히 16세기 이후 궁정 문화가 융성하면서 미술사의 감초 주제로 떠오른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불이 붙었다가 북유럽까지 금세 유행을 타오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가 티치아노가 떨군 붓을 집어주려고 허리를 깊숙이 구부렸다는 이야기, 뒤러가 작업하는 동안 밑에서 사다리를 꼭 붙들고 시중했다는 막시밀리아누스 1세의 일화도 결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펠레스에게 바쳤던 고귀한 헌사의 후렴구일 뿐이다. 아펠레스의 작품은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데도 그의 명성이 조금도 빛 바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출처 : 월간미술
잠 바티스타 티에폴로 〈판카스페를 그리는 아펠레스〉
42×54cm 1735∼1740 로스앤젤레스 폴게티 미술관
샤를 메니에 〈아펠레스에게 판카스페를 넘겨주는 알렉산드로스〉
111.5×145cm 1822 렌 조형미술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