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국내작가소개방

한국화 이야기

영원한 울트라 2005. 9. 2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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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는 크게 3 부문으로 분류한다.
1,회화(繪畵);일반적인 모든 그림을 말하며 산수화 화조화등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그림들을 말함.
2,문인화(文人畵);채색을 하지 않는 순수 먹물로만 그린 그림을 말하나 근래에 와서는 특수하게 채색을 가미 하였더라도 문인화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음.
3,민화(民畵);전문 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 않고 일반 가정이나 사업장에서 개인기를 발휘하여 그린 그림들을 민화라고 하며 낙관이 없는것이 특징이고 근래에는 전문 화가들도 민화를 많이 그린다,소제와 기법이 거의 일정하다,이는 민요를 가수가 불러도 민요라고 하듯 민화도 낙관을 하여 화가가 그려도 민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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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는 동양화에서 분류하여 우리나라의 특성과 민족적 의식을 내포한 표현법을 구사 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중국화 보다는 간결하며 단아한 맛을 풍기며,일본화 보다는 천박하지 않고 짙은 채색을 피하는 경향이기는 하나 채색을 한다 해도 담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것이 한국화의 특성으로 이어진다.
1980년 이전에는 동양화로 구분하여 세계의 미술을 동서 개념으로만 분류하였는데 동양 3국에서 먼저 중국과 일본에서 부터 각자의 이름으로 불려 사용하였다,
즉,중국화,일본화등으로 자기의 개성을 살려 구성해 가는 경향이 뚜렷해 감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화 라는 명칭을 공식 명칭으로 하게 되었다.
한국화는 우리의 개성을 살려 차별화 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요 한국화의 본질을 잘 이해 하는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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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공부 함에 있어 법식을 무시 하는 태도는 좋지 않고 일생동안 법식에만 묶여 있는 것은 더욱 좋지 않다.
처음 법식을 엄격히 지키다가 차츰 법식을 떠나 자유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니 법식을 지키는 궁극에 이르면 비로소 완전히 법식을 벗어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육법; (六法)
1,기운생동(氣韻生動);멋
2,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3,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에 충실
4,수류부채(隨類傅彩)맞는 채색
5,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
6,전모이사(傳模移寫);모방과 창작
이 육법은 화가 라면 꼭 알고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가끔 방송등에서 기운생동에 대하여 설명이 나오는데 기운이 생동하고...결국응 이말은 멋 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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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동양화)의 분종
북종화(北宗畵);
북종은 이사훈(李思訓)부자가 개조(開祖)인데 전해져서 송의 조간(趙幹) 조백구(趙伯駒),백소(伯騷) 마원(馬遠) 하언지(夏彦之)에 이르렀 으며,
남종화(南宗畵);
왕유(王維)가 개조인데 장조(張操) 형호(荊浩) 관동(關仝) 곽충서(郭忠恕) 동원(董源) 거연(巨然) 미씨부자(米氏父子)로 이어져 사대가에 이르렀다.
이것은 명말(明末)에 동기창(董其昌)등이 제창한 것으로 선종(禪宗)이 남북 양종으로 갈라지는 시기에 이사훈의 제자였던 왕유가 청록파 산수를 그리지 않고 청담(淸淡)한 수묵산수(水墨山水)를 그리기 시작한것이 원의 사대가에 이른것으로 육조대사(六祖大師)이후 마조(馬祖)운문(雲門)같은 영걸이 나온 시기와 같은 때이다.
그림은 남방 사람이 남종화를 하고 북방사람이 북종화를 한것은 아니다.그림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북종화는 사물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즉 북종화는 그림 그 자체가 실물과 같이 그린다는 뜻인데 사진 처럼 그린다 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것이고,
남종화는 사물에 근거를 두되 작가의 사상이 깊히 잠재해 있는 그림이니 다소 사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생기더라도 의미가 새롭게 부여 되는 그림이라 할수있다,이때 그림은 눈으로 그리지 말고 마음으로 그려라 라는 말이 생겨났고 다소 추상적인 맛을 갖게하는 그림이다.
동양회의 추상화도 여기서 부터 출발 했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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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자연을 화폭에 담은 산수화
산수화는 산자수명(山紫水明)의 약자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대표적인 이름이다.
산수화는 역시 산과 내를 중심으로 자연의 경치를 그리는 데 서양의 풍경화와 같으나 산수화로 구분하는 이유는 자연을 인간이 몸담고 으지하고 사는 경이로운대상 또는 자연과 인간을 대등하게 보는 이상으로 자연을 넘보지 않앗다.
반면 서양인들은 자연을 인간이 정복할 대상,아니면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절대적인 상반된 관계로 보아왔다.
밀레의 만종이나 풍차 그림등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사람을 삼키는 사나운 바다는 자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서양풍경화의 좋은 예이다.
허나 동양화에 나타나는 것은 정 반대이다,종이 붓 벼루등 문방사우로 옮겨놓은 자연은 숭고함이 넘치는 것이다.
산수화의 기법은 4단계로 나눈다,그릴 대상의 윤곽을 잡으면 ,산과 바위,시내가 들어 앉고,그 다음 먹이나 물감으로 채색한후 풀 수목등으로 미흡한 곳이 마무리된다.옛 서당이나 서예학원 에서 습자 할때 처럼 개칠이란 있을수없다.
서양화는 원근,명암,투시법을 중시하며 산술적이다.
하지만 우리 산수화는 질감과 원근이 뚜렸해도 산술적은 아니다,자연을 올려다 보거나(高遠) 대등하게(平遠) 보거나 골짜기를 내려다 보거나 굽어보는 (深遠)기법을 활용한다.
이른바 삼원법이다

한국화(동양화)의 분종
북종화(北宗畵);
북종은 이사훈(李思訓)부자가 개조(開祖)인데 전해져서 송의 조간(趙幹) 조백구(趙伯駒),백소(伯騷) 마원(馬遠) 하언지(夏彦之)에 이르렀 으며,
남종화(南宗畵);
왕유(王維)가 개조인데 장조(張操) 형호(荊浩) 관동(關仝) 곽충서(郭忠恕) 동원(董源) 거연(巨然) 미씨부자(米氏父子)로 이어져 사대가에 이르렀다.
이것은 명말(明末)에 동기창(董其昌)등이 제창한 것으로 선종(禪宗)이 남북 양종으로 갈라지는 시기에 이사훈의 제자였던 왕유가 청록파 산수를 그리지 않고 청담(淸淡)한 수묵산수(水墨山水)를 그리기 시작한것이 원의 사대가에 이른것으로 육조대사(六祖大師)이후 마조(馬祖)운문(雲門)같은 영걸이 나온 시기와 같은 때이다.
그림은 남방 사람이 남종화를 하고 북방사람이 북종화를 한것은 아니다.그림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북종화는 사물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즉 북종화는 그림 그 자체가 실물과 같이 그린다는 뜻인데 사진 처럼 그린다 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것이고,
남종화는 사물에 근거를 두되 작가의 사상이 깊히 잠재해 있는 그림이니 다소 사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생기더라도 의미가 새롭게 부여 되는 그림이라 할수있다,이때 그림은 눈으로 그리지 말고 마음으로 그려라 라는 말이 생겨났고 다소 추상적인 맛을 갖게하는 그림이다.
동양회의 추상화도 여기서 부터 출발 했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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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까지 표출하는 인물화
인물화는 동양화 중에서도 가장 먼저나온 분야다.
중국의 경우 당(唐)대 이전의 회화는 거의 인물화 중심이였다.그리고 화조 산수화는 그 다음에 나온 분야라는게 학계의 이야기다.
인물화 에는 많은 종류가있다.
일반적인 인물화로는 신선등을 그린 도석(道釋)인물화,초상화,산수화등의 점경(點景)인물화를 꼽고,특수 인물화로 궁녀등 미인을 그린 사녀(仕女)인물화와 불교 인물화가 있다.
인물화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골격,머리와 얼굴 부위는 반드시 삼정오안(三停五眼)으로 분류한다.즉 삼정은 얼굴을 세 부분으로 나눈 이마(상정),코(중정),턱 부분(하정)을 말하며 오안은 얼굴 생김새를 다섯 가지로 나눈것으로 육안(肉眼),천안(天眼),법안(法眼),혜안(慧眼)불안(佛眼)으로 부른다.
인물화에는 의(意)와 기(氣)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필의와 필기가 있고 음양을 나눠 허실을 정하고 농담을 참고삼아 마음속에 의기를 이룬 다음에 붓을 들었다는 것이 옛 화가의 자세였다, 때문에 인물화가는 관상학 부터 배웠다는 속설도 이치에 맞는듯하다.
초상화를 전신(傳神)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다,전신은 중국의 회화용어로 등장했으나 빛을 보인것은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옛 화단에서다,특히 조선시대 사대부 화가들이 한국화를 주도하면서 전신화법이 중시 되었으며 걸작들을 많이 남겻다.
이른바 죽은 그림과 산 그림의 평가는 이같은 작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인물화에서 눈 부분을 그리는 법을 말한 안광론을 빌면 눈빛은 신체5부의 정화로 꼽아 해와 달로 비유하고 있다,작가의 신기가 눈빛에 나타나는것이다.
눈빛에는 내뿜는 광채(露),감추어진 빛(藏)이 있으며 원근에 따라 다르다,또한 희노애구(喜怒愛懼)등 사람의 표정이 눈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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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하면 대개는 어떤 것이란 것 쯤 쉽게 이해가 갈것이다,하지만 절지화 하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를것이다.
옛 우리 조상들이 그려온 그림중 한 분야지만 서양화 이론위주의 미술교육에 우리의 용어마져 소외 시켰으니 당연하다.
억지로 동,서양화를 대칭시켜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되는 정물화와 상대되는것이 "기명절지(器皿絶枝)"라고 할수있다,꽃꽂이된 도자기 화병 아래 과일도 널려있고 심지어 살아있는 게까지 기어가고있는 다양한 소재의 그림이 우리의 기명절지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절지화는 기명에 그치지 않는다,창밖의 매화가지도 고목의 가지위에 앉은 독수리도 절지화가된다,화가의 눈에비친 뜻있고 아름다운 한 부분만을 비단이나 화선지에 옮겼을때 절지화가 되는것이다.
절지화가 비록 한 부분만 옮겼다 해도 정물화와 달리 생동하는 깊은 맛을 주는것은 동양의 자연관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서양의 정물화와 다르게 지극히 주의적(主意的)인 것이다,한마디로 기운생동(멋)이 넘쳐야 성공작으로 칠수있다,공간적 감각은 운율마져 여과시켜 담아야 한다는 집약되 정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근대의 오원 장승업은 이 절지화에서 새로운 구도법과 투시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장승업의 이같은 새로운 예술형식을 그의 창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전통 한국화가 근대화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실험적 절차로 활용 되었을 지도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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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 새가 어울리는 화조화
꽃과 새를 소재로한 화조화는 현재도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는 분야의 하나이다.서울의 골동가인 인사동이 아니더라도 일반 가정에도 화조화 한두점 없는 곳이 없다.
오원 장승업 이후 미술사 적으로 꼭집어 이들이 대가라고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소림 조석진,심전 안중식,관재 이도영과 이들의 문인이였든 묵로 이용우, 수운 김용수등이 수준 높은 작품들을 남겼다.
화조화 역시 문양까지 포함하면 그 역사는 깊다,중국에는 당나라 이전에도 봉이나 금수를 그리고 있으나 꽃과 나무와 결부된 것은 아니였고 당나라의 초기에 영모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당나라 말기에 유미파(唯美派)화가들이 본격적인 화조화의 체계를 세웠으니 오대(五代)에 와서 화원 화풍의 구륵 진채법을 쓰는 황전의 부귀체화조 풍이 2대 기법을 이루었다,이들을 추종하는 후배 화가들에 의해 쌍구법(雙鉤法)과 몰골법(沒骨法)을 형성시켰다.
원나라 초기에 혼란으로 화원(畵院)의 해산으로 보호받던 화조 화가들이 야인의 신분으로 흩어저 점차 쇠퇴했지만 전선(錢選)이 치밀 주도한 선묘법(線描法)의 새 기풍을 조성했고 명나라때는 모든 유파를 망라해 사의적 요소를 가미해 명쾌하고 간담(簡淡)하며 청아한 화조화가 등장하게 되었다.화조화는 청나라때 크게 번성하여 산수화와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우리나라 에서도 화조화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분야지만 대학 미술 교육에서는 전통적인 화조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재야 화가들에 의해 기법이 전수되고 있음이 아쉬운 일이다.


잡초와 벌래의 생동감,초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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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충화훼화는 색채가 강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중국과 달리 수려한 아름다움은 독특하게 형성되어 간 기법에서도 나타나고 잇다.
학자들은 초충화훼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초기의 신 사임당,중기의 심사정,후기의 조희룡과 남계우를 꼽는다.초기 작품의 구도는 중심구도와 상하 구도로 화면의 아래쪽에 꽃을 중심으로 풀과 벌래를 그리고 있다,중기에는 변각구도(邊角構圖)가 약간보인다.중간에는 나비 위쪽에는 화제,아래에는 초충의 3단계로 나뉘어지는 화법은 말기에 성행 하였다.
초화의 화법은 구염법(鉤染法),몰골법(沒骨法),묵필점염법(墨筆點染法),백묘법(白描法)을 쓰고 있다,그러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화초마다 지니는 특색과 작가에 따라 다르다.단지3원법의 산수화 구도와는 달리 요철법에 따른 구도를 잡는것이 특징이다.
초충화훼의 가장 중시되는 것은 곤충의 위치와 표정,계절이다,곤충 등 동물의 표정과 형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려는 동작 날으려는 의지,뛰려는형태 울려는 모습 등이 분명히 표현되고 있는것이다,곤충의 경우 움직이려면 날개를 펴지 않으며 울려고 할때는 날개를 털고 다리를 세운다,뛰려고 할때는 다리에 힘을 준다,이같은 면밀한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초화와 같이 풀벌래도 계절에 따라 색갈이 변한다,초목이 무성할때는 초충도 녹색을 닮으며 단풍이 들면 풀벌래의 색갈도 변하고 형체도 달라진다.
하지만 사실적인 표현을 넘어 한국 특유의 해학이 담겨있는 것이 우리 초충화훼화의 빼놓을수 없는 자랑이다,신 사임당의 그림에서 처럼 연약한 꽃에 나비가 따른다,자연의 섭리 임이 분명하지만 여성이 억압받던 그 시대의 애환을 생각하면 다시한번 음미해 볼만 한 것이다.


잉어는 출세의 상징,어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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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려 가는 선비의 품에 어해도
어해도(魚蟹圖) 하면,
물고기들의 그림이지만 최근 물고기 그림류는 전통적인 잉어,게,새우,메기,쏘가리,등의 한정된 소재를 뛰어넘어 붕어와 조개류 가오리 오징어등 바다 고기 까지 다양해 지고 있다,이당 김은호,소정 변관식,심산 노수현등 이른바 근대 6대가로 꼽히는 이들 대표 화가들도 훌륭한 물고기 그림을 남기고 잇다.또하 현존하는 화가들 중에도 물고기 그림을 많이 내고 있다.
그러나 물고기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교육시키는 스승이나 교육장은 없는것이 아쉬움이다.
비록 과거에 높히 취급받지 못한 화가였다해도 근세에 들어 오면서 관념적인 그림들 보다는 생동감 넘치는 이 분야의 수요가 늘고 있음에도 여기적(餘技的)인 작업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들과 화가들의 솔직한 이야기다,일부 화가들은 물고기 그림이 어종의 특성을 알아야 하며 기본적인 화력을 갖추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등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얼른 접하기 꺼리는것이 아닌가 한다.
허지만 우리나라 물고기를 우리 화가들이 그려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화가는 거의 없다.
물고기 그림이 자연을 보는눈과 바른인품을 바탕으로한 민중시대의 활달하고 남성적인 그림이라는 새로운 평가는 음미해 볼만한 것이다.
잉어는 출세 게는 수호 메기는 웅지 새우는 우애를 상징하고,이는 바다 고기 보다는 민물고기를 선호했다.


아름다운 모습 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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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옛 여인들은 어떤 모습이 였을까? 서양의 초상화 하면 미녀가 연상 될만큼 여인들의 그림이 많지만 전통한국화 에서는 쉽게 찾아 보기가 힘든것이 여인들을 소재로한 그림이다.
고분 벽화나 범종의 조각에 여인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화폭에 담긴 여인들은 가짜 시비를 불러 일으켰던 신 사임당의 초상화와 윤선도의 종가에서 발견된 미인도가 가장 오래된것이다.
고산의 옛집 녹우단에서 나온 이 미인도는 공재 윤두서의 작품인지 그 아들 낙서윤덕희의 그림인지는 확실한 고증을 요구한다.
그러나 전문가 들은 가장 오래된 미인도중 최고의 걸작 품으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보다 이 그림이 앞설것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 미인도의 수는 늘어났으나 왕가나 선비 집안 부인들의 초상화는 거의 없고 춘향 계월향 운낭자 최홍련등 의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잇다.
비록 많지 않은 그림이라 해도 이 그림들로 하여금 우리는 옛 여인들의 자태를 엿 볼수잇다,삼단같은 큰 트레머리 자주고름에 달린 수마노 삼작 노리개,희고 가냘픈 손,초생달 처럼 긴 눈썹 ,그 선을 닮은 듯 가냘픈 허리 하늘거리는 잔 귀및 털은 앳된 얼굴과함께 염려(艶麗)하고 신선감을 준다.
머리 끝에 살짝 매단 자주빛 댕기도 앞섶의 자주고름과 어울린다,특히 혜원의 미인도 에서는 살짝 드러낸 겨드랑이의 속살 풍만한 하체를 감춘 치마아래로 언뜻 비치는 흰 속옷이 선정적이다.
이같은 조선의멋과 가락, 그 감흥은 역시 우리의 멋이요 아직도 우리 한국인의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주술과 부적의 힘 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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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소자연,괴석도
괴석(怪石)화.
돌은 천지의 뼈요,물은 천지의 피라는 말이 있다,도시 아스팔트 위에서는 돌을 찾기도 힘들지만 명산 대천에는 아름다운 돌들이 널려있다.
돌의 형태는 천태 만상이다,천지와 함께 태어나 돌은 그 오래된 역사를 지녀 저마다 개성을 가진듯 생김 생김도 가지가지다,기암에 괴석도 있고 눈길을 끄는 수석도 있다.
천지의 신비를 체험한 돌들은 말이 없어도 비밀스런 철리를(哲理) 간직 해탈한듯이 보이는가 하면 서민들 처럼 발뿌리에 차이는 돌들도 많다,자연을 축소한 나름데로의 모습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 떨어져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텅비어 구멍이 난 돌은 보는 이에 따라 감상이 다를 것이다,그러니 화재가 않될수 없었을 것이다.
돌은 화가의 마음을 받아 그림이된다,기암 괴석이 화선지에 옮겨지면 그 작가의 말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 괴석도를 방안에 걸어두면 일종의 부적과 같은 효력을 기대 하기도 하고 자신의 수호라고 믿으며 주술적 기원을 이 괴석에게 보낸다.
화가들은 그 돌을 정성스럽게 옮겨 자신의 말을 담기 위해 여러가지 그리는 기법을 발전 시켰다,그 유형적 수법은 우점준 ,부벽준, 피마준,등 25가지나 된다.

풍속화는 도덕성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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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해학의 풍속화
우리나라 풍속화는 고려시대 태동한 것으로 보인다,고려에서 조선 초기의 선비들 계나 놀음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풍속화가 상당수 자리를 잡고있다.
조선후기 풍속화를 발흥시킨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이전의 작가와 사료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은 윤두서(尹斗緖)의 나물캐는 여인들, 이인상(李麟祥)의 송하 수업도,김두량의 도리 원흥도와 전원 행렵도 조영석의 장기도(將棋圖),강희언의사인 삼경도(士人三景圖)등이 꼽힌다.
그러나 우리나라 풍속화의 대표적인 작가는 역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다,정선이 그의 진경산수를 우리나라 산을 배경으로 했듯이 이들도 조선후기의 사회상을 소제로 본격적인 한 시대를 장식 했기 때문이다.
학계는 단원의 대표적인 풍속화로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풍속화첩의"서당도"와 "씨름"을 든다,혜원의전형적인 작품은"연당야유도"가 꼽힌다,특히 혜원은 남녀간의 애정,또는 춘정의 대담하게 잘 그렸다,혜원은 이 같은 춘의화 때문에 도화서 에서 쫒겨나기 까지 하였다,
혜원 이후 풍속화는 혜산 유숙(1827~1873)까지 이어지나 그 후로는 필자 미상의 "궁궐도"를 비롯 낙관이 없는 일부 화원들의 작품이 약간 전해질뿐 조선의 정취가 물씬하게 드러나는 뚜렸한 풍속화가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흔히 민속화를 풍속화로,풍속화를 민속화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녀노소가 보아서 무난하면 민속화로,미성년들이 보기에 부담이 가는 그림은 풍속화로 보아야한다.

풍속화는 엄격히 따져 18세 이하 관람불가의 작품이라 할수있는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그림을 말하며,이하 생활 모습이나 지역적 특성을지닌 풍속및 놀이등을 그린 그림은 민속화라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시대의 그림들을 모두 풍속화로 분류하고 있다.


글쓰는 선비의 짧은 스켓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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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와 자유를 엮은 문인화
조선시대 화가들을 환쟁이라 천시를 했다,그러면서도 명품을 남긴 화가중에는 왕족 사대부등 선비들이 많다,산수 인물 시 서에 능했던 강희안(姜希顔)을 비롯 이정(李霆-세종의 현손)(손자의손자),김시습,김정희에 이르기 까지 사대부 문인 화가는 이름을 남긴 화원 보다도 많은 편이다.
고려때는 공양왕이 그림을 그렸고 조선조에는 안평대군이 가장 많은 서화를 가졌던 소장가로 꼽힌다,신숙주가 쓴 화기에는 안평이 2백22점의 서화를 수집 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화공은 멸시 해도 그림만은 사랑했던 것일까?
이같은 의문을 쉽게 풀어진다,중국화론이 사대부 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졌기 때문이다,시화를 같은 같은 것으로(詩畵一律) 보는 사상이 사대부들의 서화 수장과 제작을 합리화 했을 것으로 보인다,중국의 주자도 그림을 좋아 했고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 사대부들도 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예학자 김장생(金長生)이 화원 이징(李澄)의 방문을 받았을때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았다 한다,제자들이 깜작놀라 환쟁이를 그렇게 우대 하느냐고 물으니 주자의 예를 들었다고 한다.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도 사대부가 그림을 그리는것은 흠이 않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인 화가들은 구분된 양식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새 화풍의 수용에는 화원들 보다 진취적 이어서 회화 발달을 주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문인화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다르다,문인화의 정의부터 바르게 확립 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문인화는 다양했다,

현대에 와서 문인화는 확실하게 분류해 놓고 있다,채색을 하지않은 묵화를 우선 문인화로 지정하고 부분적 채색이 되었더라도 문기가 넘칠때는 문인 화로 분류한다


작가 미상의 전통회화,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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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숨은 애환을 담은 민화
민화(民畵)란,
문자 그대로 민간인들이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림의 특성을 분석해 보면 낙관이 없고 기법이 일반 회화와 다르며 구도가 한정되어 있는것을 볼수있다.
그림을 보면 장수를 상징하는 것,복을 비는것,못된 귀신을 쫓아 내는 것,자식교육,민족 상징 등 구분이 뚜렸하다.
성격적 으로 구분 하거나 그림별로 구분 할수 있는데 특별히 그림 공부를 하지않고 재주만 믿고 주변의 재료를 얻어 그린 것이 민화로 발전 한것 같다.
나무 조각에 인두화,돌과 바위에 각화,섬유질에 투박한 그림,흙과 토담에 낙서같은 그림,기와나 항아리 그릇에 그림,가구나 생활 용품에 그린 그림들을 살펴 보면 추상화 같기도 하고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기도 하고 문자를 그림 형식으로 풀었거나 모아쓴 기법을 동원 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화는 다양한 솜씨를 였볼수는 있는데 구성은 아주 간결하고 단순하다,원근이나 명암은 없으며 상하좌우 고저 장단에도 무관심 한듯 사물의 표현에만 치중한 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인두화등의 산수화는 또 회화의 기분을 그대로 맛볼수있게 하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개는 단순 간결하다.
특히 주술적인 상징물이 많은데 네눈의 호랑이 머리가 여러개 달린 뱀도 있다,무속인들의 방에 있는 삼신도 라든가 하는 그림,자수 십이지 상 등도 당시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낙관이 없다고 다 민화는 아니다.
트로트 가수가 민요를 부르면 민요지 트롯트 라고 하지는 않는 것과같은 이치다,요즘엔 낙관이 된 민화도 많이 나온다,
소재와 기법을 보면 민화로 구분 지을수잇다



동양은 불교문화에서 시작.

 

내연의 종교 불화
붉은 빛과 금빛이 찬란한 불화들은 한국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보요주는 귀중한 작품들이다.
1천6백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불교는 한국문화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존하는 문화재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작품 활동이 쇠퇴하고 있지만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불교 미술이 끼친 영향력을 곳곳에서 쉽게 찾을수 있다.
종교화의 생명은 그 종교의 부침(浮沈)을 반영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우리나라 불화도 신라 고려때 우수한 작품들이 많은데 반해 조선조 부터 쇠퇴하는 감을 주고 잇다.
한일 비교 회화사를 연구하는 일본 학자는 고려 관음상은 동서의 종교화 중에서도 그 우수성을 돋보이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탈리아 피렌체의 최초 대 화가 지오토,의 작품을 능가 한다고 햇다.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의 좋은 불화들을 많이 뺏어가 그들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했다,그러나 이같은 우리나라 불화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최근에야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으며 각 사찰의 소장 괘불등 전국 조사가 아직도 이루어 지고 있지 않다.


지죽상혼 기자청풍(紙竹相婚其子淸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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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타고 넘치는 풍류 선화
우리나라 옛 화가나 서예가 또는 선비들이 멋과 풍류를 즐기는 운치와 멋의 도구 ,부채가 어진 바람을 일으켜 사랑도 일으켰다는 부채 는,진의 이부랑 동양태수를 지낸 원굉이란 선비가 부채를 선물받고 "오로지 어진 바람을 일으켜 모든 백성을 위로 하리라"고 했던 고사에서 연유되고 있다.
산수와 나무 그 뒤로 나는 물새와 산새들,
바닷가 높은 언덕위에 정자가 한가로운 아침 풍경,선면 가득 이같은 그림들은 무더위를 쓸어내듯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반달의 좌우를 끊은듯한 부채의 흰 바탕은 고금의 많은 화가들에게 화의를 불러 일으켜 많은 걸작들을 남기게 했다.

더위를 씻어주던 부채를 들고다니며 그림까지 감상했던 조상들의 예술적인 슬기 이제 그 실용성이 줄어들어 부채는 단순한 소장품으로 애장되는 경향이 있지만 옛 부채 그림들 중에는 한국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완전한 한국의 그림, 그런 명품들이 많다.



*동양화의 정수 사군자*
사군자(四君子) 하면,
매(梅);봄-동,인(仁)의 뜻이 담겨 먼져 부른다,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가장먼져 피는 꽃으로 그 향기 또한 일품이니 선비들이 그를 좋아 했고 추운 겨울의 세 벗이라 하여,송(松)죽(竹)매(梅)를 세한삼우로 불렀다.

난(蘭);여름-남,예(禮)의 뜻이 있다,연약한 풀이지만 굳게 솟은 꽃대 에서 피는 꽃은 그향기가 천하 일품이다.

국(菊);추-서,의(義)의 뜻이있고 모든 식물이 시들고 낙엽이 지는마당에 홀로 피는 꽃,서리를 맞아 가면서도 굳게 피는 그 절개를 높히 평가 한다.

죽(竹);동-북,지(智)를 상징한다.사철 푸르고 곧은 형체가 선비의 성격 이라고 모두 좋아한다.

사군자는 정권의 혼돈기에 특히 발전하였다,불사이군의 유교적 충절 사상에 의미를 찾을수 있고,은둔생활을 하며 즐길수 있었던 문인들의 소일에도 큰 몫을 하였을 것이다.

요조숙녀 같은 고요한 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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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그윽한 품격, 난(蘭)
난은 이름도 많다,
유향,향조,왕자향,도량향,대백향,지란,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윽한 산 골작에 홀로 향기를 뿜는 난은 고결한 선비가 명수돈행(明修敦行) 하는 것과같아 이욕과 공명을 초개같이 여기는 선비의 자세로 비유되었다.
이렇듯 시인묵객들의 노래 속 에서 총애를받고 난은 성장했다,난을 치기 시작 한것은 명확치는 않으나 송나라의 정소남의 로근난은 유명하다,나라가 망하여 심을 땅이 없어 뿌리를 노출상태로 그렸다는 이야기다.

난은 봄에 피는것,일경일화(一莖一花)가 난이고,봄에 피는 춘란을 으뜸으로 난이라 칭하고,가을에 피며 일경 구화(꽃대에 2~9개의 꽃이핌)를 혜(蕙)라 하여 추란으로 불렀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한 사람들은 고려조의 왕서침과,조선조의 수월헌, 인희지,표암 강세황,우봉 조희룡,석파 이하응(대원군),소치 허유,원정 민영익,석재 서병오,영우 김용진,소호 김응현,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부작란도는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암향부동의 전령사,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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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먼저 알리는 의지, 매(梅)
차가운 눈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매화,
모든 식물이 동면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을때 밝고맑은 향기를 뿜어내며 매화는 핀다.
우리는 흔히 한가지의 매화를 볼수있다, 화개 천하지춘 즉 꽃이 피었음을 보니 천하에 봄이 왔구나 했고 한해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 매화다.
요즘에는 사시 사철꽃을 피우는 온상이 있어 꽃 나무들도 계절을 잊어가고 있지만 야생의 매화는 역시 멀지않아 봄을 알리는 첫 전령이다.
설한풍 눈발을 헤치고 피어나는 매화 그 가지 위에도 사쁜이 눈이 얹혀있지만 매화는 눈을 털며 새 생명의 찬란한 빛을 천하에 비추는 것이다.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 문자로 표현하기 보다는 역시 그림이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사군자 중에서 매화는 대 나무 그림보다 늦다,동양화의 소재로는 오대 부터이며 산수화에서 분리되는 것은 묵매의 독립된 발전을 의미한다,
천연적으로 아름다운 사계절을 지닌 우리나라는 세계의 어느나라 사람 보다도 계절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그러니 한해가 시작되는 첫달(1월)에 의미를 부여해 왔고 매화가 피는것을 보며 새해 소망을 빌며 만복의 은혜를 생각 했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 선바들이 지향하고 있는 궁극의 목표인 어진(仁) 마음에 비유된 매화는 결국 지조있는 문인화가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같은 심성을 표현하는 품격있는 그림으로 살아난 것이다.
매화는 백매,홍매,설중매,설죽매,월매등으로 부르며,
송죽매(松竹梅)의 세가지를 합하여 세한삼우(歲寒參友)라 한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청렴한 심성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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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의 정절, 국(菊)
국화가 사군자중의 한자리를 차지하여 절기있는 꽃으로 찬양받고 있지만 국화만을 소재로한 옛 그림은 찾기란 쉽지가 않다.
오히려 그림보다는 시로 더 많은 사랑을 받은것 같기도 하다.꺾꽂이로도 땅에 뿌리 내리는 강인한 국화는 다른 꽃들이 만발하는 좋은 시절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은 가을에 인내를 꽃 피운다.
이같은 생태를 절개로 보아 온 옛 선비들은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 라며 사랑해 왔다,현세에서 외면당하는 굳은 지조를 그렇게 비유하며 국화를 아꼈는지도 모른다.

조선조 중기이후 채국(彩菊)으로 등장한 우리국화는 고절한 선비들의 사랑을 받으며 묵화로 더 빛을 발한것 같다,그도 그럴것이 국화의 생태와 절기를 사랑하는 선비들이니 그 빛갈을 탐 했을리 없고 그져 마음 가는데로 쳐서 족자나 병풍에 절기를담아 가까히 하려 했을것이니 시 쓰던 붓으로 그 정절을 옮겨 찬(讚)하고 홀로즐겼을 것이다.
이같은 정경은 묵국을 평할때 매력과 절기를 으뜸으로 치는 것으로 도 쉽게 떠 올려진다,따라서 묵국은 화려함 보다 오히려 오만스런 자태를 더 높히 본다,묵국에는 절개를 높혀 본 한국인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대쪽 같은 선비의 곧은 의지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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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지조의 절개,죽(竹)
대나무를 사군자 중의 으뜸으로 치는것은 청청불변(靑靑不變)한 기품있는 자태의 정취있는 선비들과 화가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 열사나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했다.
죽화의 기원은 중국의 삼국시대로 올려잡는 학자도 있다,관우의 죽석각을 들어 시원을 올려보고 있는 것이다,

죽화에서는 용필 위치 자태 기운을 중시 하고 있다.또한 대나무의 생태가 들어나야한다,곧은 줄기 아픔을 이겨 새 생명을 탄생시켜 가는 마디 늘 푸른 잎새 그런중에도 튀어나오는 가지가 살아 있는듯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태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사실적인 습화의 단계도 중요하지만 그 색갈을 먹의 한 빛갈로 단지 농담으로 표현해야하는 묵죽화는 결국 사의화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본다,

대나무 그림을 대할때 기운을 중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50년을 그린후에야 마음에드는 죽화를 쳤다는 이야기는 이 같은 묵죽화의 깊은 맛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의 집약된 멋,낙관(落款)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여서 낙관이라 한다.
제발(題跋),화제(畵題),낙관인(落款印)을 합하여 낙관이라 하는데 이외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쓴 시기,장소,이유,인용구 출처도 밝힌다.
서,화에 작가의 이름도 쓰지만 아호를 쓰며,때로는 별호를 쓰기도 하는데 요즘엔 아호와 별호를 같이 쓰는 경우가 많다.이는 작가의 개성일 뿐 규정은 없다.

별호는 옹(翁) 산인(山,散人) 도인(道人)노인(老人) 거사(居士) 퇴사(退士) 은사(隱士)일사(逸士) 포의(布衣) 두타(頭陀) 외사(外史) 초부(樵夫) 초자(樵者) 어부(漁夫)등의 별호를 쓰는데 산인은 속세를 떠났다는 뜻이고 山人의 합자가 仙이니 신선이라 자칭하는 뜻이다.
散人은 어디에도 얽메이지 않은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란 뜻이며,두타는 승려를 말한다.

별호대신 당호를 쓰는경우도 있는데 신 사임당이호다,서재 화실의 이름을 쓰기도 한다,초당(草堂),재(齋),서옥(書屋),헌(軒),관(館),정(亭),각(閣),누(樓),산방(山房),실(室)등이다.

낙관은 작가의 이름을 쓰고 인장을 찍는 것인데 양화의 싸인과 같은 것이나 화제 제발과 인장을 찍으므로서 싸인보다 더 의미가 깊은 동양 서화의 특징을 이룬다.
특히 인장은 전각(篆刻)예술 이라는 한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
인장은 도장 도서 라고 하고 서화에 쓰는 인장은 낙관인(落款印)이라 하며 성명인(姓名印)과 호인(號印),사구인(詞句印),수인(首印),유인(遊印),감장인(鑑藏印)등이 있다.
성명인은 음각,호인은 양각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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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시 붙이는 월별 명칭
새해가 시작되면 연하장 등에 육십갑자의 연호를 적고 원단이라 쓴다,원단(元旦)이란 새해 가장 으뜸되는 아침이니 설날을 말하는것이다.
이외에도 월별 이름을 각자 즐겨쓰는 별도의 이름들을 알고 있다가 사용하고 꼭 월별뿐 아니라 절기를 적는 경우도 있다.
월별 많이 쓰는별칭,
1월;개세(開歲),세수(歲首),맹춘(孟春)원월(元月)초춘(初春)
2월;양월(陽月),중춘(仲春)여월(如月)중양(仲陽)
3월;가월(嘉月)도월(挑月),모춘(暮春)화월(花月)계춘(季春)
4월;등월(燈月),수하(首夏),맹하(孟夏),맥추(麥秋)시하(始夏)
5월;중하(仲夏),매월(梅月),우월(雨月),오월(午月)
6월;유월(流月),모하(暮夏)만하(晩夏),복월(伏月),초월(焦月)
7월;상월(霜月),오월(梧月),맹추(孟秋)양월(凉月),초추(初秋)
8월;계월(桂月),중추(仲秋),소월(素月),가월(佳月),안월(雁月)
9월;국월(菊月),중양(重陽),만추(晩秋),현월(玄月),고추(高秋)
10월;소춘(小春),상동(上冬),맹동(孟冬),곤월(坤月)
11월;지월(至月),동지(冬至),중동(仲冬),자월(子月),창월(暢月)
12월;납월(臘月),제월(除月),모동(暮冬),빙월(氷月),가평(嘉平),모절(暮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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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은 뼈요,색은 살이다
북화의 기법은 먹으로 선을 긋고 색칠을한다.
남화에서는 엷은 먹물과 색이 혼합되도록 소위 수묵담채라는 기법이 쓰인다.
전통 남화에서는 아예 색을 쓰지 않고 먹을 다섯가지 이상의 색을 내어 그림을 완성한다.처음엔 5가지색을 기본으로 먹물을 분해하여 재주를 부렸지만 지금은 여섯,일곱가지 색을 내어 먹의 오묘한 농담의 세게를 펼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소위 컬러시대가 되고 보니 아름다움을 꼭 전통에만 의존하기 보다는 강렬한 채색을 하여,즉 남화에서도 더 짙은 농채를 가미함으로써 보다 강렬한 감각을 표현하려한다.

이는 자연의 세계가 그만큼 짙은 색채를 요구하고 화려함을 추구하니까 그에 적응하려는 자세가 역역하다.
고로 화가는 자연이 모두 스승이요 자연이 선구자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 선구자인 자연을 따라 채색도 점점 짙게 하는경향으로 흐른다.
그러나 우리 한국화의 생명은 은근한 수묵화의 정신에서 바로 설수있고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있다.
어려서 피자에 맛들인 아이들도 어른이 되면서 점차 된장국에 익숙해지듯 미의 감각도 때로는 강한 색채에서 점차 엷은 담채의 깊은 감각을 찾는것이 한국적인 미의 전통이라고 본다.
그러나 먹은 뼈요 채색은 살이라는 근간은 어쩔수 없으니 이는 계속 반복의 두바퀴가 동시에 굴러가는가 보다.
세월은 흐르고 삶은 반복되는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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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비 수묵화,그 종류
수묵화라는 것은 문자그대로 물과 먹이란 뜻이다.
먹과 물울 잘 조화시켜 한폭의 그림으로 탄생시키는데 몇가지 용어와함께 표현방법을 정리한다.
1,백묘화(白描畵);채색이 없이 선만으로 표현을 완료한 그림을 말한다,화선지가 흰색이면 그림도 희게 보이고 황색이면 황색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2,구륵화(鉤勒畵)(法);가는 선으로 사물의 윤곽을 그리고 선 안에 채색을 하여표현하는 기법.모란꽃을 그리되 선으로 꽃 모양을 먼저그리고 나중에 채색을 하는 기법 등을 말한다.(화조화에 많이 적용)

3,수묵화(水墨畵);백묘법이 고전적 이라면 수묵화는 현대적인 다양성을 갖는 기법이다.따라서 작가의 의중이 깊히 베인 상징적인 표현이다.
*파묵법(破墨法);먼저 사물의 형상을 묘사한뒤 농담의 먹물을 사용 가미하는기법이다,즉 형상에 충실한 기법으로 객관성을 갖는다.
*발묵법(潑墨法);선의 윤곽으로 사물의 형상을 하지 않고 붓으로 먹을 듬뿍 뭍혀서 단숨에 전체를 그리는 기법이다.작업중에도 먹물이 화선지를타고 번지면서 형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다분히 주관적이다.

4,몰골화(沒骨畵);윤곽을 먼져 그리지 않고 먹과물을 붓에 뭍혀 그리는 것은 발묵법과 비슷하다,그러나 발묵은 형태를 주관적으로 표현하지만 몰골화는 형태를 없게하는 일종의 추상화에 가깝다고 보는것이 옳다.화선지에 물을 뿌려놓고 그리는 기법에 잘 활용한다.얼핏 보면 채색만 보이는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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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교수의 주장.
한국화의 보통사람들의 생각은 한옥 미닫이 방문이며 다락문, 병풍과 액자,족자 같은데서 본 채색,화조 그림 류와 먹을 쓴 수무화로 압축된다.
미적 본질에 대한 상상력을 이르키는 채색화에는 조선 중기이후 갑작 스럽게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린 화가들의 민화가 지배적으로 많아졌다.
이런 현상을 두고 최근 동양화가 이숙자씨가 "우리나라 채색화의 정통성을 되찾아 우리 한국화의 자산으로써 흐름을 이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늦 봄과 초여름사이 보리밭 풍경을 갖가지 묘사한 대표작을 내 놓은 채색 한국화로 화단의 중진인 이숙자 교수는 <한국근대 동양화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채색화는 고대이후 회화의 본질인 색을 자유로히 구사해 오던 것임을 강조했다.
그 전통이 조선후기 사대부적 화격을 높히 평가한 중국이론을 받아들인 다음 부터는 천한기술로 가혹한 대접을 받아 그 풍요한 색의 구사에 있어서 자유로움이 단절됐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예술로서의 그림이란 어느 한때의 신분에 중점을 두어 구분하는 봉건적 사고의 좁은 영역에만 한정될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화의 발전은 색채구사의 전통을 재 평가해서 색채가 갖는 힘을 한국화 속에 마땅히 포함시켜 야만 넓어진 지평을 바라볼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문인들의 수묵화는 사대부적 기상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진정한 인격체 도야가 목적으로 화가 자신의 개성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문제는 화단의 현실이 수묵화를 숭앙하는 시대의 실세를 쫒다보니 그림의 형식만을 취해 고루함을 답습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지금 세계의 미술은 조형의 개념까지도 뒤바뀌는 시대인데 한국화에서 색의 사용을 아직도 소외시키려는 봉건성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동양화를 외면케해 한국화 침체의 요인이 된다고 그는 지적한다.
고대 한국인들은 고대 일본에 한국적 표현양식의 그림을 전수시켰고 그것이 현재 일본 채색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제 식민시대를 살았다 해서 한국 채색화가 무조건 왜색이란 비난을 하는것도 이젠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 근대 동양화를 보는 그의 시각이다.

이숙자(李淑子);
1942년 서울생.
홍익대 동양화과졸.
보리밭,소.등 채색한국화 대표작 다수.
국전대상(1980)수상.
서울 교육대 교수.


한국화의 감상

두루미(학)의 기상
한국화는 산수화,화조화,인물화 등 다양한 분류를 하는데 그림의 내용을 보면 자연과 맞지않는 구성을 하고 있는것을 종종 볼것이다.
그림은 화가의 마음을 담아 그리는 것이 자연 그대로 그리는 것 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즉,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고 그린다는 심화(心畵)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화조의 모란꽃은 부귀를 뜻하고 바위를 곁들여 그리면 장수까지 포함된다,
두루미,학(鶴)은 일품을 뜻하고 파도는 조(潮)라는 글자를 적용하여 조(朝)의 음과 같다하여 조정의 벼슬에 나가면 일품까지 오르라는 뜻이 담긴것이다.

또한 학은 학문하는 선비들의 상징으로 장수와 인격을 표현한다.그래서 인지 선비들이 입는 두루마기 형식의 옷도 학창의(鶴彰衣)라고 한다.
그리고 문관의 벼슬아치 들의 흉배에 학이 수놓아 져 있음도 학문의 뜻이다.
학을 그리는 몇가지 형식이 있는데 바닷가에 외롭게 서 있는것은 이미 말했듯이 입신을 기원하는 것이고 학만을 그려 놓은 것은 천수도(千壽圖)라 하고 소나무와 같이 그리면 백령도(百齡圖)가 된다.
소나무에 학이 있는 경우에 화제(畵題)도 대개의 경우 학수송령(鶴壽松齡)이라 적는 이유가 장수하라는 뜻이 있기에 그렇다.
십장생도에 학이 들어가는 것도 장수의 새라는 증거다.
연하장에 소나무와 학을 그려놓으면 새해에는 건강하고 무병하라는 뜻이다,소나무는 그림에서는 새해를 뜻함으로 나무만 그린 병풍에서도 멘 첫 장에 소나무가 나오는 것 또한 새해,정월을 의미하여 첫번쩨로 등장한다.
백학도(百鶴圖)와 같이 산수화에 학을 넣어 그리거나 그냥 학만 그려도 의미는 같아서 장수의 복을 기원함이다.
흔히 백로를 학으로 착오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무위에 서식하는 것은 백로요,학은 소나무나 여타 나무에는 살지않고 늪지대나 바닷가 갈대밭에 서식한다.
그럼에도 소나무와 합께 그리는 것은 어디가지나 심화(心畵)일뿐 자연풍경은 아니라는점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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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는
우리 민화는 전래의 풍습을 지역 민가에서 재주있는 사람들의 솜씨로 전해진다.
지금에도 그 때의 그림을 전문화가가 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민화다.
민화는 보편적인 풍습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지방이나 가문,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부적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고 장식이나 감상용으로는 미흡한 점도 있다.
그림을 감상할때는 화제를 가장 중시하는데 화제(畵題)에 그 그림의 전부를 요약해서 작가가 뜻을 남기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림에 나타나는 뜻을 동음이어(同音異語)로 해석하여 좋은 쪽으로 설정하여 보면 의미를 알수가 있다.
호랑이는 삼재(三災)를 쫓아내는 목적으로 많이 그렸고 모란은 부귀를,소나무와 대나무는 정절을 표현하기위하여 열녀와 선비의 방에 많이 걸었다.
그런데 호랑이와 까치는 적절한 조화라고 볼수없다.
그런데 왜? 화랑이와 까치가 동시에 등장하는지는 그 유래가 불명확하나 보편적인 해석으로는 삼재를 구축하고 새로운 희 소식을 전해오기 바라는 뜻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원래는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을 그렸고 소나무에 까치가 앉아있는 것을 같이 그렸는데 호랑이로 변질 되었는 이론도 있다.
표범과 소나무 까치를 해석하자면,
소나무(松)는 신년(新年) 표범은 보(報) 까치는 희(喜)를 상징하는데 신년희보(新年喜報);새해를 맞아 기쁜 소식을 기대한다는 뜻으로 읽을수 있다.
나무도 계절과 시기가 있는데 소나무는 정월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해도(魚蟹圖)는 무슨 의미로 그리는가

게(蟹) 그림은 장원 급제의 소원
게는 우리 농촌의 논두렁 밑에서 흔히 보았던 참게를 말한다,
물론 게를 모두 그렇다는것은 아니고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보편적인 게 그림은 참게를 많이 다루었고 그 의미는 장원 급제를 축원 하기 위함 이였다.
두마리의 게는 한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다,두번의 장원을 바란다는 뜻이라는데 요즘에 와서는 양과,즉 행정 사법고시에 모두 합격하라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외무고시 까지 바란다면 세 마리를 그리면 좋겠지,그러나 꼭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갈대를 같이 그린다든가,꽃을 그려서 보충하는 것은 그림의 조화를 구성하는데도 좋고 미적 감각을 높히는 의미도 있다.
꼭 주술적인 의미로만 그린다면 그림의 본래 예술성이나 미의 개념이 손실되기 때문이다.
국화 꽃을 함께 하였다면 지조와 급제를 뜻 함이니 굳은 심기를 굽히지 말고 불의에 타협하지 말고 오직 한길로 나가 뜻을 성취 하라는 것이다.(밑의 그림 참조)
다음에 언급을 하겠지만 잉어는,특히 뛰어오르는 잉어는 등용을 뜻하는것으로 출세를 하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좋겠다.


죽(竹)과 난(蘭)은 자손번성
사군자 중의 대나무는 여성에게는 절개와 선비의 지조를 뜻한다는것은 일반화 된것이고,죽순의 자손 번성과 효(孝)의 의미가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효의 개념은 죽순이 성장 한다는 것은 자손이 번성 한다는 것이니 부모에게 손을 안겨 준다는 것이야 말로 효 중의 효라고 옛 선조들은 생각 히였다.
난(蘭) 또한 많은 잎이 생기고 오래가는 식물이다.
잎이 여러개 뻗어나는데 그중의 한 두잎을 길게 그리므로써 많은 형제들 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입신양명을 기원하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바라는 것이다.
선비를 격려 하는데는 가는 청죽을 주로 그리는데 비록 가늘고 허약하고 속은 비었다 하나 그 지조는 굳게 지킨다는 것이다
휘어질 망정 부러지지않는 선비의 지조를 의미하고 여성의 절개를 상징한다.
또한 대나무는 사철 푸르게 그 색을 지니고 있으니 절대로 변절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왕죽(王竹)은 신으로 섬기는 풍습도 있었다.
그래서 굵고 큰 대나무는 귀신을 부르는 의미로 주로 무속인들의 집에 잎을 그대로 둔체 세워 둠으로써 신의 왕래를 편하게 하였다.
그래서 왕죽은 신으로 하여금 어떤 음덕을 바라는 소원에서 응용하였다.
돌(石)과 함께 그리면 장수(長壽)의 뜻이 더 있으니 어른들께 장수를 자손들의 번창과 입신 출세를 기원 가화태평을 바라는 그림이된다.



갈대밭의 기러기.

노후(老後)의 평안,노안도(蘆雁圖)
기러기와 갈대를 그리는 서정적인 가을풍경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꺾어지기도 하고 쓸어지고 시들어 가는 갈대밭에 기러기가 오붓하게 앉아있고 그 기러기를 향하여 날아드는 그림이야 말로 늦가을 강변이나 해변의 정서를 잘 표현하여 주며 우리의 심성을 안정시켜 주기도 한다.
누가 봐도 편안한 감을 주는 그림이다.
그래서 그 노안은 발음이 노안(老安)과 같다하여 노후(老後)에 평안(平安)을 의미한다.
만약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가는 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차후의 양식을 대비하는 것으로 처세의 신중성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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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그림은 축하의 뜻
영모화(羚毛畵) 중에서 고양이 그림은 노인의 장수와 특히 고희(古稀)인 70세의 노인의 생신 축하 그림으로 많이 그렸다.
다른 새와 더불어 그리면 환희를 의미하는것이 많아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면서 노후를 안락하게 지내라는 의미가 많다.
주로 참새나 까치가 모두 등장 하는데 같이 있는 경우나 따로따로 있는 경우 다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고양이를 나비와 같이 그리면 더 오래 살아서 80세를 넘기라는 뜻이된다.
그리고 국화옆에 있는 고양이는 역시 장수와 평안을 의미한다.
국화는 은자의 꽃으로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찬바람 속에 늦도록 홀로피는 꽃이니 언제까지라도 삭풍에 구애 없이 건강하게 잘 살아가시라는 의미로 고양이와 국화를 그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책걸이는 관직을 소망(所望)
민화중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책걸이다.
서가에 책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저장해 놓은 그림이다.
현대 서적은 서가에 세워서 꽂아두는 것이 보통인 반면에 옛 서적은 한지에 붓글씨로 되어있는 것이 어서 세워두는 것은 적절치 못하여 그대로 쌓아두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서가에 가지런 하게 쌓아둔 서적은 안정 감과 지식의 넉넉함을 느끼게 한다.
이 렇듯 서적이 정돈되어있는 서가즉,책걸이를 그림으로 그려 주로 사랑방에 병풍으로 만들어 비치하는 데 이는 판서에 이르는 벼슬에 오르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그리고 새 중에 부엉이는 노인의 장수를 의미하고 오리는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뜻이잇다.
도자기에 그리는 그림이나 병풍화나 액자 할것 없이 그 의미는 한결같다.
어해도 에서 쏘가리 그림도 장원급제를 염원하는 그림이나 만약 쏘가리를 두마리 그렸다면,즉 한자리에 두마리의 쏘가리가 있는 그림은 왕정의 제국에서 역모에 해당하는 그림이란다.
우리의 그림,특히 민화에서는 독음을 중시하여 의사를 표현하엿다,
전주에서 명산물로 생산되는 합죽선에 등장하는 박쥐 그림은 복을 의미한다,
박쥐의 복(박쥐복)자가 복(福)자와 음이 같다하여 복을 주는 그림으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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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 절지도(화)는 그릇이 주변에 있고 꽃이나 과일나무 가지를 뚝 꺾어다 소품으로 이용한 그림이다.
이 그림들을 살펴보면 똑같은 계절에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생성의 계절이 다른것 끼리도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소품을 대강 소개하여 보면,
구리 그릇은 평안(平安),도자기는 굳은 의지와 청렴,풀줄기의 바구니는 안락과 자연의 친함,무나 배추 고추등은 무병장수,다남(多男)을 기원,백합꽃(뿌리)는 백(百),모란은 부귀,불로초는 여의(如意),콩(땅콩등)은 장수,귤은 대길(大吉),수석응 수(壽),국화꽃은 유유자적(悠悠自適),밤이나 대추는 자손을 원하는뜻,
서책과 문방사우는 학문과 입신양명(立身揚名),
복숭아는 천도(天挑)라 하여 동방삭의 장수를 의미한다.여러개의 복숭아가 달린 가지를 그려 놓으면 다수(多壽)를 뜻한다.
이래서 모든 기명절지도는 장수와 부귀를 뜻하고 자손의 번영과 영광을 기원하는 뜻이 많이 담겨있다.
어느것과 함께 그리든지 상관없이 그 속에는 부귀 영화와 입신양명,그리고 자손 번창과 자자손손 영광을 축원하는 뜻이 가득하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이렇듯 우리 한국화는 단순한 그림으로써의 역할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로서 더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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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양명의 출세,잉어도
폭포 아래서 용트림을 하며 힘차게 솟구치는 잉어의 그림을 자주대하게 된다.
이런 그림은 용기를 잃지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라는 뜻이며,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잉어는 꼭 한마리만을 그리라는 것도 없고 두마리든 세 마리든 화가의 의도데로 그려서 그 뜻을 전하게 된다.
한마리는 홀로서서 독립을 의미하며 굳게 전진하고 성공을 이루라는 뜻이며,두마리는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를 다 통과 하라는 뜻이다.
또 세마리를 그리는 뜻은 소시적 생활을 극복하고 더 큰 사람이되어 성공에 이르라는 성장을 의미한다.
피라미나 부평초를 겻들여 구성하는데도 그 의미는 있다.
잡다한 난관을 극복하고 학업 과정을 주변에 나열하여 그 의미를 부여했다.
타향살이의 설움과 대소의 난관을 이기고 학업을 훌륭하게 마치고 대과에 이르라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대과에는 문무(文武)의 양과가 있는데 문과는 지방에서보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회시(會試)가 있고 대궐에서 보는 전시(殿試)가 있다.
그래서 잉어의 그림은 종합적으로 가난과,객지의 고생을 극복하고 학문에 힘써 소과와 대과를 두루 합격하여 등용되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라 보면 된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완당이라고 하고 추사라고도 하는 김정희 선생은 항상 이렇게 주장하였다.
서책에는 기가 있어야 하고 문자는 언제나 향기가 흘러야 한다 라고.
같은 시대에 살든 오원 장승업은 불우한 청소년기를 겪으며 글을 배우지 못한 탓에 문자니 서책을 알지 못하여 항상 추사의 이 말에 화를 내곤 하였다.
무슨 얼어죽을 기 가 있고 향기가 있냐.
나도 단원의 실력이 있다 하여 오원(吾園 張承業)은 그림만 그렸다.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오원이 그분이다.


불우한 인생 입지전적 화가,장승업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 1843∼1897), 조선 화단의 거장으로 우리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생기 넘친 작품들을 남김

장승업은 1843년 중인가문으로 생각되는 대원(大元) 장(張)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이응헌(李應憲)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응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의 사위이며, 중국 청나라를 왕래하던 역관
(譯官)으로서 그림을 좋아하여 많은 그림을 수집하였다. 장승업은 그림이 가득 찬 이응헌의 집에서 어깨 너머로 화가나 수장가들의 그림감상을 눈여겨보다 어느날 우연히 붓으로 흉내를 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저절로 그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승업의 그림에 대한 재능은 주인 이응헌의 눈에 띄었고, 그로부터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에 전념한 장승업은 놀라운 기량과 넘치는 신운(神韻), 그리고 왕성한 창작력 때문에 금새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장승업은 마치 전생(前生)에 화가였던 듯 샘솟듯 넘쳐나는 영감(靈感)을 기운 넘치는 필력(筆力)으로 쏟아내었으며 당시
화단(畵壇)의 총아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알려져 고종(高宗)의 어명(御命)에 의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일체의 세속적인 관습에 구애받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술과 예술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뿐이었다. 그는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뜬구름 같은 일생을 보내다 1897년 광무(光武) 원년
(元年)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장승업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모른다. 그의 뜬구름 같은 생애와 수수께끼 같은 죽음은 일체의 세속적인 것을 거부했던 진정한 예술가의 삶의 한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장승업의 업적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우선 그는 전통 화법을 총 결산하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大畵家)로서 그는 전통화법을 단순히 종합했던 것이 아니라 그 단점(短點)을 극복하였다. 당시 조선시대 말기(末期)의 화단은 형식화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 지상주의로 말미암아 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장승업은 잊혀졌던 북종화법(北宗畵法)을 골고루 탐색하였고, 화보가 아닌 실제 동식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또 당시 새로 수입된 최신 유행의 중국화법도 참작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었다.

둘째, 장승업은 산수화(山水畵), 인물화(人物畵),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 여러 가지 그릇붙이와 화초의 가지를 섞어서 그린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당대(當代)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으며,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
산수화에서는 수많은 전통적 양식을 절충하여 동양적 이상향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였고, 인물화에서는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그려내었다. 또 화조영모화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기운 생동하는 필묵법으로 소화해 내었으며, 기명절지도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출해 내기도 했다. 그의 신운이 넘치는 작품 세계는 암울했던 19세기 후반에 있어서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예술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화가 장승업의 업적 중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순수한 예술정신의 구현에 있다. 장승업은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예술안(藝術眼) 앞에는 왕이나 부자가 따로 없었다. 그의 생애는 미(美)를 위한 구도자의 길이었으며, 세속적인 면에서는 실패했으나 진정한 예술의 면에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넷째, 장승업은 현대에 있어서도 진정한 예술가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예술은 물질적 부(富)와 세속적 권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점, 또 일상적인 행복과 나태에 빠져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또한 장승업의 생애와 예술은 서구적 가치관이 판을 치고 서양 미술사조가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현대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투철한 예술혼이 없는 외형적 양식 추구가 과연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인생 자체와 융합되지 않은 예술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해답을 바로 장승업 자신의 생애와 작품으로써 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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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 장승업의 쌍마도를 한점 올려 그의 업적을 기리고져 합니다.


근대 화단의 큰 스승,안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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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安中植/1861-1919)
안중식은 어렸을 때 이름이 종식(鍾植)이고 별명이 욱상(昱相)이었으며, 심전(心田)이라는 호 이외에도 심전경부(心田耕夫), 경묵도인(耕墨道人), 말년에는 불불옹(不不翁) 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개화파인 김윤식(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제도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텐진(天津)에 다녀 왔다. 이때 서구의 과학적인 소묘법을 익혔고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피난한 적도 있고, 그 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의 서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내외를 다니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근대적 입장을 지녔다.

그는 장승업에 이어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잘 그렸다. 그래서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 제작에 발탁되기도 하는 등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다. 따라서 그의 회화 가운데는 중국의 고사나 화보를 탈피하지 못한 그림이 많았지만, 조석진과 더불어 근대 화단을 연 화가로 주목된다.

대표작으로는 〈도원문진도>와 〈백악춘효도〉 외에 많은 수가 전한다.

*현대 6대가로 꼽히는 이당,청전등의 스승이며 한국화 중흥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소림 조석진등과 함께 많은 활동을 하였다.


마음의 눈을 뜨려고 실명한,최북
본관 무주(茂朱). 자 성기(聖器)·유용(有用). 호 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초명 식(植). 김홍도·이인문·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고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렸다.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하였다. 주유 중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작품에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등이 있다.

*화가 최북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스승의 말에 스스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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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과 춘화도의 명인,신윤복
본관 고령(高靈).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산수(山水)와 영모(翎毛) 등에도 뛰어났다.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부친 신한평(申漢枰)과 조부는 화원이었으나 그가 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진 작품에 남긴 간기(干紀)로 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처네를 쓴 여인》에 있는 1829년이 가장 하한인 바 대체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직업화가로, 당시 수요에 따른 많은 풍속화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 전한다.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 또한 명품(名品)이다. 아울러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美人圖)》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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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풍속화의 거성,김홍도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47)에 왕세손(뒤의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1788년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를 그렸고, 1795년(정조19)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 ·인물화 ·신선화(神仙畵) ·불화(佛畵) ·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산수화는 사실(寫實)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申潤福) ·이인문(李寅文) ·김석신(金碩臣) ·김득신(金得臣)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활정서와 농(農) ·상(商) ·공(工) 등의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모습을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과감히 시도하였는데,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탱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색채의 농담(濃淡)과 명암으로써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나타낸, 이른바 훈염기법(暈染技法)이 그것이다. 작품에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신선도병풍(神仙圖屛風)》《쌍치도(雙雉圖)》《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낭구도(浪鷗圖)》《군선도병(群仙圖屛)》《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풍속화첩(風俗畵帖:야공도 ·서당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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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 산수화의 원조,정선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우리나라의 산천을 독자적 화법으로 그려내어 진경산수화풍을 확립시킨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발달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화가이다. 겸재는 전통적인 절파계의 북종화법과 새로이 유입된 남종화법을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창안해 내는데, 이러한 화법을 토대로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지인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빼어난 경치를 사생(寫生)하여 화폭에 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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