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7.28~1968.10.2)
프랑스 화가. 1887년 외르 지방의 블랭빌-크레봉에서 태어나,1955년에 미국으로 귀화,1968년 뇌이이-쉬르-센느에서 사망했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미술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에 혁신을 가져온 뒤샹은 20세기 미술에 있어 피카고 만큼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뒤샹의 형들인 쟈크 비용, 레이몽 뒤샹-비용, 여동생 쉬잔느 비용이 모두 예술가가 되었다. 190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였다.1904년에서 10년경까지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제작하였다. 1911년에 큐비즘의 1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입체주의 그룹에 참여하여 차츰 큐비즘을 배우게 되나 연속사진 등에서 자극을 받아 본질적으로는 정적(靜的)인 큐비즘의 표현과는 다른 운동과정의 표현에 관심을 돌렸다.
동시에 기계의 이미지에 매달려 인체를 기계적인 성(性)의 오브제운동으로 다루게 되었다. 이리하여 12년에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비롯하여 《급속히 나체들에게 에워싸인 왕과 왕녀》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移行)》 《신부》 등을 연달아 그렸다.
1911년 퀴비슴(입체주의) 운동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가 뉴욕의 '아모리 쇼'에 출품되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이른 바 '반예술적'작품을 발표하여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년부터 다다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쉬르리얼리즘에 협력, 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쉬르리얼리즘전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해, 망막적(網膜的) 예술(캔버스상에 관념을 구축하지 않고 눈만을 위해 제작된 예술)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림 그리는 행위를 거의 포기하게 된다. 뒤샹은 15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주로 뉴욕에 살게 되었고 55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나 15∼23년 유리판 대작인 《독신자들에 의해서 나체가 된 신부》라는 작품에 착수, 사랑과 욕망의 형이상학을 기계적 이미지로써 표현했다.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탁자와 자전거 바퀴를 선택해서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예술가가 선언할 때 그것을 예술이라 인정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미술에서의 `재현' 행위를 전면 부정하고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반전통적인 사상은 미술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와 개념으로 점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만 해도 뒤샹에게 레디메이드란 개념은 아직 생소하게 느껴졌었다. 1915년 뉴욕에 정착해서야 뒤샹은 레디메이드에 대한 이론을 치밀하게 구상할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바퀴의 움직임을 즐거이 수락했던 것 같다.
감상할 오브제 주변을 도는 사람들의 습관적인 움직임에 대한 해독제로서 말이다." 뒤샹은 후일 이 작품의 제작 의도를 위와 같이 밝혔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상의 오브제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특별히 주목받는 예술작품으로 변화하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 행위, 즉 아이디어이다.
손으로 만드는 수공적 기술이 아닌 선택하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의 가장 본질이라는 뒤샹의 이론은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기초를 이루었다. 1917년 4월10일, 뉴욕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선 미술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반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앙데팡당전.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젊고 패기만만한 작가들의 전시회이긴 했다. 그러나 전시장에 남성용 변기 하나가 덩그러니 등장한 것이다. 고상한 전시장에 변기라니. 주최측은 경악했다. 출품자는 이 전시회의 운영위원이기도한 마르셀 뒤샹. 그는 어느 공중변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를 떼어다 '샘물(Fountain)'이란 제목을 붙이고 'R MUTT'란 이름으로 사인까지하고, 당당하게 작품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R MUTT'란 것도 실은 뉴욕 변기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다른 운영위원들은 난감했다. 이 작품을 걸 것인가, 바닥에 놓을 것인 가. 아니, 이런 작품을 전시해도 될 것인가. 변기는 결국 전시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에 폐기되는 운명에 처했다. 전시가 끝나자 뒤샹은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만든 잡지 '눈 먼 사람' (The Blind Man'을 통해 기다렸다는 듯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미국인 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6달러라는 참가비를 낸 모든 화가는 작품을 전시할 권리를 갖는다. 리 처드 머트씨의 작품 '샘물'을 거부한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
혹자는 그것이 부도덕하고 상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머트씨의 샘물은 부도덕하지 않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사용하여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 아래, 그것이 갖고 있던 실용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소재의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냈다.".
다른 것들을 사용하는 동안 그것은 오리지낼리티와 사람들이 예술적 소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인적 법칙에 대해 도전을 가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형태적 의미에서 <샘>은 하나의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일 뿐이다.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클라인병과 같이 수학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모더니티와 기계적인 완결성에 대한 원형적 표지이다. 뒤샹은 아마도 자신이 속해있는 미국아방가르드 협회 회원들에게 충격을 주기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소변기를 선택한 일을 통해 뒤샹은 예술문제에 대해 가지는 논쟁적인 지위에 확실히 연루되게 되었다. 기하학적으로는 아름답지만 미학적 차원에서는 선호할 수 없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 이 <샘>은 어쨌든 그가 발언한 원리들과 관련해 그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한 초기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샘>이 일상적 기능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 기하학적 특질은 매우 명백한 것이 된다. <샘>의 기하학적 중심 요소는 배수관으로부터 그것을 샘으로 변화시키는 회전인 그것의 전환이다. 그러한 4차원적 회전을 거치면 전술한바처럼 좌우와 내외가 바뀌게 된다. <샘>과 같은 오브제를 4차원적으로 회전시키면, 메타포적 차원에서 요철(凹凸)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오목한 형태란 일반적으로 여성스러움을 암시하는 데 3차원적 존재인 <샘>을 4차원적으로 회전시키면 여성적인 오목한 형태는 남성적인 볼록한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 좀더 메타포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샘>이 차지하는 지위는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사용하는 일반적 전략 속에 내포된 미학적 전환의 참고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브제 선택은 회전과 반발로부터 비롯되어 전환되고 변화된 예술세계를 창출한다.
소변기란 평범한 사물이다. 따라서 이것의 의미는 미학적 비 차별성의 시스템을 포함한 뒤샹의 선택방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레디메이드는 그가 그것을 좋아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선택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변기의 선택은 그가 발견된 오브제들에 대한 선택의 범주에 반하는 최초의 레디메이드중 하나이다. 자기모순에 의해 난처하게 되었던 것과는 별도로 뒤샹은 처음으로 미학적 선택을 만드는 일에 포함된 독단들에 관한 그의 의견을 한층 더 구체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난해함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원리를 자신과 그의 시스템에 관해 되돌렸다.
그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부정을 유지하는 법칙이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선택과정과 그들에 대한 파괴는 대립되는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 되었다. 뒤샹의 어법에서처럼 변기는 예술적 오브제인 동시에 비 예술적 오브제이며 추함과 동시에 아름답다.
이 오브제의 불가피한 거만함은 그가 직접적으로 착안한 문제였다.
그는 “미학적 기쁨”을 “기하학적 기쁨”으로 대치하였고, 여타의 것들에 대해 어떤 주어진 기하학을 선택하는 관습적인 성질에 대해 분명히 주목하게 하기 위해 소변기를 사용함으로서 미학적 선택을 창조하는 예언적 성격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강화하였다. 달리 말하면 관람자들은 유클리드적 이면서 동시에 비 유클리드적인 존재로서의 <샘>을 볼 수 있다. 마치 그들이 예술이면서 동시에 비 예술적 존재로서 그것을 보듯이 말이다.
앙드레 브르통은 레디 메이드를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작품의 지위에까지 높여진 기성품"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과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게 되고 드디어는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함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브라크나 피카소, 또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바닷가의 돌조각이나 짐승의 뼈등을 주워 오브제로 한 방법과 상통하는 것으로 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미는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미술의 새로운 주장이요 특색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다음 비서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기자들이 상대성 원리에 대해 설명을 해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실꺼죠?"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여인과 단둘이 있을 때는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며,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있는 1분은 1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해체한 것이다. 이 이론은 과학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예술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그의 경고였다. 그는 예술에 영원한 가치라도 있다는 듯이 숭배하는 것을 우스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소위 ‘예술가’라는 그가 예술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예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
예술작품의 가치란 길어야 수십년이고 시대가 변하면 작품의 의미나 가치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요즈음 누보 레알리즘, 팝 아트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네오다다는 안일한 자기만족이며 일찍이 다다가 이룩한 것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내가 레디메이드를 발견했을 때 나는 쓸모 없는 미학자들을 낙담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네오다다는 거기서 미적 가치를 찾으려 하고 있다. 나는 미학자들의 얼굴에 하나의 도전으로 변기를 던졌는데 지금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결국 뒤샹의 변기와 음란한 미소의 모나리자는 작품이 아니라 작품이기를 거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실제로 뒤샹은 1918년 그림을 포기했으며, 체스와 풀렛 도박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뒤샹으로 인해 미술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즉 붓과 캔버스, 물감 대신 일상의 물건이 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고 그 물건들이 원래의 기능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며, 작가는 그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연한 선택에 의해서도 예술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샹의 변기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예술가의 정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뒤샹은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뒤샹의 미학은 물건이 넘쳐나는 대량생산 시대의 미학 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샹으로 인해 20세기의 미술 관람객들은 눈앞의 작품 뿐 아니라 뒤에 숨은 작가의 정신까지 이해해야 하는 난 감 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자의 도덕경 1장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되어있다. 뒤샹은 바로 사물에게서 이름을 제거함으로써 사물에게 새로우면서 그 자체가 이미 지니고 있었던 의미들을 새롭게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1919년에 그의 마지막 회화작품 [너는 나를...]을 완성한 후 회화와 결별했다. 그 후 그는 프로 체스선수가 되어 프랑스와 미국에서 수많은 대회에 출전했는데, 그런 생활방식 자체가 표현행위에 대한 조소(嘲笑)로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초에 움직임을 중시하는 광학적 작품을 발표하고 점차 모든 예술 활동과 손을 떼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에 많이 협력하여 193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초현실주의 전시회의 주요 기획자로 1200개의 석탄자루를 매달게 하기도 하고, 1942년에는 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First Papers of Surrealism]전을 기획하며,[VVV]지를 창간하기도 한다. 그의 최후 작품 [하기 때문에...}는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다.
그 후 뒤샹은 뉴욕에서 살다가 68년 10월 뇌이에서 죽었다. 그러나 사후에 작품 《물의 낙하(落下)》 《조명용 가스가 주어졌다고 하자》 등이 유언에 따라 공개되자 제작을 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전설 자체가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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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바퀴(Bicycle Wheel), 1913,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탁자와 자전거 바퀴를 선택해서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예술가가 선언할 때 그것을 예술이라 인정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미술에서의 `재현' 행위를 전면 부정하고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반전통적인 사상은 미술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와 개념으로 점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만 해도 뒤샹에게 레디메이드란 개념은 아직 생소하게 느껴졌었다. 1915년 뉴욕에 정착해서야 뒤샹은 레디메이드 에 대한 이론을 치밀하게 구상할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바퀴의 움직임을 즐거이 수락했던 것 같다. 감상할 오 브제 주변을 도는 사람들의 습관적인 움직임에 대한 해독제로서 말이 다." 뒤샹은 후일 이 작품의 제작 의도를 위와 같이 밝혔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상의 오브제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특별 히 주목받는 예술작품으로 변화하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 행위, 즉 아이디어 이다. 손으로 만드는 수공적 기술이 아닌 선택하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의 가장 본질이라는 뒤샹의 이론은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기초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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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1917, 기성품, 작품이 분실되어 크기와 소장은 불분명 1917년에 뉴욕에 있던 제1회 앙데팡당전시회에 소변기를 "샘"이라고 제목하고 R. 뮈트(R. Mutt 위생기구상의 이름)라고 서명하여 출품하려고 했으나 거절되었다. 뒤샹은 그 전시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용품을 새로운 제 목과 관점에 놓아서 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실용성을 잃어버리게 하여 그 물체를 위하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려고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것 이 레디·메이드(기성품)의 대상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제시한 눈으로 보이는 물체와 그것을 뜻하는 봉지 않는 세계와의 일체로 비로서 작품을 성립시키려는 방법으로, 이 경향이 그 후 현대미술의 특징 으로 되었다. 지난날 우리의 여학생이 일본에 유학을 갈 때 요강을 가지 고 가니 일본여인이 그 용도를 묻기에 꿀단지라고 대답하여 대단히 좋게 여겨 자기에게 팔라고 하였다고 한 일화가 있다. 그것은 악의도 아니고 오직 그 일용품의 실용성 의 변화를 말한 것인데 이러한 것을 보면 한 물건이 여러 가지로 보일 수 있으며, 실용될 수도 있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보는 물체와 그것을 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체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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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소음과 함께(avec un secet), 1916,
옥타비오 패스는 뒤샹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뒤샹은 시각적 세계까지 포함한 모든 예술이 불가시의 영역에서 생겨나 소멸해 가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뒤샹이 유화 작품 제작을 포기한 것도 어쩌면 유화 자체를 망막만으로 끝나는 시각의 유희란 점에 봉착한 때인지 모른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에 의한 일련의 오브제 작품들은 '보이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에로 이입해 가는 과정의 작품들로 파악할 수가 있다. 즉, 1912년을 경계로 뒤샹은 중세 종교화에서도 보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술의 세계에서 부활시킨 것이다. 노끈으로 만든 구형을 나사로 조여진 두 장의 동판 사이에 넣었다. 가운데 구형 속에는 무언가 작은 물체가 들어가 나사를 조이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뒤샹은 수집가인 앙레스 배여도 뒤샹도 다같이 세상을 떠난 오늘, 노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두 장의 동판 위에는 영어와 불어가 나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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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1912년 . 캔버스 . 유채 . 89x146cm .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
Étant donnés 1946-1966,Filadelfia, Philadelphia Museum of 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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