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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미술사관 연구

영원한 울트라 2005. 10. 4. 01:11
곰브리치 미술사관 연구*

- 재현과 양식 개념을 중심으로-

 

 

2)박 세 은**

 

머리말

 

본 논문은  현대지각심리학의 성과를 원용한 독특한 방법론으로써 미술의 문제를 다루었던 곰브리치의 미술사관에 대한 고찰을 그 목적으로 한다. 고대 이후 추상미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미술은 주로 재현 개념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과거에는 미술을 주로 재현기술의 진보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이루어진 미술의 혁신으로 이러한 진화론적 사고방식은 소멸된다. 추상미술과 형식주의미학의 등장은 이전에는 조악한 초기 단계의 미술로 치부했던 원시미술, 부족미술 등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혁신으로 인하여  미술에서 재현이나 환영과 같은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포기되었다. 더이상 미술사가도 미술비평가도 그런 해묵은 문제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무시되고 망각 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곰브리치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환영주의자(illusionist)"이기도 했던 지난날의 大家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할 경우 예술에 관한 연구와 환영에 관한 연구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연의 재현이 오늘날에 와서 진부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이유를 규명하는 작업이 미술사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곰브리치의 재현론은 전통적 재현론의 편견을 극복하는 한편, 추상미술의 등장 이후 부적절한 문제로 간주되었던 재현의 의미를 인식시키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 흘러 재현기법이 남용되고 통속화된 시대에서 사람들은 재현 능력에 대한 경이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현과 환영은 여전히 신비스럽고 복잡한 성격을 갖는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예술 언어의 어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곰브리치는 재현이란 외적 형태의 모방이 아니라 이미지의 창출(image-making)이라고 주장하고, 포퍼에게서 영향받은 지각의 시행착오 이론에 입각하여 재현과정을 분석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곰브리치의 중심사상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먼저 재현의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곰브리치 미술사관 연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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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미술사의 이해에서 자주 제기되는 양식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곰브리치에 따르면, 양식은 기술적인 측면과 관련되어 이해되고 있지만, 또한 시각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보는것은 아는것과 구별되지 않으므로 이를 구분하는 설명법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 주장된다.  양식의 변화란 각 시대의 이미지가 갖는 기능의 변화나 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새로운 양식이 탄생되는, 문제 해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곰브리치는 양식의 문제를 지각의 심리학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상과 같은 곰브리치의 입장을 미술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 의의를 알아볼 것이다. 여기서 미술사 서술에서  재현에 있어서 양식의 변화를 예술에서의 어떤 초개인적인 정신, 시대정신, 민족정신을 가정하는 설명을 거부하고, 양식의 변화를 문제들과 그 해결의 연속으로 설명하는 곰브리치의 미술사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곰브리치의 재현론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전통적 재현론에서는 시각적 실재의 모든 요소들이 재현의 요소들로 복사될 수 있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곰브리치는 미술에서의 완벽한 모방이라는 목표에 제약을 가하는 두가지 한계를 지적하면서 전통적 재현론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 두가지 한계는  실재와 비교하면 제약을 갖고 있는 매체의 성격과, 재현 방식을 지배하는 창조자의 심적 태도(mental set)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모사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매체를 이용해서 자신이 본 것을 번역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화가가 자신의 눈으로 본것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화가가 가시세계에서 그의 흥미를 끄는 측면, 즉 빛이라는 측면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다면 대상의 색채를 모방하는 일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의 빛을 물감으로 전환하려할 경우, 실재를 재현하는 것은 매체의 한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화가는 빛이 난무하는 가시 세계 자체를 모사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재현이란 외적 형태의 모방이 아니라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하는 곰브리치의 주장을 볼 수 있다. 화가는 모호한 가시 세계 자체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여러 가능한 해석들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  화가는 자신의 시각적 경험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되며, 그림 속의 요소들간의 작용방식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한편, 화가들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자연을 충실히 재현하려 해도 그들이 그린 것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모티브가 예술가에 따라 특이하게 변형되는 것은 예술가의 기질, 개성, 기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식'이 그  결정적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양식'은 매체와 마찬가지로 화가로 하여금 주위 장면에서 자신이 묘사할 수 있는 특정 국면을 찾아내게 하는 심적 자세를 창조한다. 많은 경우 화가들은 그의 시대와 자신의 관심사로부터 부과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화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시각적 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나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상에서 지적된 유사성의 한계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곰브리치의 재현론으로 이끌고 있다. 매체의 성격과 심적 태도에 의해 제약을 받는 화가는 자신이 '본 것'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재현의 출발점은 자연이 아니라 화가들이 다른 그림에 대해 갖는 기억이나 관습에 의해 형성된 도식(schemata)이라고 한다. 어떤 형상을 재현하려는 화가는 시각적 경험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되며 그 형상을 분류하기 위해  예술언어(도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식은 실험을 통한 창안에 의하기도 하며 배워서 익히기도 한다.  어떠한 재현도 출발점으로서의 도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때 도식은 "추상"과 "단순화"의 산물이 아니라, 점차 특정의 형상과 근사해지도록 수정을 가할 여지가 있는 초기 단계의 범주이다. 따라서 재현과정은 도식적 형태를 바탕으로 시각적 경험을 분류하고 포착한 후 점차적인 수정을 거쳐 재현대상에 조응(matching)시킴으로써 등가물을 산출하는 도식, 수정의 리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재현의 과정은 포퍼의 능동적 인식론에 근거한 '지각의 시행착오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전통적 재현론에서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만, 곰브리치에 의하면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지각행위는, 모호한 가시세계의 여러가지 가능한 해석들  중에서 하나를 '아는 것'에 의한 추측과 기대를 바탕으로 선택하는 시행 착오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등가물이 예술적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술가의 재현방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감상자의 협력관계 내지는 감상자의 수용 행위에 의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심적 자세를 바탕으로 시행 착오 과정을 거쳐 이해, 평가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감상자는 그런 시도를 자신의 심적 자세를 바탕으로 한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평가하며 경험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양식의 문제

       

고대에서 모방을 목표로 하는 미술의 발전은 마치 오늘날에 있어서  기술의 진보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양식의 문제는 재현기술의 문제와 관련되어 생각되었기 때문에, 표현 양식상의 문제는 기법적인 숙련 정도의 문제와 구별되기 힘들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양식의 변화는 기법의 발전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이기도 하다는 견해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여러 양식의 다양성과 변화를 설명하는데 모방 기술의 발달 여부가 더이상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게 됨에 따라 나오게 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는 것'과 '보는 것'에 근거한 지각 이론이었다. 이에 따르면 이집트나 중세의 미술가들은 아는 것을 그린 것이며, 그리스 이후 자연주의적 재현의 발달은 이러한 개념적 도식을 버리고 점차 순수한 시각을 회복하는데 기인한다는 점이 설명된다.  이 이론은 도식과 수정의 리듬으로 재현 과정을 보여주는 곰브리치의 설명과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 개념성을 배제한 순수한 시각, 즉 '순진무구한 눈'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양분법을 거부하는 곰브리치의 견해와 다시 만나게 된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양분법은 이미 인간이 지각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실제로 보는 것(감각)과 지성을 통해 추론하는 것을 구분하던 데에서 비롯한다.  고대에 플리니우스는 이미  "마음은 우리가 사물을 보고 관찰하는데 쓰는 핵심적 도구이고, 눈은 의식의 가시적인 부분을 받아들여 전달하는 운반체로 기능할 뿐이다" 라는 말로 그 차이를 요약한 바 있다. 그러나  시각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시대와 갖고 있지 못했던 시대의 현저한 차이에서 우리는 시각영역의 넓고 좁음은 단순히 우리 고유의 지각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 즉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는 입장에서 당연시되는 아동미술과 원시미술간의 비교 역시 신중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지각 이론에서는 원시 미술과 어린이 미술에는 '자연적 기호'보다는 상징의 언어가 사용된다고 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각이 아니라 지식에 바탕을 둔 특수한 종류의 미술, 즉 '개념적인 이미지'를 이용하는 미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가정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그림을 그린 방식이 과거 미술에서의 방식과 유사한점이 있더라도 이 유사성을 덜 발달된 독특한 정신이라는 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중세 회화 양식의 특징은 유아 미술과는 달리 관습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면  '보는 것'과 '아는 것'의 문제는  예술에는 유형과 상투형이 큰 역할을 하고 인습이 뿌리깊게 작용한다는 점과도 연관된다. 양식이란 문제는 전통에 행사하는 힘과 관련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양분법에 의한 지각 이론은 이제 부적절한 것이 되었으므로 이 양자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본 입장에서 양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 하다.

우리는 이제 모든 예술은 인간의 정신에서 시작되며 가시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비롯됨을 인정할 수 있다. 어떤 재현도 그 양식에 의해 식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모든 예술은 "개념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곰브리치는  미술사를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예술가의 시행착오과정과 그 시도를 이해하려 하는 감상자의 시행착오 과정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문제 해결의 연속으로 보고 있다. 즉 각 시대의 이미지가 갖는 기능의 변화나 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새로운 양식이 탄생됨으로써 양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곰브리치가  이집트 미술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소에 따른 양식의 변화를 재현 기능의 차이나 사회적 맥락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있다.

재현의 다른 기능들이 다른 양식을 만든다는 것은 그림문자적 기능을 가졌던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의 자연주의적 양식에 관한 논의로 설명된다. 이집트 시대의 부조와 벽화들은 수천년전 이집트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처음 대할 때면 오히려 어리둥절할지 모른다. 그것은 이집트 미술가들이 실생활을 재현하는데 있어 우리들과 아주 다른 방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함이었다. 모든 것을 가능한 명확하게 그리고 영원하게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들이 해야할 작업이었다. 곰브리치는 이렇게 그림에서의 명확한 해독성을 중시하는 이집트인들의 방식을 오늘날의 지도제작자들의 방식과 비교하면서, 이집트 시대의 재현은 문자적인 개념화, 혹은 도해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집트 미술가들은 우연한 각도에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 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완전히 명확하게 나타나도록 보장해주는 엄격한 규칙들에 따라 기억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들이 이 규칙을 그렇게 엄격하게 지킨 것은 아마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마술적 의도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초기에 이집트의 규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은 점차 그 자신의 관점을 갖기로 결심했다.  미술가는 더 이상 가장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그림 속에 모든 것을 담으려 의도하지 않고 그가 대상을 바라모는 각도를 고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인들이 재현에 새롭게 부여한 기능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에서 추구한 이미지의 기능은 설화적 (narrative) 기능으로서  그리스 미술은 '무엇' 뿐 아니라 '어떻게' 까지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술가와 감상자의 상상력에 의존함으로써 신화적 사건을 환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상적 영역의 창조는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사회적 승인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미술의 혁명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미술에 대해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모방 기법을 위해 현실의 조응이 창출을 대체할 때까지 뚜렷한 방향이 있는 노력을 기울였고, 개념적 미술의 도식을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 미술에서의 혁명 이후 고대 후기에 동방종교의 영향으로 미술의 취향이 초기 미술 양식으로 돌아가고 이집트 전통 미술의 신비로운 형상을 동경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 역시 쇠퇴가 아니라 기능의 변화에 따른 문제해결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맥락은 개인으로서 예술가의 선택에 있어서 양식 변화의 제한 요소로 지적되어 설명된다. 우리는 그리스 시대에 뒤이은 로마제국 시대미술을 그 예로 살펴볼 수 있다.  로마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왕국들의 폐허 위에 그들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에도 미술은 그다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인들이었고 대부분의 로마 수집가들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복제품들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미술은 어느 정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고 거기에 따라 그들의 방법을 적응시켜야 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실물과 같은 훌륭한 초상을 제작하거나 그들의 승리를 널리 알리는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초상제작에서는 인물을 미화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만들어야 했고 전쟁의 업적 묘사에는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한  정확한 세부묘사와 자세한 설명이 요구되었다. 미술의 주된 목표는 더이상 이전시기에 추구되었던 조화나 미 또는 극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로마시대 일어났던 미술에서의 이러한 변화와 쉽게 비교하기 위해 우리는 그 다음 시대의 미술에 대한 곰브리치의 설명을 살펴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어 기독교 교회가 로마제국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야만 했었다. 미술은 성경에 나오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될 수 있는 한 분명하고 단순하게 이야기해야 했다. 이 주요한 성스러운 목표로부터 관심을 딴 데로 돌릴지도 모를 것은 마땅히 이야기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처음에는 로마 미술이 발전시켜놓은 설명조의 이야기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점차 핵심적인 것만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다. 이제 미술에서는 모든 사물들을 명확하게 재현한 것이 중요하다는 이집트적인 관념이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의 미술가가 이 새로운 시도에서 구사했던 형식들은 이전과는 다른 그리스 회화의 발전된 형식이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곰브리치는 '아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전통적 구분을 거부하고 이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각 시대의 이미지가 갖는 기능의 변화나 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새로운 양식이 탄생됨으로써 양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위에서 예를 든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미술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인상주의를 환영주의 미술의 절정으로 보고 그 자체재의 모순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Cézanne, Van Gogh, Gauguin을 거쳐 이후의 추상미술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고 있다. 즉, 어떤 예술가도 "자신이 본 것"만을 그릴 수는 없으며 인습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인상주의자들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고 '눈으로 본대로의 재현'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우리는 미술사를 문제 해결의 연속으로 보는 곰브리치의 입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적 맥락에서의 의의

 

곰브리치의 미술사관은 Wölfflin, Riegl, Worringer 등으로 대표되는 독일 미술사론의 지적 성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독일 미술사론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고 개념적 미술과 그보다  개념적이지 않은 미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미술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원시미술과 자연주의 미술간의 대조를 지나치게 과장해왔다. 곰브리치는  재현론을 통해 이러한 구분에 의한 2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미술사를 전통의 연속성과 개념적 이미지의 지속적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곰브리치는 또한 인간의  지각능력에 대한 진화론적 가정을 거부하고 있다. 양식의 다양성은 인간의 심성이나 지각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에게 주어진 예술적 문제의 차이점에 근거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미술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계속적인 진보로 간주하는 것은 소박하고 그릇된 생각이다. 각 시대의 미술가들은 자신이 그전 세대를 능가했다고 느끼며,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 방향에서의 성과가 다른 방향에서는 손실이며, 이러한 주관적 진보는 중요하긴 하지만 예술적 가치에있어서의 객관적인 증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곰브리치는 새로운 양식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호소하는 역사주의자들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는 역사적 변화를 단순히 맹목적이고 그 자체만으로 고립된 인과율의 고리에서 나온 결과로 전제하는 인과론적  해석을 버려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곰브리치는 양식의 변화란,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양식내의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문제들과 그 해결의 연속으로 설명되어야만하다고 주장하며, 문제 상황과 문제 해결의 객관적인 관계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상황논리 분석에 의해서 설명되어져야만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결론

 

곰브리치는 환영주의 예술은 그것이  배척받는 시대에도 지각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한 일반적인 실험으로서 주목받을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과 같이 시각적 이미지가 넘치고 재현기법이 남용되어 재현 능력에 대한 경이감이 상실된 시대에도 재현과 환영은 여전히 신비스럽고 복잡한 성격을 갖는 것이며 우리는 그 예술 언어의 어법은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곰브리치에 따르면 예술쪽에도 오랜 전통이 있으며 그러한 전통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선 역사에 대해 비판적 고찰을 요구한다고 한다. 어떤 회화적 전통이나 양식도 이미지를 창출해내기 위한 도식을 갖는다. 미술가는 그 도식을 채용해서 수정과 보완을 계속해나가며 이때 앞세대와는 다른 사회적 조건 아래에 있는 미술가는 전통적인 도식을 여러 방식으로 수정하게 된다. 곰브리치는 이러한 도식, 수정의 재현과정과 사회적 맥락에 따른 양식 설명을 통하여  여기에서 회화적 재현의 역사가 성립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양식의 문제를 지각의 심리학과 관련시켜 설명하면서 미술사는 기술의 능숙도의 진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념과 필요의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지 창출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재현예술의 역사는 기존의 예술언어가 갖는 한계 내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접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써 새로운 예술 언어를 개발해온 문제해결의 연속이며, 지역과 시대에 따른 양식의 다양성도 이러한 점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을 구분하고 미술을 재현 기술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보았던 종래의 재현론을 극복하는 한편, 미술에서의 재현이나 환영이라는 문제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그의 미술사관은 미술사의 내면적인 면을 강조하고 인과적 접근에 치중한 데서 벗어나, 미술사의 외면적인 면을 주목하고 문제들과 그 해결의 연속으로 파악하여 어떻게 양식의 변화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S. Alpers ,"Is Art History?," Daedalus, (Summer, 1977) pp. 1-14.

E. H. Gombrich , Art and illusion : A study in the Psychlogy of pictorial Representation, 2nd. ed. Princeton Univ. Press, 1972.

----------------, 『예술과 환영』 상.하, 백 기수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5.

----------------, Story of art, 15th ed. Englewood Cliffs, N. J. :Princeton-Hall, 1990.

----------------, 『서양미술사』 상.하, 최 민 옮김, 열화당, 1991.

A. Hauser,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고대편, 백낙청 역, 창작과 비평사, 1981.

H.Wolfflin, Principles of Art History, Trans. by M.D.Hottinger, N. Y: Dover, 1950.

---------, 『미술사의 기초개념』, 박지형 역, 시공사, 1994.

  *이 글은 필자의 학사학위논문(96년 2월)을 축약한 것이다.

 **미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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