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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레이디 샬롯,
1888, 캔버스에 유채, 153x200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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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속담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여행길에
보내라(Send the boy to travel that you love best)” 라는 말이 있지요. 여행은 가장 큰 배움의 기회입니다. 그
배움이라는 것은 결국 나를 만나는 일이지요.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스트레스에 쌓일 때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여행은 변화와 일탈의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만날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지금 어디론가 혼자 떠나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한 배움의 필요성, 곧 나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겁니다. 주저하지 말고 나를 만나러 가세요. 몸이 떠나면 마음도 세상의 욕심을 등집니다.
여기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레이디 샬롯>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흰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배에 몸을 싣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왠지 현실이 아니라 꿈속의 풍경인 것만 같습니다. 이제 곧 해가 질 것 같은데, 여인은 이 배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듯 깊은 상념에 빠져 있군요. 그 상념이 아련한 노래가 되어 우리의 마음속으로 아득히 밀려듭니다.
이 그림은 아더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테니슨이 쓴 시를 토대로 한 그림이지요. 여인은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삶의 가장
큰 굴레인 거울을 깨 버렸습니다. 자신을 가두려는 운명의 힘에 그렇듯 결연히 저항한 그녀는 진정으로 자유와 해방의 여행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디 샬롯은 어두운 탑 안에 갇혀 세상을 거울로만 보도록 허락 받은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운명에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씩씩하고 잘 생긴 원탁의 기사 랜슬롯 경을 거울로 본 순간 그녀는 그를 향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사랑을 위해 숙명을 어기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탑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거울은 그렇게 깨져버렸고, 그녀는 랜슬럿 경이 있는
카멜롯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며칠 후 배가 카멜롯에 이르렀을 때 기사들이 본 것은 그 배 안에 자는 듯이
누워 있는 레이디 샬롯의 주검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레이디 샬롯은 지금 저물어 가는 해뿐 아니라 저물어 가는 자신의 인생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자존은 목숨보다 귀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픔을 레이디
샬롯은 자신의 마지막 노래에 실어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유리처럼 투명한 표정으로 십자고상(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는 모습의
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영롱한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볼수록 감상적인, 그러면서도 참으로 매력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이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여정이라면, 우리도 여행을 떠날 때마다 그림 속의 저 여인처럼 나를 가두는 부정적인 거울들을 과감히
깨뜨려야 하지 않을까요? 여행은 그렇게 오랜 허물을 벗는 귀한 배움의 길입니다.
이주헌 미술평론갇 前 학고재 화랑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