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조우석] 최근 TV 화면에 비친 청와대의 여야 지도부 만찬 간담회장에서 못 보던 초대형 그림 한 점을 눈여겨 보셨는지 궁금하다. 인왕홀의 서쪽 벽면을 장식한 길이 7m, 높이 2.8m의 유화 작품에는 항구도시 통영(현 통영시)항의 전경과 함게 한산섬.미륵섬 등을 어미 닭처럼 품고 있는 남해안 다도해 풍경이 추상화 기법으로 처리돼 있다. 그 작품이 청와대가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가격 감정 과정을 거쳐 정식 구입한'통영항'(전혁림 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가격심의위원회는 당초 이 작품 가격을 2억3000만원으로 산정했으나, 올해 나이 92세의 노 화가인 전혁림 화백은 "국가기관이, 그것도 청와대가 구입하겠다면 1억5000만원을 받아도 만족한다"며 작품 값을 낮춘 것으로 알려졌다. 전 화백은 청와대로부터 제작 의뢰받은 지난 해 11월 이후 꼬박 3개월을 작품 완성에 매달렸다.
호당(號當)으로 치면 1000호에 해당하는 이 작품 구입은 이례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이뤄졌다. 그 배경에는 외국 순방 때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 외국 정치지도자들이 외교현안 논의에 앞서 소장한 그림 자랑부터 하는 문화 마인드에 자극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노 대통령은 그림 구입에 앞서 지난 해 11월 경기도 용인의 이영미술관에서 열리는 전 화백의 전시회'90, 아직은 젊다'을 찾아가는 등 각별한 공을 들이기도 했다.
노무현대통령 내외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소재 이영미술관을 방문, "구십 아직은 젊다"란 주제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전혁림(왼쪽 첫번째) 화백과 관람하고 있다.(사진=안성식 기자) 12일 경기도 용인시 영덕리 이영미술관 잔디공원에서 열린 전혁림 화백 신작전 '구십, 아직은 젊다' 오프닝 파티 겸 '전혁림 화백 100수(壽) 기원 굿 공연'에 참석한 전혁림 화백. (사진=안성식 기자) 첫 계기는 우연이었다. 지난 해 11월 초 노 대통령은 전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전하는 TV 보도를 보고 무릎을 쳤다. 경남 김해 고향에서 멀지 않은 남해안 풍경을 담은 그림 한 점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 토요일을 택해 노 대통령은 청와대 스텝들과 버스 한 대에 타고 전시회 오픈 행사장을 찾았다.
당시 미술관 측은 대통령의 방문 통보를 늦게 받았고, 그 때문에 미술관 정문의 경비원은 대통령 일행이 탄 청와대 버스가 미술관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제지했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대통령 일행은 정문 앞에서 내려 전시장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전시장에서 연로한 전 화백의 손목을 꼭 쥔 채 한 시간 넘게 그림을 관람하면서 거듭 찬사를 보냈다.(중앙일보 2005년 11월14일자 보도)
"화가 피카소야말로 정력의 작가로 알려졌지만, 올해 나이 망백(望百.100살을 바라본다는 뜻의 91세)인 전 화백님의 에너지는 도저히 못 당합니다. 또 피카소의 작품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땅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전 화백님의 작품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전시회 이름'90, 아직은 젊다'대로 부디 작품활동을 많이 하시고 장수 하십시요."
노 대통령은 전 화백은 물론 전시회 오픈행사의 일환으로 초청된 남해안별신굿의 인간문화재 정영만, 여무(女巫) 정옥이씨 일행과 함께 미술관 근처 갈비탕 집을 찾아 오찬을 함께 하면서 모두 3시간을 머물렀다. 청와대는 그날 오후'토요일 문화 나들이'를 대통령의 공식 일정으로 발표했다. 작품 구입 의뢰는 노 대통령이 그때 정식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의 그림 구입 담당 큐레이터를 대동했었다.
본래 전시회 작품을 그대로 사들이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인왕홀의 벽면 크기에 맞는 새 작품 제작 의뢰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왕홀에 걸린 것은 지난 3월25일. 인왕홀은 충무홀(외국국빈 만찬장).세종홀(국무회의장)과 함께 청와대의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은 "지난 해 11월 미술관 방문 때 노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할 1970년대 말 당시 동료인 조정래 변호사와 함께 시내 전시장에서 전 화백 개인전을 관람하면서 전 화백의 그림 세계에 관심을 가졌다는 고백을 미술관 방문 당시 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 화백 그림에 대한 애정은 30년이 다 돼서 청와대의 대형그림 구입으로 표현된 셈이다.
전 화백은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 그의 그림 세계는 크게 고향 통영(현 충무시)과 전통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맑은 남빛 코발트 블루 색이 주조인 화면은 통영의 하늘빛과 바다 빛을 흠뻑 빨아들인 듯 푸르게 넘실거린다. 붉고 푸른 원형의 도형이나 형태는 조선 민화에서 가져왔다. 그는 "나는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화면의 구성법이라든가 모티브, 색채 혹은 시대성 등이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 화백은 동향의 동년배 친구 사이인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대여(大餘) 김춘수씨는 물론 극작가 유치진, 음악가 윤이상과 함께 1950년대'통영문화협회'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림으로 시를 쓰고 음악을 지어온 셈이다.
청와대 정상문 총무수석은 "노 대통령은 '통영항'이 걸린 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인왕홀을 찾아 작품감상에 몰두 하는 등 여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wow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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