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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에 대해 이전에 쓴 글이 있기는 한데, 써놓고 돌아선 뒤로도 내내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또 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아마도 그녀가 화가 이전에 어머니, 어머니 이전에 한 인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선 케테 콜비츠 자신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케테 콜비츠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 세속도시에서 그녀를 일컫는 말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 어느 하나 그녀에게 합당하지 않은 말이 없으나 저는 그녀를 가리킬만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
<Whetting the Scythe>, etching, 299x295, 1905, Sprengel Museum Hannover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 1924
짓밟힌 사람들(Downtrodden ,1900) - 빈사 상태의 아이를 어머니가 안고 있다. 아버지는 목을 졸라 죽이라고 줄을 내민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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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외로움을 무척 많이 탔습니다. 세상에서 제게 피와 살을 나눠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3살 때 이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던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어서였는지 몰라도 어려서는 아버지가 별로 그립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아마도 어머니였을 겁니다. 오래도록 그 온기가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나의 갈증은 때로 대상 없는 반항으로, 근거 없는 분노로, 혹은 겨냥할 곳 없는 애정에 휩쓸렸습니다. 나의 갈증은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처럼 바람만 불면 훅하고 꺼지는 것이었으므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존재에 대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나의 슬픈 욕망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익혔고, 거짓말에 능숙해지자 어른들은 영리하다고, 어른스럽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슬픔과 외로움은 농익은 고름처럼 살갗 어디에나 배어 있어 어디를 누르더라도 용암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고, 그럴수록 나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피해 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서관에 앉아 홀로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으므로 나는 행복하게도 거짓말을 꾸며 나의 외피를 치장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만난 책들이 행복한 왕자의 제비처럼 저를 세상의 여러 모습들, 상황들로 이끌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살던 집 인근에는 공공도서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난 뒤나, 주일 미사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구립 도서관에 갔습니다. 불어터진 우동 한 그릇에 500원, 차가운 도시락을 덥혀 먹으라고 파는 우동 국물 한 그릇에 200원 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버스를 타고 구립도서관에 가기 위해서는 그 무렵 한창 준비 중이던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를 지나야 했습니다. 낡은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던 허름한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은 별천지였습니다.
그 때 구립 도서관 한 구석에 비치된 <라이프 인간 세계사 Great Ages of Man>이란 책을 통해 저는 처음 케테 콜비츠와 오토 딕스를 만났습니다. 루벤스, 르노와르, 드가의 그림과 달리 그녀의 그림에는 진짜 세상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공부를 하는 어린 중학생이 있고, 너무나 다정다감한 어머니와 엄한 아버지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의 풍파로부터 안전한 가정의 거실에 걸릴 법한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 속 세상은 그런 거실에 어울릴 화가들의 작품만 교과서로 보아왔던 제게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그늘진 골방 풍경으로 보였습니다. 예술이란 것이 드라마나 CF에 등장하는 것 같이 풍요로운 세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린 제가 가장 뚜렷하게 각인시켜 준 화가가 바로 케테 콜비츠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케테 콜비츠를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등 그녀를 일컫는 말은 너무나 많은데 나는 그녀를 가리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수없이 많은 어머니의 눈물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청년이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하다 이름도 모를 밀실에 갇혀 죽었고, 녹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군에 가 어이없이 죽어야 했고, 남의 민족의 식민지로 살아 그들의 용병으로 먼 이역 땅을 전전하며 죽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보인다.
케테 콜비츠. 강렬함과 애잔함이 함께 담긴 목소리로 역사는 그녀를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 예술가를 통해 역사가 드러나게 될 때 그 예술가는 행복할까 고통스러울까? 하루에 8백 명씩 굶어 죽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현실, '낳은 아이들의 반이 죽고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붙여 또 낳는' 그런 악몽 속에 방치된 인생들의 고통을 그녀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구립 도서관에 비치된 <라이프인간세계사>라는 책을 통해서 나는 오토 딕스와 케테 콜비츠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그림들은 무언가 갈증같은 것에 시달리던 내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술이란 것이 루벤스나 르느와르의 그림들처럼 늘상 아름다운 세계, 마치 TV의 광고CF처럼 아름답고 조화된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제 세계의 어두운 면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서도 우리에게 감동과 분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그림을 통해 처음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그림들은 무지한 자들의 미개한 열정이 어떻게 교양있는 자들의 세계를 부수고 더 나아가 새롭게 세계를 건설하는 지를 보여준다. 그 미개한 열정은 공장에서 무기생산을 멈추고 쟁기를 만들 것이며, 8시간 노동제와 남녀동일임금을 책정하게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 열정은 질서의 얼굴을 한 야만이 아니라 혼돈을 통해 아름다운 질서로 태어나고자 한 열정이었던 것이다.
대학살의 현장에 선 어머니
독일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는 1867년에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공부하던 오빠를 따라 그 곳에서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일생은 조부모이래 자유주의 전통의 가정분위기 속에 자유와 정의를 갈망했을 뿐만 아니라. 시달리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그들과 함께 연대하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가 추구했던 목표는 사회고발이나 선동에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태의 위급성'내지는 '긴급성'을 표현함으로써 '가난의 추방'이나 '질병의 퇴치'의 필연성, 사회개혁의 불가피성을 일깨우려는 데에 있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생명에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키면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민중과 더불어 함께 하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 형성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케테 콜비츠 |
1867년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법관 출신의 목수 칼 슈미트의 네 아이 중 셋째로 출생.
1881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판화가 마우러, 화가 에밀 나이데 등으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음.
1885년 '베를린 여자 미술학교'에 입학. 슈타우퍼 베른의 지도를 받음. 막스 클링거의 판화에 깊은 영향을 받음.
1888년 '뮌헨 여자 예술학교'에서 수업.
1891년 의사 칼 콜비츠와 결혼. 남편과 함께 베를린 북주의 빈민가에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봉사활동과 창작을 병행.
1893년 연작 판화 <직조공의 봉기> 착수.
1898년 '베를린 여자 예술학교'에서 강의 시작.
1899년 <직조공의 봉기>로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예술전'에서 최고상 수상. '베를린 분리파'에 가담.
1903년 <농민전쟁> 작업 시작.
1904년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조각 수업.
1907년 '막스 클링거 재단'으로부터 '빌라 로마나'상 수상.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체류.『짐플리시시무스』에 정기적으로 작품 기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들 페터가 전선에서 사망.
1919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원에서 임명됨.
1923년 목판 연작 <전쟁> 완성.
1925년 연작 <프롤레타리아> 제작.
1927년 소련 여행. 모스크바에서 전시회 개최.
1928년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판화 부문 의장에 임명됨.
1933년 히틀러 집권.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탈퇴.
1934년 석판 연작 <죽음> 착수.
1937년 당국의 불허 방침으로 작품전 무산.
1942년 손자 페터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 전선에서 사망. 석판 <씨앗이 직이겨져서는 안 된다> 제작.
1943년 노르트하우젠으로 강제 이주.
1945년 모리츠부르크에서 사망. 종전 후 유해가 베를린으로 옮겨져 안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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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캐테 콜비츠와 노신』 - 열화당미술선서 53/ 정하은 / 열화당 / 1986년 - 케테 콜비츠와 중국 혁명기, 그리고 이후의 판화 운동에 대한 짜임새 있는 내용.
『케테 콜비츠 - 역사인물찾기 2』/ 카테리네 크라머 / 실천문학사 / 1991년 - 실천문학의 역사인물찾기가 '체 게바라'편의 이상(異常) 베스트셀러 현상을 겪긴 했으나 여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넘쳐나는 시리즈.
『케테 콜비츠 :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 재원미술작가론 4 』 / 민혜숙 지음 / 재원 / 1995년
『20세기- Great Ages of Man』/ 조엘 콜튼 지음/ 타임 라이프 북스 편집/ (주)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0년 - 인류사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를 목적으로 미국의 타임 라이프사에서 만든 시리즈 전 20권 <Great Ages of Man> 중 한 권이다. 어렸을 적부터 굉장히 갖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어느날 헌책방에서 보고는 앞뒤 안 보고 덥석 집었던 책이다. 덕분에 출혈이 좀 크긴 했지만 출판 당시의 가격만도 11,000원의 비싼 책이었기 때문에 바람구두로서는 엄두도 못냈던 책이었다.
케테 콜비츠 미술관(베를린) - 언젠가 독일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한 번 꼭 들려보고 싶은 케테 콜비츠 기념 미술관. 독어를 기본 표기로 하고 영어, 불어를 선택하여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사이트이며, 내용 역시 충실하다.
워싱턴 국립 여성 미술관
Ball State University Museum of Art - 살펴보고 매우 화가 났던 사이트. 왜냐하면 미국의 일개 대학도서관 사이트치고는 너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콜비츠 뿐만 아니라 서양미술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영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도서관 (California State University Library) - 케테 콜비츠를 포함해서 대단히 많은 수의 작가들에 대한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미술관련 사이트들 중 하나이다.(영문)
그래픽 위트니스
마이 스튜디오
류동심님의 케테 콜비츠 Exhibition - 류동심님의 케테 콜비츠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가장 모범적인 홈페이지, 케테 콜비츠의 작품 세계와 인생, 작품 감상을 한 자리에서 모두 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 홈페이지. 참고가 많이 된 페이지이기도 하다.(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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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그림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자세를 허물고 남을 위한 존재로서 협력, 연대, 원조로 나서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이런 느낌은 그녀가 그래픽의 습작과 실험과정을 거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우연히 자연스럽게 영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 그녀는 유화작업을 하였으나 그녀의 교수인 칼 스타우퍼 베른을 통해 동판 부식법을 배운 것과 클링거의 상징주의 판화를 보면서 유화를 버리고 판화로 작업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그녀는 색채라는 것이 심미적인 유희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검정색, 회색, 백색을 통해 인간의 아픔과 슬픔, 어둠을 표출해 내는 판화야말로 대중적인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직공의 봉기 - 어둠 속의 빛
그녀의 연작들 중 '방직공의 봉기'는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켜 당시 베를린 예술전에서 금상을 수상(그러나 이것은 당시 정부의 반대로 수상할 수는 없었다.)한 것인데 단순히 하우프트만의 희곡 작품에 대한 삽화 정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 작품을 위해 1893~1897년까지 4년 동안 매달렸다. 처음에는 직조공 가족의 빈곤과 이들을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보여주며 그 다음에는 앞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면들은 어둡고 깊은 밤이지만 이제는 행동에 옮기기 위한 '회의'를 나타낸다. 그 다음, 보다 단단한 에칭용 철침을 이용해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직조공의 행진과 돌격을 나타낸다. 그리고 연작의 마지막에는 총에 맞은 봉기자들의 시신이 직조공의 방으로 운반되고 슬픔이 화면을 지배한다. 그러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어둠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느다란 희망을 나타낸다.
그녀의 이 연작이 하우프트만의 극과 다른 것은 그녀가 그들의 삶과 투쟁에 전적으로 집중되어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연작은 사회의 진보적 세력을 표현하고 여기에 맞는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주의적 형식을 발굴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실주의적'인 것은 주제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그녀가 단순히 귀족들을 위한 그림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자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 케테 콜비츠는 말한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 본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고개숙인 <짓밟힌 사람들>, 떠나려는 아이의 영혼을 마지막까지 붙잡으려는 듯 죽을 힘을다해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배고파 <빵을!> 달라고 떼를 쓰며 달려드는 아이들의 눈길과 그 엄마의 넓은 등을 보면, 콜비츠가 간단한 선 몇 줄로 복잡한 인간 감정의 극점을 얼마나 순간적으로 잘 포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죽음의 그림자
그후 콜비츠는 독일의 혁명적 전통에서 한 계급이 전체적으로 혁명적 운동에 참여했던 농민전쟁에 관한 연작을 그려 나갔다. 이것은 직조공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짜여져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드라마와도 같다. 그리고 이때의 연작은 단지 몇 개의 판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주제의 감정 영역을 충분히 묘사하면서도 완결성을 유지한다. 이 연작으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녀의 아들 페터가 종군했으나 전사하고 만 사건은 그녀의 작품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확실히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주제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은 자신이든 주위의 상황이든 항상 죽음의 공포 - 사실 일상이었으므로 공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속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녀의 아들 페터를 잃는가 하면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손자 페터를 죽음의 사신에게 넘겨주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독일은 1천3백만명이 징집되었고 1백 7십만명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유럽에서는 한 세대가 전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침없이 자행된 것이다.
그녀는 질병과 가난뿐만 아니라 전쟁을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반전화의 역사는 콜비츠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녀는 1922년 전쟁에 관한 연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사'라는 비보에 접한 가족들의 슬픔과 한을 '부모', '희생', '어머니들'등의 작품에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콜비츠는 1934-1935년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다. 백여 점이나 되는 그녀의 자화상들 중에서도 이 기간에 만들어진 '죽음에의 초대'는 그녀의 말기 작품가운데 유명하다. 아들을 전쟁에 잃은 후의 그녀의 작품들은 모델을 이용하기보다는 많은 드로잉을 통해서 단순하고 강렬한 선들을 구축했다. 그녀의 아들은 전쟁에 참가해 전사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빵을, <1924>, 석판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을 멈추고, 망각한다면 우리는 또 언젠가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란 말을 듣게 될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