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을 가지고 난장을 벌였다. ‘밀로의 비너스’에게 쇼핑백을 들렸다. 앵그르의 ‘터키탕’이 한국의 터키탕, 즉 찜질방 풍경으로 바뀌었다. ‘큐티! 섹시! 키티!’ 낸시랭의 ‘장난’이다. 유쾌하고 발랄하고 상큼하다. 도발성도 읽힌다.
팝아티스트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은 친절한 미술 안내서가 아니다. 알타미라동굴 벽화부터 매튜 바니에 이르기까지 마스터피스와 이를 리메이크한 자신의 작품을 담았다. 그는 “나는 평론가가 아니어서 단순히 명화만 소개할 수는 없었다"며 “작품을 가지고 마음대로 노는 것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낸시랭의 미술사는 인간 욕망을 다룬 변천사다. 반면 그동안 미술가는 욕망이 거세된 존재로 여겨졌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고 달러를 많이 챙기고 싶다는 ‘욕망 덩어리’ 낸시랭은 “예술가도 사람이지 욕망이 없는 요정이나 신이 아니다”며 “돈을 모르는 순수한 예술가들은 결국 현실적인 고통에 시달려 구질구질하고 시니컬하고 가난한 또라이가 되지 않는가”고 반문한다.
낸시랭은 미술가의 고유영역인 작업실에서 뛰쳐나왔다. 방송도 진행하고, 의류브랜드 아트디렉터로도 활약 중이다. 이런 활동을 고깝게 보는 시각도 팽배하다. 본업은 뒷전이고 부업에 골몰한 ‘튀고 싶어 안달난’ 여자쯤으로 그를 폄하한다. 그는 이런 평가에 대해 “내가 쫓아다닌 게 아니라 나를 따라왔다”고 항변한다. 방송 출연도 책 출간도 먼저 제의가 들어왔단다. 그는 “다양한 기회 중 내가 선택하고 진행하는 과정 전체가 나중에 돌아보면 내 예술작업으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 “미술은 이제 전통적인 캔버스를 뛰어 넘어야 한다”며 “새로움을 찾아 다양한 분야와 협동을 거듭하는 게 나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아트디렉터 활동을 예로 든다. 국내 최초로 예술가 이름을 사용한 패션 브랜드를 런칭한 그는 패션은 전국민의 화가나 가능한 예술장르라 여긴다. 작품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전면에 내세우는 배경도 작가와 작품이 따로 놀지 않고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팝아트’란 그의 별명처럼.
낸시랭은 자신의 미래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DVD’로 정의했다. 그는 “음악 등 다른 예술보다 현대미술은 대중에게 외면 당하고 있다”며 “내가 스타가 돼 현대미술로 시선을 잡아끌고 싶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예술가가 이제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이너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존경하는 앤디 워홀도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슈메이커가 되고, 전략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대중스타로서 이미지 관리까지 철저했다. 대중매체에 끌려다니지 않고 오히려 대중매체를 잘 다룰 줄 아는 현대화가, 그래서 성공한 제프 쿤스ㆍ매튜 바니ㆍ 데미안 허스트를 언급하며 낸시랭도 “서울에는 내가 있다!”고 외친다.
그는 책에서 “워홀은 작업실과 미술관에 한정됐던 미술가의 영토를 공중파, 지상파, 매거진으로 확대시킨 사람”이라며 “워홀의 영향을 받은 우리 또래 예술가의 움직임을 통해 미술을 이해하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대만족”이라고 역설한다.
인터뷰 내내 그의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잠이 쏟아지는지 눈을 자꾸 깜빡였다. 요즘 바쁜 일정에 쫓겨 수면은 물론 작업에 몰두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는 이제 본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란다. 그때 비로소 ‘아티스트’ 낸시랭의 평가가 적확히 나올 듯하다. 그는 과연 어느 선에 더 가까울까. 혁신적이거나 혹은 당돌할 뿐이거나.
이고운 기자(ccat@heraldm.com) 사진=이존환 기자(nani@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