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천성 중 하나라면 소유의 욕심이 아닐까.
차고 넘쳐도 또 채우고자 하는 욕망. 가진 것에 대한 애정일랑 항상 망각해 버리고, 가지지 못한 미지를 향해 끝임 없이 도약하는 사람의 애착 말이다.
어떤 대상의 충실한 관찰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집요하게 파헤치려 한 '모네'라는 작가가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하나의 주제를 연작으로 한 작품이 즐비한데 그 수많은 작품 속에서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 있다면 단연 <파라솔을 든 여인>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은가.
맑고 상쾌한 여름. 파라솔에 부서지는 강렬한 빛의 향연, 그 속에 아스라히 숨어있는 여인의 자태는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살포시 내린 천사나 여신과 같이 찬란한 빛에 휘감겨 우리의 시각을 시리게 한다.
찬연한 햇살과 자연의 색채에 한동안 넋 잃고 있을라치면 빼앗긴 시선은 금새 그늘에 숨어 아스라히 가뭇거리는 그녀의 이목구비로 이끌려 간다.
“가만보자...얼굴이 잘 안보이네… 누구지? 왜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았던 것일까?”
모네의 삶 속에서 이 작품은 어떤 비중과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오늘 세상의 시각을 또 한번 열게 한 미술가 '모네'라는 사람의 행적과 작품을 통해 그가 겪었던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발 한번 내디뎌보자.
그림 속의 여인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
모네와 그녀의 인연은 1865년으로 거슬어 올라 시작되었다.
모네는 당시 살롱전에 출품 한 실물크기의 인물화 <초록 드레스의 여인>을 통해 두각을 보이게 되고 모델이 되었던 카미유와 그 이상의 관계를 만들게 된다.
이후 1867년 첫 아들 '장(jean)'을 얻었으며 작품에 몰두하기 위하여 잠시나마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던 시련의 시기가 있었지만 차후 모네에게는 황금과 같은 단란한 가정의 행복이 펼쳐지게 된다. 그의 작품 속 연작에서도 상당수 부분 무척이나 평온하고 즐거운 가정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자리 차지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되었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르장퇴유의 양귀비꽃 Coquelicots (Poppies, Near Argenteuil) >, 그리고 그 이듬해 새로이 선보인 <파라솔을 든 여인 La Promenade>.
이 속에 시간의 멈춤으로 지속하는 모자(母子)의 한적한 한때는 그의 행복감이 잘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토록 행복했던 꿈의 생을 마감하는 예고가 있었으니 둘째 미셀을 낳고 극도로 쇠약해진 사랑했던 그의 아내 카미유의 사망이 그것이다.(1879년 9월 5일) 설상가상으로 이후 그토록 아끼던 그의 장남 장 역시 그의 품을 떠나게 된다(1914년)
당시 그의 심정은 다음과 같은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는 극도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두 아이를 데리고 내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비통함이 뼈에 사무칩니다."
(9월 26일 피사로에게 쓴 편지 중)
"가엾은 제 아내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과 홀로 남겨진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저는 완전히 낙담해 있습니다. 당신께 또 하나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돈을 동봉해 드리겠으니 일전에 우리가 몽드 피에테에 저당 잡힌 메달을 되찾아 주십시오. 그 메달은 카미유가 지녔던 유일한 기념품이라서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목에 걸어주고 싶습니다."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 중)
이 마지막 사랑의 표시는 그의 아내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삶이 막막해진 모네는 생활비를 줄일 의도로 '알리스 에르네스 오슈데'와 그의 아이들과 지베르니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모네는 자신이 의도했던 ‘야외 인물스케치’를 버리고 한동안 센강의 정경을 화폭에 담아낸다.
그의 생과 같이했던 모델이 없어진 때문일까. 아니면 인물 속에 투영된 아내의 그림자를 쉽게 지우지 못해서일까. 그의 작품 속엔 더 이상 인물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년의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윽고 1886년, 그 오랜 침묵을 깨고 <왼쪽에서 본 파라솔을 든 여인 Woman with umbrella turned to the left>과 <오른쪽에서 본 파라솔을 든 여인 Woman with umbrella turned to the right>의 연작을 발표하게 되었다.
어쩌면 에프트 강 어귀에 서 있는 오슈데의 모습에서 그는 죽은 카미유의 모습과 과거의 찬란했던 자신의 전성기를 다시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각을 간지럽히는 빛의 표현, 바람결에 날리는 드레스와 스카프, 파라솔을 든 구도, 배경이 된 뭉게구름을 구지 꼬집지 않더라도 어찌 카미유를 모델로 했던 그림과 비슷하지 않다고 할 것인가. 무척이나 닮은 이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과연 모네는 무엇을 생각하고 보았으며 무엇을 느꼈을까.
이 작품 속에서 카미유의 존재를 배제하거나 애써 부정할 이유가 어찌 있겠는가.
어쩌면 저 강둑 위에 선 한 여인이 얼굴을 가지지 못한 이유야 모네 자신만이 알고 있을 터.
하지만 그 누가 이런 시점에서 죽어간 카미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모진 운명이란 외면을 모르는 법인가 보다. 가느다란 인연의 떨림이 끝없이 이어질 줄 알았던 모네에게 불연듯 찾아온 죽음의 운명은 가고 없는 이의 모습이 투영된 작품에 어리어 얼마나 크고 애절한 고통을 동반했을까. 빛을 따라 흐르던 그의 붓 끝이 모델의 얼굴에 다다랐을 즈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그리움에 사무쳐 흐느꼈을까.
화폭에 담긴 눈부신 햇살의 부서짐도 그녀의 모습보다 미천하여 화려하지 못했으리라.
화폭을 더듬어 내려가던 그의 붓놀림도 힐끔 돌아선 그녀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가슴속에 남은 사랑의 여운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영원히 그의 곁을 또 우리의 곁을 떠도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모네의 작품 속에서 그가 가졌던 생의 행복함과 가슴 뛰는 흥분과 작품 앞에서 흘렸을 애절한 눈물, 절규하는 화가의 아픈 기억 속으로 다가가 부지불식으로 흠뻑 도취되어본다.
세월의 흐름을 넘어 화가들이 가졌던 삶의 애환이 우리에게 여전히 말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