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코드의 열풍이 대단합니다.
미션임파셔블 3를 제치고 1위...
아무튼 기분 좋습니다. 그림과 관련된 영화가
1위라는 것이...
이 영화는 여러모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종교계의 반발, 진실성, 최후의 만찬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 등등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릴께요?
'최후의 만찬'의 메인 요리는 무엇일까요???
'최후의 만찬'(1494년-1497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대표적인 성화입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이 극명하게 드러나도록, '원근법'을 사용하였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그의 명화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우좌우 어디에서 보나 이 화폭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즉 좌우 측의 벽들이 일직선으로 향하고 있는 부분을 잣대로 재듯이 따라가보면, 그 끝이 예수님께로 향하여 있고, 또 천장의 선들을 따라가 보면, 정확하게도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손 동작들이나 그 눈짓이 모두 예수님 한 분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성경적인 성만찬 이해와 좀 다르다고도 하나, 레오나르도가 여기서 묘사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중심의 성만찬'이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성만찬의 주인공은 예식(혹은 의식)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임을 분명하게 보여준 신앙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인생의 중심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 답변하였던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20여 년간의 복구 공사를 마치고 1999년 5월 28일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는데 소요한 시간의 네 배에 버금가는 기간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1498년에 완성되자마자 습기와 먼지로 말미암아 퇴색되고 말았는데, 이 복구 작업에 대한 판단은 양분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의 퇴색을 미연에 막기 위하여 현재 한 그룹 당 25명만 관람시키며 감상시키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난다 치면, 관리인이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현재는 예약을 미리 해 놓아야 감상을 할 수가 있으며 낭패를 겪지 않게 됩니다.
필자가 '최후의 만찬'을 처음으로 감상한 것은 1995년이었는데, 그때는 복구 중이었으며, 복구하는 모습도 그대로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복구 이후에 1999년 7월 12일에 두 번째로 본 성화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감상하고 난 후에, 필자가 가지게 된 인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즉 '최후의 만찬' 복구에 대한 많은 오해가 불식이 되었습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본 결과, 복구가 새로운 색을 덧칠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18세기 이후에 새로 입혀졌던 색채들이 벗겨졌으며, 이로 인하여 다 빈치의 원래 선상과 구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18세기에 입혀진 선상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다 빈치 성화의 본래 모습에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 알려진 그림과의 비교를 위해서 한 예를 든다면, 예수님이 입고 계신 겉옷의 파란 색채와 야고보의 겉옷 색채(예수님 어깨에 손이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와 마태의 겉옷 색채 등이 거의 다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먼지와 그을음으로 어둡게 덮여 있던 부분이 다 제거되자, 모든 부분이 밝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래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복구 이전 - - 복구 이후 -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왼쪽에서: 바돌로메, 야고보, 안드레, 유다, 베드로, 요한
오른쪽에서: 시몬, 유다(다데오), 마태, 빌립, 야고보, 도마
'최후의 만찬'은 'Sancta Maria delle Grazie'(은총의 성모) 교회의 식당에 북면에 있는데, 남면에는 Donato Montorfano의 성화 '십자가 처형'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 빈치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와 달리 원형이 제법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플로렌스 화풍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십자가를 붙들고 울고 있는 여인, 곧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죄 용서를 받은 여인의 슬픔을 깊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한국일보 기사 입니다.
다빈치 코드 논란 '다섯가지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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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소설에서는 예수가 제자인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녀 하나를 두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를 덮기 위해 그녀를 창녀로 낙인찍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가 결혼했다는 대목은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성 제자중의 리더였다. 어떤 복음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현장과 부활절 아침 예수의 빈 무덤에도 있었다. 요한복음은 그녀가 예수가 부활한 것을 본 첫 증인이라고 기록했다.
▦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소설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간에 불과한 선지자로 여겼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예수의 부활신화를 만들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를 ‘신’으로 규정했다고 주장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투표 끝에 가까스로 예수를 신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신적 존재라는 의미로 ‘하나님’, ‘주’로 불렸다. 또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투표가 없었다.
▦ 복음서
소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의 인성에 중점을 둔 초기 복음서를 불태우고 신성을 강조한 새로운 성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신약성서 최종본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확정되지 않았다.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 등 4복음서는 그 이전인 1세기 경에 이미 존재했다. 이들 복음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소설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오른 편에 있는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했다. 그림에 성배(聖杯)가 없는 것은 다빈치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피(혈육)를 가진 진짜 성배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학자들은 ‘최후의 만찬’에 막달라 마리아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명이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 오른 편의 인물은 제자 중 가장 나이 어린 요한이라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젊은 남성을 여성처럼 수염을 없는 얼굴로 그렸다.
▦ 오푸스 데이
소설에서는 ‘오푸스 데이’(Opus Dei)라는 조직이 예수에 관한 감춰진 진실을 은폐하려는 비밀 결사대로 그려진다. 필요하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광신도 단체로 묘사됐다.
하지만 실제로 오푸스 데이는 전세계에 8만5,000명의 회원을 지닌 보수적인 성직자 자치단체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에는 그날만 먹는 몇 가지 절기음식이 있습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상징적인 음식들이죠.
유월절을 다른 말로 무교절이라고 하는데, 누룩(효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먹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간에 유대인들은 누룩이 든 음식을 일체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출 23:15). 이집트 탈출 직전, 급박한 상황이라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은 무교병, 즉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죠. 마초라고도 한답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전날 이집트에 내려진 마지막 재앙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첫번째 태어난 것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는데요, 그 재앙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집에서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래서 양고기도 유월절 음식의 하나가 되었죠.
또 하나는 쓴 나물. 이것은 애굽의 쓰라린 노예 생활을 회상케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신16:3).
후대에 가서 유월절 의식에는 몇 가지 의식이 더 덧붙여졌습니다. 물에 포도주를 섞어 부은 네 개의 잔이 의식에 사용되었고, 또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하던 때 회반죽 일을 했던 것을 회상하기 위해 과일에 식초를 섞어 먹었습니다. 회반죽하는 데 식초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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