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중해의 미술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는 지중해 동부의 시리아 및 소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볼 수 있다. 특히 1961년 이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소아시아 남부의 차탈휘위크는,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radio carbon)의 함유량에 따른 연대측정으로, 그것이 BC 6500년경~BC 5000년경에 이르는 취락지(聚落址)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제사를 지내던 장소라고 생각되는 방을 비롯하여 많은 방을 가진 가옥집단(家屋集團)이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독수리, 춤추는 인물들, 소나 사슴 등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공예품으로서는 정교한 돌로 만든 단도(短刀)나 구슬을 연결한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미술은 고도로 조직화된 가옥군(家屋群)이나 구상적(具象的) 회화와 조각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줌으로써, 종래의 신석기시대의 미술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해(死海)의 북쪽에 있는 예리고에서는 BC 5000년대에 속하는 도시가 발굴되었다. 1953년에는 또 석고(石膏)로 살을 붙이고 채색한 두개골(頭蓋骨) 몇 개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사실적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토기의 발달은 BC 4000년경부터 뚜렷해진다. 소아시아·그리스 본토·루마니아 등지에서 각각 특색 있는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가 출토되었다. 문양은 단순한 기하학적 모티프로부터 양식화된 동물·식물에 이르며,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것이 적지 않다. 초기의 단계에서는 물레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리질 유약(釉藥)도 쓰여지지 않았다. 소아시아나 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인접해 있어서 토기의 형태나 문양에 상호간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럽의 중석기 미술로는 동스페인의 레반트 미술과 북유럽과 북러시아에 분포하는 극북(極北) 미술이 있다. 레반트 미술의 대부분은 거의 암면에 그려진 적(赤)과 흑(黑)의 채화이다. 형상의 크기는 아주 작아 동물상은 75cm, 인물상은 30cm를 넘는 것이 드물다. 레반트 암면화의 특징은 인간의 묘사가 많다는 것과 그 인물이 동물들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결합해서 특정한 장면 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냥의 장면이 가장 많고, 수렵자의 무리, 전사들의 대열, 두 종족간의 전투, 포로·범죄자의 처벌, 무도하는 사람들, 투망하는 남자, 벌집을 채집하는 사람들의 군상도로 구성하는 사회적인 정경묘사가 성립되었다. 동물상은 자연의 비레에 충실하여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나 인물상은 아주 데포르메되어 실루엣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제작 연대는 8,000년부터 3,000년경이다.
유럽 각지의 거석기념물이나 토기, 이베리아 반도의 추상적인 암면화, 알프스 산중의 암면화 등을 모두 아우르는 신석기 시대의 미술은 제작연대가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2000년경이다. 돌멘, 멘히르, 알리뉴망, 르롬텍흐, 트릴리든, 연도가 있는 석실등의 거석기념물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브리튼제도, 유틀랜드 반도, 독일, 남부스칸디나비아등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암면화에는 이베리안 반도나 알프스 산중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채화(彩畵)가 대부분이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 각화(刻畵)가 많아진다. 그 제작가는 가축사육, 농경, 방직, 토기제작, 그리고 일부는 야금술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암면화의 형성의 대부분은 그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되어 있으나 그래도 인물, 동물, 주거, 수레, 태양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조상(彫像)으로서는 지중해의 말타섬에 특수한 거석구조의 신전이 있다. 그곳에서 토제와 석조의 아주 뚱뚱한 여성상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출산 내지 풍요를 상징하는 대모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
신석기인들은 구체적인 묘사가 없는 단순한 반복적인 선조(線條) 모양을 주로 그려 넣었다.
조각도 약간 출토된 것이 있으나 구석기시대의 발랄한 사실적인 호장도 없고 기하학적인 선형(線型)이나 원형 모양의 치졸하면서도 덤덤한 형태의 것들이며 이것들은 종교적인 상징이 담겨져 있는 우상적인 것이 많다.
회화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벽화와 돌에 선각한 추상적인 도형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석기시대 ( Mesolithic Age : 中石器時代 )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중간에 위치하는 시대. 이것은 유라시아에 관하여만 사용되는 시대 개념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제외)의 고고학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고고학의 연구자는 석기시대를 3분하여 그 중간시대를 중간석기시대(Middle Stone Age)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과 중석기시대와는 내용을 달리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혼동해서는 안 된다. 중석기시대라는 용어는 1909년, 프랑스의 J.모르강이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는 문화 내용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므로,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 말기 현상으로 파악하여 아구석기시대(亞舊石器時代:Epipalaeolithic Age) 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석기시대 문화의 특징은 인류생활이 수렵·어로·채취 등 획득 경제에 의존했다는 점과 그 문화가 해빙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의 석기는 거의 고타(敲打)· 훼고(喙敲)에 의해 제작되었으므로, 아직 간석기는 나타나지 않았고, 토기는 정체된 중석기문화에서만 제작·사용되었다.
중석기문화는 극북(極北)지대를 제외한 유럽·북아프리카·오리엔트·중앙아시아, 부분적으로는 인도와 일본 열도 등지에서 확인되는데, 그것은 잔석기문화와 조석기(粗石器)문화로 대별된다. 잔석기문화는 잔석기(microlith)를 주요한 석기로 하는 문화이지만, 이 잔석기는 단지 세형(細形)으로 된 석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형태를 미리 예상하며 몸돌로부터 떼어 낸 작은 돌날[石刃]이나 박편된 것을 그대로 혹은 표면 일부 측면을 약간 다듬어 손질을 한 석기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전통적인 잔석기문화는 잔석기 중에서도 세조기(細彫器)를 수반하는 문화이며, 이 문화는 주로 수렵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의 문화였다. 조석기문화는 타제석부(打製石斧), 돌망치 등 조잡하고 큰 석기를 수반하며, 식물 재배, 어로 채집, 특히 패류(貝類)의 채집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의 문화로, 조개더미를 남기기도 하였다. 잔석기문화권에서는 수렵을 돕기 위하여 개가 사육되었다. 가장 선진적인 것은 이란 서부·이라크 북부·시리아·아나톨리아 남부·팔레스티나 등으로, 그 곳에서는 BC 9000년경에 석기의 마제법이 고안되었다. 또, 거의 같은 시기에 곡식 재배와 염소·양 등의 사육도 시작되어 생산 경제를 주로 하는 신석기시대로의 이행(移行)이 엿보인다. 그러나 기타 지역에서의 중석기문화는 BC 3000년경까지 지속된 곳도 있고, 곳에 따라서는 더 오래 정체되기도 하였다.
신석기시대 ( Neolithic, New Stone Age : 新石器時代 )
인류가 사용한 도구에 따라 구분한 석기시대의 최종 단계. 구석기·중석기 시대에 이어지며 금속기시대에 선행한다. 약 1만 년 전, 즉 지질학상 홀로세(世)인 제4빙기가 끝난 후빙기(後氷期)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산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등 2가지를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는, 식량을 채집하고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던 구석기 단계에서 벗어나 인류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나 자연을 이용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동시에 인류는 정착· 촌락 생활이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문명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술이 진보하여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 먹기 위한 용기로서 토기가 발명되었고, 농경·수렵·벌채용의 도구로 간석기[磨製石器]가 사용되었다. 바구니 제작, 방직기술이 나타났고, 생산력 증가와 인구 증가에 따라 촌락을 만들게 되어 원시적 건축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의 발달로 풍요를 비는 지모신(地母神) 신앙, 사체 매장을 위한 장례방식 등, 정신면의 발달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말기에는 지역에 따라 자연동(自然銅)을 사용, 도구를 만들게 되어 금석병용(金石倂用) 시기로 접어든 곳도 있었는데,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생산경제는 이후 고대 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종전에는 토기와 간석기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농경단계에 들어와서도 토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라크의 자르모문화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토기 사용이 반드시 신석기 경제단계와 일치된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특정 시기를 지칭하기보다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의미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농경·목축에 의한 생산경제 단계를 이룩한 서남아시아 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선무늬토기[線文土器]문화라 하여 ‘신석기 A군(群)문화’라 부르는 데 대하여, 서남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시베리아·몽골·만주·한국 북부 등지로 연결되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문화 지역은 아직 농경·목축의 생산단계로 들어가지 않고 채집·수렵·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삼은 이른바 획득경제단계에 있었다. 이 지역은 서남아시아 선진 신석기문화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농경·목축이 부적당하여 성격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문화를 ‘신석기 B군(群)문화’라 부른다.
【신석기문화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산 경제 단계로 접어든 지역은 팔레스티나·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아시아 지역이었다. 종전에는 농경·목축이라는 식량 생산수단은 후빙기의 기후변화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급격히 건조하게 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게 되어 공존관계가 성립되고, 따라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을 재배하게 됨과 동시에 서아시아 일대에 야생하고 있던 산양·염소·소 등 무리를 지어 사는 유제류(有蹄類) 동물을 가축화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서남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기후변화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생산경제를 이룩했던 지역은 사막지방이 아니라 오히려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져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구석기문화가 점차 농경과 목축을 수반하면서 농경 목축으로 집약되는 생산경제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경향이 우세해졌다.
후기 구석기 말기와 연결된 서남아시아 지역의 원신석기문화(原新石器文化)인 이라크 북부의 카림샤히르문화, 팔레스티나의 나투프문화, 예리코의 전토기 신석기(前土器新石器)A문화,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하질라르문화 등은 급격한 기후 변화에 의한 요인보다는 독자적으로 생산경제를 이룩했다고 보는 요인이 농후한 문화 중 대표적인 것이다. 카림샤히르문화가 가장 오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자르모 유적은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BC 6750±200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것은 BC 8000∼BC 7000년경으로 생각되며 농경·목축이 발생한 곳은 초기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산지나 고원이었고, 점차 큰 강 유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서남아시아의 신석기문화】
서남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시작과 전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
⑴ 카림샤히르·자르모 문화기:이 지역에서는 이미 중석기부터 농경에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돌가래[石]·돌칼[石刀]·돌절구[石臼] 등과 가축을 사육한 증거로 보이는 염소·양·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팔레스티나의 나투프문화 유적도 일반적으로 중석기문화 유적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자르모 하층(下層) 문화는 농경 흔적이 확인되어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로 돌입하여 BC 6500∼BC 5000년경에는 우기(雨期) 때문에 관개에 의하지 않고 초기 농경이 성립되었고, 농구(農具)로는 돌가래·돌낫[石鎌] 등을 사용했으며, 칼날 부분은 식물을 자른 흔적이 보인다. 농작물로는 보리·밀·콩 등이, 가축은 염소·양·돼지·개 등이 95 %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상(女性像)이나 동물의 토우(土偶)가 보이는데, 이것은 지모신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농경과 목축이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이 시기의 유적은 농지나 수렵조건이 좋은 산간이나 산록 등지에 분포한다.
⑵ 하수나(Hassuna)문화기: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시작된 농경·목축 문화는 팔레스티나· 시리아·이란고원 등지로 확대되어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로 대표되는 농경 촌락문화를 성립시켰는데, 토기가 사용된 것은 이 시기의 특징이다. 초기의 토기는 조잡한 것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기형(器形)도 복잡해지고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것이 사용되었다. 돌도끼[石斧]·돌절구· 돌공이[石杵] 등 농기구가 사용되었고, 방추차(紡錘車)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방적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⑶ 할라프(Halaf)문화기:북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서부에도 신석기문화가 전파되었고, 남메소포타미아도 인류의 생활권으로 등장하였다. 원시적인 관개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벽돌로 만든 건물이 축조되어 신전이나 저장소로 추정되는 원형(圓形)건물이 이용되었다. 도제(陶製)의 낫이 농기구로 이용되었으며, 선박 모형의 출토로 보아 교역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제(銅製)의 병과 구슬이 출토되는 점에서 이 시기에는 금속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하수나문화 후기에는 금석병용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⑷ 우바이드문화기:신전을 중심으로 한 농경 촌락사회가 점차 발전하여 도읍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기하학무늬의 흑색가지무늬토기와 간돌도끼[磨製石斧]가 사용되었으며, 주동(鑄銅) 기술이 발달된 시기로, 이 우바이드 농경·목축문화는 청동기시대로 연결된다.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관개시설이 정비 확장되어 계급사회와 신전건축을 발달시킨 고대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신석기문화의 전파】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신석기문화는 구대륙 각지에 여러 경로를 거쳐 직접·간접으로 전파되었다. 신석기문화는 세계 여러 지역에 전파된 시기가 각각 달랐고,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전통에 따라 달랐으므로 대체로 지방색이 강한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⑴ 유럽과 아프리카에는 비교적 빨리 전파되어 나일강 유역에는 타사·메림데·파이움·바다리· 카르툼 등의 여러 문화를 발생시켰고, 카스피해 연안에는 아나우문화가 나타났다.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 퍼진 문화는 발칸반도·에게해 등에 들어가 몇 개의 경로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일부는 북아프리카로 각각 전파되었다. 특히 카스피해 연안에서 북상하여 드네프르강에 들어간 문화는 트리폴리에문화로 불리며, 이 지역에서는 BC 4000∼BC 2000년경 가지무늬토기문화가 전개되었다. 소아시아에서 다뉴브강을 거슬러 중부 유럽으로 퍼진 문화는 타래무늬[渦文]를 주로 하는 가지무늬토기를 수반한 다뉴브문화를 형성했고, 스위스 호수지대에는 호상주거(湖上住居)를 특색으로 하는 로벤하우젠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방에는 하수나 병행기(竝行期)에 이란고원을 통하여 아프가니스탄·바루치스탄·인더스강 유역에 가지무늬토기를 사용한 농경문화가 전파되었다.
⑵ 동아시아에는 황허강[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에 늦어도 BC 3000년경에는 서아시아 가지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양사오[仰韶]문화가 성립되었다. 가축으로는 돼지와 개가 사육되었고, 곡식으로는 조·수수를 비롯하여 일부에서는 콩도 재배되었으며 추수용인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이 사용되었다. 양사오문화에 뒤이어 흑도(黑陶)·회도(灰陶)·홍도(紅陶)를 수반한 룽산[龍山]문화가 발생하였다.
⑶ 아시아 초원지대에 전파된 농경 목축 문화는 농경에 의존하지 않은 신석기문화가 발생하여 북방 유라시아 삼림지대에 농경·목축을 수반하지 않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수렵·어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⑷ 서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전파된 보리·밀의 농경문화에 대하여, 서아시아 일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박손문화·방각부(方角斧)문화, 유견(有肩)·유단(有段) 돌도끼문화 등이 발달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벼·감자·바나나 등이 재배되었고 돼지·닭 등을 사육하였으며, 또한 이 문화는 대양주 신석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지역의 벼농사는 중국 남부·한국·일본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농경이 동남아시아 열대지역에서 기원되었다는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못하고 있다.
⑸ 아메리카대륙의 농경문화는 유라시아 대륙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양(兩) 지역간의 상호 관련 증거는 아직 희박하다. 남아메리카와 안데스 북부 해안지대에서는 BC 2500∼BC 1800년경에 콩·호박·고추·사탕수수·박 등이 재배되었고, BC 1150년경에는 옥수수도 재배되었으며 가축으로는 알파카·야마 등이 사육되었다.
한편 사해(死海)의 북쪽에 있는 예리고에서는 BC 5000년대에 속하는 도시가 발굴되었다. 1953년에는 또 석고(石膏)로 살을 붙이고 채색한 두개골(頭蓋骨) 몇 개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사실적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토기의 발달은 BC 4000년경부터 뚜렷해진다. 소아시아·그리스 본토·루마니아 등지에서 각각 특색 있는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가 출토되었다. 문양은 단순한 기하학적 모티프로부터 양식화된 동물·식물에 이르며,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것이 적지 않다. 초기의 단계에서는 물레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리질 유약(釉藥)도 쓰여지지 않았다. 소아시아나 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인접해 있어서 토기의 형태나 문양에 상호간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럽의 중석기 미술로는 동스페인의 레반트 미술과 북유럽과 북러시아에 분포하는 극북(極北) 미술이 있다. 레반트 미술의 대부분은 거의 암면에 그려진 적(赤)과 흑(黑)의 채화이다. 형상의 크기는 아주 작아 동물상은 75cm, 인물상은 30cm를 넘는 것이 드물다. 레반트 암면화의 특징은 인간의 묘사가 많다는 것과 그 인물이 동물들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결합해서 특정한 장면 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냥의 장면이 가장 많고, 수렵자의 무리, 전사들의 대열, 두 종족간의 전투, 포로·범죄자의 처벌, 무도하는 사람들, 투망하는 남자, 벌집을 채집하는 사람들의 군상도로 구성하는 사회적인 정경묘사가 성립되었다. 동물상은 자연의 비레에 충실하여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나 인물상은 아주 데포르메되어 실루엣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제작 연대는 8,000년부터 3,000년경이다.
유럽 각지의 거석기념물이나 토기, 이베리아 반도의 추상적인 암면화, 알프스 산중의 암면화 등을 모두 아우르는 신석기 시대의 미술은 제작연대가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2000년경이다. 돌멘, 멘히르, 알리뉴망, 르롬텍흐, 트릴리든, 연도가 있는 석실등의 거석기념물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브리튼제도, 유틀랜드 반도, 독일, 남부스칸디나비아등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암면화에는 이베리안 반도나 알프스 산중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채화(彩畵)가 대부분이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 각화(刻畵)가 많아진다. 그 제작가는 가축사육, 농경, 방직, 토기제작, 그리고 일부는 야금술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암면화의 형성의 대부분은 그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되어 있으나 그래도 인물, 동물, 주거, 수레, 태양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조상(彫像)으로서는 지중해의 말타섬에 특수한 거석구조의 신전이 있다. 그곳에서 토제와 석조의 아주 뚱뚱한 여성상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출산 내지 풍요를 상징하는 대모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
신석기인들은 구체적인 묘사가 없는 단순한 반복적인 선조(線條) 모양을 주로 그려 넣었다.
조각도 약간 출토된 것이 있으나 구석기시대의 발랄한 사실적인 호장도 없고 기하학적인 선형(線型)이나 원형 모양의 치졸하면서도 덤덤한 형태의 것들이며 이것들은 종교적인 상징이 담겨져 있는 우상적인 것이 많다.
회화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벽화와 돌에 선각한 추상적인 도형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석기시대 ( Mesolithic Age : 中石器時代 )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중간에 위치하는 시대. 이것은 유라시아에 관하여만 사용되는 시대 개념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제외)의 고고학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고고학의 연구자는 석기시대를 3분하여 그 중간시대를 중간석기시대(Middle Stone Age)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과 중석기시대와는 내용을 달리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혼동해서는 안 된다. 중석기시대라는 용어는 1909년, 프랑스의 J.모르강이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는 문화 내용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므로,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 말기 현상으로 파악하여 아구석기시대(亞舊石器時代:Epipalaeolithic Age) 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석기시대 문화의 특징은 인류생활이 수렵·어로·채취 등 획득 경제에 의존했다는 점과 그 문화가 해빙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의 석기는 거의 고타(敲打)· 훼고(喙敲)에 의해 제작되었으므로, 아직 간석기는 나타나지 않았고, 토기는 정체된 중석기문화에서만 제작·사용되었다.
중석기문화는 극북(極北)지대를 제외한 유럽·북아프리카·오리엔트·중앙아시아, 부분적으로는 인도와 일본 열도 등지에서 확인되는데, 그것은 잔석기문화와 조석기(粗石器)문화로 대별된다. 잔석기문화는 잔석기(microlith)를 주요한 석기로 하는 문화이지만, 이 잔석기는 단지 세형(細形)으로 된 석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형태를 미리 예상하며 몸돌로부터 떼어 낸 작은 돌날[石刃]이나 박편된 것을 그대로 혹은 표면 일부 측면을 약간 다듬어 손질을 한 석기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전통적인 잔석기문화는 잔석기 중에서도 세조기(細彫器)를 수반하는 문화이며, 이 문화는 주로 수렵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의 문화였다. 조석기문화는 타제석부(打製石斧), 돌망치 등 조잡하고 큰 석기를 수반하며, 식물 재배, 어로 채집, 특히 패류(貝類)의 채집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의 문화로, 조개더미를 남기기도 하였다. 잔석기문화권에서는 수렵을 돕기 위하여 개가 사육되었다. 가장 선진적인 것은 이란 서부·이라크 북부·시리아·아나톨리아 남부·팔레스티나 등으로, 그 곳에서는 BC 9000년경에 석기의 마제법이 고안되었다. 또, 거의 같은 시기에 곡식 재배와 염소·양 등의 사육도 시작되어 생산 경제를 주로 하는 신석기시대로의 이행(移行)이 엿보인다. 그러나 기타 지역에서의 중석기문화는 BC 3000년경까지 지속된 곳도 있고, 곳에 따라서는 더 오래 정체되기도 하였다.
신석기시대 ( Neolithic, New Stone Age : 新石器時代 )
인류가 사용한 도구에 따라 구분한 석기시대의 최종 단계. 구석기·중석기 시대에 이어지며 금속기시대에 선행한다. 약 1만 년 전, 즉 지질학상 홀로세(世)인 제4빙기가 끝난 후빙기(後氷期)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산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등 2가지를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는, 식량을 채집하고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던 구석기 단계에서 벗어나 인류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나 자연을 이용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동시에 인류는 정착· 촌락 생활이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문명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술이 진보하여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 먹기 위한 용기로서 토기가 발명되었고, 농경·수렵·벌채용의 도구로 간석기[磨製石器]가 사용되었다. 바구니 제작, 방직기술이 나타났고, 생산력 증가와 인구 증가에 따라 촌락을 만들게 되어 원시적 건축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의 발달로 풍요를 비는 지모신(地母神) 신앙, 사체 매장을 위한 장례방식 등, 정신면의 발달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말기에는 지역에 따라 자연동(自然銅)을 사용, 도구를 만들게 되어 금석병용(金石倂用) 시기로 접어든 곳도 있었는데,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생산경제는 이후 고대 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종전에는 토기와 간석기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농경단계에 들어와서도 토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라크의 자르모문화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토기 사용이 반드시 신석기 경제단계와 일치된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특정 시기를 지칭하기보다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의미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농경·목축에 의한 생산경제 단계를 이룩한 서남아시아 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선무늬토기[線文土器]문화라 하여 ‘신석기 A군(群)문화’라 부르는 데 대하여, 서남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시베리아·몽골·만주·한국 북부 등지로 연결되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문화 지역은 아직 농경·목축의 생산단계로 들어가지 않고 채집·수렵·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삼은 이른바 획득경제단계에 있었다. 이 지역은 서남아시아 선진 신석기문화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농경·목축이 부적당하여 성격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문화를 ‘신석기 B군(群)문화’라 부른다.
【신석기문화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산 경제 단계로 접어든 지역은 팔레스티나·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아시아 지역이었다. 종전에는 농경·목축이라는 식량 생산수단은 후빙기의 기후변화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급격히 건조하게 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게 되어 공존관계가 성립되고, 따라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을 재배하게 됨과 동시에 서아시아 일대에 야생하고 있던 산양·염소·소 등 무리를 지어 사는 유제류(有蹄類) 동물을 가축화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서남아시아 지역의 급격한 기후변화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생산경제를 이룩했던 지역은 사막지방이 아니라 오히려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져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구석기문화가 점차 농경과 목축을 수반하면서 농경 목축으로 집약되는 생산경제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경향이 우세해졌다.
후기 구석기 말기와 연결된 서남아시아 지역의 원신석기문화(原新石器文化)인 이라크 북부의 카림샤히르문화, 팔레스티나의 나투프문화, 예리코의 전토기 신석기(前土器新石器)A문화,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하질라르문화 등은 급격한 기후 변화에 의한 요인보다는 독자적으로 생산경제를 이룩했다고 보는 요인이 농후한 문화 중 대표적인 것이다. 카림샤히르문화가 가장 오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자르모 유적은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BC 6750±200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것은 BC 8000∼BC 7000년경으로 생각되며 농경·목축이 발생한 곳은 초기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산지나 고원이었고, 점차 큰 강 유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서남아시아의 신석기문화】
서남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시작과 전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
⑴ 카림샤히르·자르모 문화기:이 지역에서는 이미 중석기부터 농경에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돌가래[石]·돌칼[石刀]·돌절구[石臼] 등과 가축을 사육한 증거로 보이는 염소·양·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팔레스티나의 나투프문화 유적도 일반적으로 중석기문화 유적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자르모 하층(下層) 문화는 농경 흔적이 확인되어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로 돌입하여 BC 6500∼BC 5000년경에는 우기(雨期) 때문에 관개에 의하지 않고 초기 농경이 성립되었고, 농구(農具)로는 돌가래·돌낫[石鎌] 등을 사용했으며, 칼날 부분은 식물을 자른 흔적이 보인다. 농작물로는 보리·밀·콩 등이, 가축은 염소·양·돼지·개 등이 95 %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상(女性像)이나 동물의 토우(土偶)가 보이는데, 이것은 지모신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농경과 목축이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이 시기의 유적은 농지나 수렵조건이 좋은 산간이나 산록 등지에 분포한다.
⑵ 하수나(Hassuna)문화기: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시작된 농경·목축 문화는 팔레스티나· 시리아·이란고원 등지로 확대되어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로 대표되는 농경 촌락문화를 성립시켰는데, 토기가 사용된 것은 이 시기의 특징이다. 초기의 토기는 조잡한 것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기형(器形)도 복잡해지고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것이 사용되었다. 돌도끼[石斧]·돌절구· 돌공이[石杵] 등 농기구가 사용되었고, 방추차(紡錘車)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방적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⑶ 할라프(Halaf)문화기:북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서부에도 신석기문화가 전파되었고, 남메소포타미아도 인류의 생활권으로 등장하였다. 원시적인 관개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벽돌로 만든 건물이 축조되어 신전이나 저장소로 추정되는 원형(圓形)건물이 이용되었다. 도제(陶製)의 낫이 농기구로 이용되었으며, 선박 모형의 출토로 보아 교역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제(銅製)의 병과 구슬이 출토되는 점에서 이 시기에는 금속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하수나문화 후기에는 금석병용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⑷ 우바이드문화기:신전을 중심으로 한 농경 촌락사회가 점차 발전하여 도읍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기하학무늬의 흑색가지무늬토기와 간돌도끼[磨製石斧]가 사용되었으며, 주동(鑄銅) 기술이 발달된 시기로, 이 우바이드 농경·목축문화는 청동기시대로 연결된다.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관개시설이 정비 확장되어 계급사회와 신전건축을 발달시킨 고대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신석기문화의 전파】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신석기문화는 구대륙 각지에 여러 경로를 거쳐 직접·간접으로 전파되었다. 신석기문화는 세계 여러 지역에 전파된 시기가 각각 달랐고,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전통에 따라 달랐으므로 대체로 지방색이 강한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⑴ 유럽과 아프리카에는 비교적 빨리 전파되어 나일강 유역에는 타사·메림데·파이움·바다리· 카르툼 등의 여러 문화를 발생시켰고, 카스피해 연안에는 아나우문화가 나타났다.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 퍼진 문화는 발칸반도·에게해 등에 들어가 몇 개의 경로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일부는 북아프리카로 각각 전파되었다. 특히 카스피해 연안에서 북상하여 드네프르강에 들어간 문화는 트리폴리에문화로 불리며, 이 지역에서는 BC 4000∼BC 2000년경 가지무늬토기문화가 전개되었다. 소아시아에서 다뉴브강을 거슬러 중부 유럽으로 퍼진 문화는 타래무늬[渦文]를 주로 하는 가지무늬토기를 수반한 다뉴브문화를 형성했고, 스위스 호수지대에는 호상주거(湖上住居)를 특색으로 하는 로벤하우젠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방에는 하수나 병행기(竝行期)에 이란고원을 통하여 아프가니스탄·바루치스탄·인더스강 유역에 가지무늬토기를 사용한 농경문화가 전파되었다.
⑵ 동아시아에는 황허강[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에 늦어도 BC 3000년경에는 서아시아 가지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양사오[仰韶]문화가 성립되었다. 가축으로는 돼지와 개가 사육되었고, 곡식으로는 조·수수를 비롯하여 일부에서는 콩도 재배되었으며 추수용인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이 사용되었다. 양사오문화에 뒤이어 흑도(黑陶)·회도(灰陶)·홍도(紅陶)를 수반한 룽산[龍山]문화가 발생하였다.
⑶ 아시아 초원지대에 전파된 농경 목축 문화는 농경에 의존하지 않은 신석기문화가 발생하여 북방 유라시아 삼림지대에 농경·목축을 수반하지 않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수렵·어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⑷ 서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전파된 보리·밀의 농경문화에 대하여, 서아시아 일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박손문화·방각부(方角斧)문화, 유견(有肩)·유단(有段) 돌도끼문화 등이 발달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벼·감자·바나나 등이 재배되었고 돼지·닭 등을 사육하였으며, 또한 이 문화는 대양주 신석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지역의 벼농사는 중국 남부·한국·일본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농경이 동남아시아 열대지역에서 기원되었다는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못하고 있다.
⑸ 아메리카대륙의 농경문화는 유라시아 대륙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양(兩) 지역간의 상호 관련 증거는 아직 희박하다. 남아메리카와 안데스 북부 해안지대에서는 BC 2500∼BC 1800년경에 콩·호박·고추·사탕수수·박 등이 재배되었고, BC 1150년경에는 옥수수도 재배되었으며 가축으로는 알파카·야마 등이 사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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