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고대미술-구석기

영원한 울트라 2006. 6. 7. 14:40
서양의 구석기 시대는 인간의 주술적인 바램을 표현하는 미술이 주된 흐름으로 동물 형태에 깃든 동물의 영혼을 제압하여 사냥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회화로는 알타미라, 라스코, 퐁드곰 등의 동굴 벽화가 대표적이다. 조각으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로셀의 비너스'가 대표적인데 여체의 특징을 강조하여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였다.

구석기 미술은 유라시아 대륙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구석기 시대 후기의 동굴벽화, 암벽부조, 동산미술 등을 모두 가리킨다. 이 미술의 발견자는 라르떼이며, 그는 1883년에 프랑스의 라· 마들렌에서 맘모스를 음각한 골편(骨片)을 발견해 이것이 구석기 시대의 것임을 밝혔다.
동굴벽화는 1879년에 스페인의 사우투올라(M. de Sartuola)에 의해, 알타미라에서 1883년에 프랑스의 달로(F. Daleau)에 의해, 빼르·농·빼르에서 1895년에 프랑스의 리비에르(E. Riviere)에 의해 라· 무뜨에서 잇달아 발견되었다. 이러한 동굴벽화가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인정된 것은 그 후 1901년에 레·꽁바렐 동굴과 퐁·드·곰 동굴의 벽화가 브뢰이유에 의해 답사·조사되어 이것이 빙하시대에 속하는 것이 밝혀진 후의 일이다.

현저한 유적들은 1912년에 프랑스에서 베구엥이 발견한 뒤끄·도두베르 동굴, 1923년에 가스트레가 발견한 몽떼스빵 동굴, 1927년에 마르땡이 답사한 르·로끄·드·세르 동굴등이다. 그리고 1940년에 이 고을의 소년들이 발굴한 라스꼬 동굴은 유명하다.

이러한 미술은 지금으로부터 약3만년전의 오리냑기에서 페리고르기나 솔뤼트레기를 거쳐서 약1만년전의 마들렌 말기까지 장기간에 걸쳐서 제작되어 왔다.

구석기시대 인류의 생활에서의 예술적 활동.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래 도구(석기문화)를 만들어낸 최초의 시기부터 시작된다. 즉, 플라이오세(世) 말기에서 최후의 대빙하기에 해당되며, 조금 진보된 예술작품은 구석기시대 후기에서부터 알려지고 있다. 크로마뇽인은 석기제작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진보하였으며, 또한 골각기의 사용도 터득하여 각 방면에 걸쳐 기술적 발전을 성취하였다.

예술적 표현에서도 두리새김·돋을새김의 조각에서 회화를 발생시켜 최고의 기술을 나타내게 되었다. 1835년경 비엔나의 샤포 동굴과 오트-사브와의 바위 밑 피난소에서 채색(彩色)된 뼈조각[骨片]이 최초로 발견되어 먼 선사시대부터 예술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1860년 E.라르테는 아리에즈의 마사 동굴에서 여러 점의 예술품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15년 동안 끊임없이 작업하여, 구석기시대 유적과 관계된 장식물을 발견하였다. 그 후 1879년 M.소투올라는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어느 선사 고고학자도 그 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1895년부터 1901년까지의 답사에 의해 모드 콩바렐, 도르도뉴의 퐁 드 곰, 지롱드의 페르 농 페르와 오트가론의 마르술라 등에서 발견된 벽화와 조각품이 구석기시대 벽화작품의 진정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예술영역 내에 움직이는 작품(조각), 소여신상(小女神像), 채색된 판석(板石), 장식품과 벽화를 확인하고 있다. 이들 중 움직이는 작품과 소여신상은 편년을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데, 그것들은 문화층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벽화에 나타난 작품의 연대는 양식과 연대가 지층에 의해서 밝혀진 자료와의 비교에서 결정된다. 반대로 장식품과 움직이는 작품은 전(全)유럽의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 알려진 벽화예술의 본질적인 것은 프랑스 남서쪽과 에스파냐 북서쪽 등의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구석기시대 예술은 흔히 프랑스-에스파냐(franco-cantabrique)를 대표로 지칭하고 있다. 약 120개의 동굴과 바위 밑 피난소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콩바렐, 퐁 드 곰·라스코(도르도뉴)·니오, 포르텔, 3형제 동굴(아리에즈), 페세 메를르(로트), 앙글쉬르 앙글의 거대한 바위 밑 피난소(빈), 에스파냐의 카스틸로와 알타미라 동굴과 상탕다르지방에서 발견된 작품은 특출하고 그 수도 많다.

구석기시대 예술가가 응용한 기술은 다종다양하였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H.브뢰이는 프랑스-에스파냐의 동굴벽화를 수십 년 동안 연구하여 이 영역에 관한 모든 연구의 기준을 설정하였으며, 그 결과 이 분야가 두 시기로 나뉘어 계속적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처음 시기인 오리냐크-페리고르디안 시기에는 형상을 굵은 먹선을 이용하여 처리함으로써 물감의 이용에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은 후에 2중색(二重色)을 칠한 벽화로 발전되었다.

두번째 시기인 솔뤼트레-마들렌 시기에는 간단한 선을 데생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검은색을 펼치는 연속물로 발전하다가 나중에 특정부분 전체를 검은색으로 칠하였다. 검은 형상의 주제는 그 다음 다색벽화로 대치되고, 마침내 섬세한 선화(線畵)로 처리되는 작은 조상(彫像)이 이루어졌다. 조각의 발전은 한 가지 수법이 계속되면서 나타났다.

오리냐크-페리고르디안문화 시기에 매우 초보적으로 전개된 동물형상이 점차 거친 조각으로 오묘하게 나타난 후 돋을새김이 이루어졌다. 이 마지막 작품은 솔뤼트레-마들렌 시기 초기에 다시 나타났으며, 그 후에 선영(線影)으로 채워진 날씬한 조각품으로 대치되고 마침내는 선화로 처리된 조각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론은 형상의 이중노출(二重露出)에 관한 연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또한 당시 예술가가 응용한 기술과정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이론이 되었다.

1956년부터 프랑스의 고고학자 A.를르와 구랑은 여러 벽화와 조각품의 기준에 대한 편년적 계통을 수립하였다. 그는 움직이는 작품을 벽화와 마찬가지로 취급하여 구석기시대 예술의 양식사 발전을 재정리하려고 시도하였다. 구석기시대 초기, 약 3만 5000년 전에 뼈조각과 판석(板石)상에 리듬이 분명한 최초의 조각 흔적이 나타났다. 이러한 아름다운 표현은 전위의 상징적 시대에 속한다. BC 3만 년과 BC 2만 5000년 사이, 즉 오리냐크문화와 그라베트문화 전기 동안은 원시시대에 속한다. 거친 동물 형상의 묘사는 드물고, 오히려 석회석 판석 위에 여성의 성기와 남근(男根)을 나타낸 것이 많이 있다. 이러한 판석은 도르도뉴 페라시의 오리냐크문화지층에서 출토되었다.

그라베트문화에서 솔뤼트레문화 중기, BC 1만 8000년경에 양식Ⅱ와 일치하는 고식(古式)이 나타났다. 동물의 반면영상(半面影像), 즉 모든 동물종(動物種)을 공통적으로 목과 등만을 3중 만곡선(三重彎曲線)으로 처리하였다. 발목 끝부분은 흔히 생략되고 눈[眼]은 내선(內線)만을 자세히 나타내었다. 페르 농 페르와 가르가스의 조각품은 이 양식에 속한다. 이 시기에 또한 레스푸구·뷜렌도르프와 부라섬부이 등의 ‘오리냐시안 비너스’가 여신상으로 출현한다.

고시기(古時期)는 솔뤼트레문화 후기와 함께 전개된다. 도르도뉴 부르델리와 샤랑트의 로크 드 세르스의 돋을새김은 이 문화의 산물이다. 양식 Ⅲ 형상의 출현은 마들렌문화 전기에 시작되는데, 전시대의 모종 윤곽을 계속 유지하면서 세목(細目)과 유형을 정교하게 취급하였다. 동물의 몸체는 거대하여, 전반부는 흔히 과장되게 표현하고 발들은 짧게 나타내었다. 라스코의 대부분의 벽화는 이 시기에 속한다. 마들렌문화 중기에 양식 Ⅳ를 발전시켰다. 이때에는 퐁 드 곰, 콩바렐, 니오와 알타미라 등의 대부분의 그림이 나타난다. 동물의 다수가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되지만 발들이 뻣뻣하게 나타나 있고 흔히 그 발들이 땅에 닿지 않았다. 유형의 세목은 채색과 선영으로 나타내었다. 마지막 시기인 마들렌문화 후기 동안 양식 Ⅳ는 테이야트와 리묄의 조각품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사실주의에 도달한다.

표현된 주제를 통해 구석기시대 예술로 간주하는데, 대다수는 동물의 그림이다. 그것들은 추상적인 표현과 관계되어 있고 사람들의 형상은 아주 드물다. 학자는 이 작품들은 미적(美的)인 경향으로 만족하려는 것이 아니고 주술적인 입장에서 사냥감이 풍부하게 잡혀지기를 기원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과는 반대로 앙드레 를르와 구랑은 관계된 계통에 얽힌 여러 가지 그림은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벽화동굴은 진정한 조직적인 성역(聖域)이라고 보았으며, 모종의 주제를 위하여 나타낸 여러 동물, 모종의 상징적 표시, 위치 등과의 사이에 관련된 목표물에 관하여 지형학적(地形學的)으로 자세히 분석하였다.

서사체 장면의 부재(不在)는 창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벽화들이 사전에 세심하게 계획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징적인 내용의 기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구석기시대의 예술, 특히 회화(繪畵)의 의의에 대해서는 예술의 발생문제에도 관계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론이 많지만, 그다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시대에 그만큼 기술적으로 진보한 순수미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시 당시의 수렵생활과 밀접해서 발생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주제재(主題材)는 수렵의 대상물인 동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배에 화살이 꽂혀서 피를 흘리고 있는 형상으로,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때문에 동굴 속 아주 깊숙한 성스러운 장소가 화실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같은 벽면이 여러 번 화면으로 사용되었던 사실(동물이 2중으로 그려져 있는 점)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단순한 예술 표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인물상이 주술사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이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수긍이 가며, 여성나상(女性裸像)의 조각도 포획물이 풍부하기를 소원하는 것이라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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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동굴 벽화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가 그린 최초의 회화는 라스코 동굴과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든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동굴 깊숙한 벽면에 질서 없이 무리 지어 그려져 있는 이 동물 그림은 매우 능숙한 솜씨이고, 그 짐승들은 하나같이 아주 힘세고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라스코 동굴은 프랑스 중부의 몽띠냑이라는 시골마을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있다. 이 동굴은 1940년 9월 12일 4명의 소년 등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은 숲으로 개를 데리고 놀러 갔다가 개가 갑자기 사라져서 사라진 근처를 찾다가 풀덤불로 가려진 자그마한 굴을 발견하였다. 굴 입구는 약간 경사졌으므로 6-7m쯤 기어 들어갔는데, 갑자기 10m 가량 미끄러 떨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상당히 넓은 굴이었다고 한다. 다음날 램프와 밧줄을 갖고와서 굴을 탐험한 결과 개를 찾았고, 아울러 굴의 벽에 그려진 벽화도 발견하게 되었다.

구석기인들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원시적으로 사냥을 하면서 매우 어려운 조건 속에서 서서히 노동의 기술을 터득해 나갔다. 이들에게 사냥은 생명과 종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사냥하는 기술이나 사냥 도구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냥은 생명을 건 싸움일 수 밖에 없고 두려움과 공포가 함께 하는 활동이었다. 그들은 다음 사냥이 좀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자기들의 손에 죽은 짐승들의 혼을 기리는 심정, 그리고 그 어려운 사냥을 성공했다는 자부심으로 동굴의 벽에 사냥의 대상이 되는 짐승들을 그리고 사냥의식을 지냈다고 생각된다.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큰 짐승을 잡고자 몹시 갈구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작은 짐승들은 별 위험이 없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먹고살기에는 부족하였고 큰 짐승을 잡으면 몇 주일씩 충분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음식이 되는 큰 짐승의 사냥과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들짐승에 대해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의 그림은 거의 짐승들이었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서로 다른 그림이 겹쳐져 그려졌다. 이런 점은 이 그림들이 무엇을 위해 그려진 것인가에 대해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것은 일종의 사냥 마술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에는 화살이나 창이 꽂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을 죽임으로써 살아 있는 짐승의 영혼을 죽였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짐승 그 자체를 죽이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은 그림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창으로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더 강해지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사냥에 나갈 경우에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냥을 하게 되었다. 한번 그림을 죽이면 그들은 더이상 그 그림에 유의하지 않았다. 다음에 사냥을 갈 때에는 그들이 잡으려는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그림이 실제 모습과 똑같게 그릴수록 이 마술의 효력이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의 출발은 이와 같이 인간이 생존을 위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