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떠나는 자 남아 있는 자

영원한 울트라 2007. 5. 6. 11:30
박희숙의 명화읽기 |떠나는 자 남아 있는 자

21세기 유목인은 교육을 위해 떠난다. 보다 나은 환경에서 질 좋은 교육을 자녀에게 시키기 위해 이제까지 살아왔던 현실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에서 새롭게 인생을 개척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교육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일까? 사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이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40대는 아직까지 사회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든지 실업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밖에 없다. 그들 가슴속에 쌓여 있는 것은 사회에 대한 분노다. 남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평범한 인생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남겨진 인생은 장밋빛이 아니라 절망의 나락에서 구원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40대의 자녀들은 아직 학생들이고 그렇다고 확실한 노후대책도 없다. 또 직장에서 해직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버려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연하다. 재취업을 하자니 능력을 인정해주지도 않고 사업을 하자니 실패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또 먹고 살 만큼 돈이 많은 것도 아닌 40대의 현실은 칼 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절체절명한 40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땅에서 인생을 바꾸어 보는 것일 수 있다. 희망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고 하지만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행복하지 않다. 이상과 현실이 어우러진 행복한 삶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현실은 각막하고 잔인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해도 신세계는 이상의 세계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날개 짓을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은 떠나서 다시 한 번 삶을 사랑하고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미래를 가슴에 안고 떠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희망을 찾아 신세계를 찾는다. 교육을 위해서건 생계를 위해서건 이 땅에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현실의 땅에 정을 붙이기 힘들다. 새로운 땅에서의 삶은 그리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현실의 땅보다는 좀더 나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브라운의 ‘영국에서의 마지막 순간’. 이 작품은 이민을 떠나는 부부의 슬픔이 부드러우면서도 비장하게 표현했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자 계층이 열망했던 신세계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화면 정면에 앉아 있는 부부의 표정은 굳어 있다. 각자 떠나온 고향을 생각해서인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거센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남자는 두터운 외투를 입었고 아내는 담요로 몸 전체를 감쌌다. 그들의 곤궁한 살림을 엿볼 수 있다. 남편은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주기 위해 우산 손잡이를 꼭 잡고 있다. 하지만 바람은 펼쳐진 우산 사이로 그녀의 목도리를 거세게 휘날리게 하고 있다. 부부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꼭 잡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은 슬퍼 보인다. 그녀는 살짝 벌려진 담요 사이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다.

배 옆으로 물결을 일렁이며 파도가 치고 있고 저 멀리 빙하가 보인다. 그들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부가 앉아 있는 뱃머리 앞 그물에는 야채가 널려 있는데 그것은 가는 동안 먹을 양식이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길이지만 가난한 부부에게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할 만큼의 여유조차 없다. 그들 부부 뒤에는 다른 이민자 가족들이 있다.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아이의 손은 부모와 떨러지지 않으려고 목도리를 꼭 잡고 있다. 그 뒤로 술 취한 이민자들이 싸우고 있다. 그를 말리려고 하지만 술 취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1821~1893)은 가난 때문에 자신도 인도로 이민을 가고자 계획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현실감 있게 표현했다.

현실에서 희망을 찾는 자
신세계를 찾아 떠났지만 그곳 역시 문화만 다를 뿐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민을 가서 한 가족이 그 나라 문화에 동화되어 뿌리를 내리는 기간은 10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언어와 문화가 살던 곳과 다르기 때문에 주류층으로 결코 진입하기 힘들다. 살던 곳보다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년의 나이에 신세계를 찾은 사람들은 더욱더 적응하기 힘들다.

하물며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신세계를 향해 떠나고 싶어 하는데 새롭게 이주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결코 신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 순응하고 살 수밖에 없다.

티솟의 ‘굿바이-머지 강에서’ 이 작품은 19세기 보수계층이 지배하는 영국 사회를 떠나 캐나다나 호주, 미국 등 새로운 땅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을 전송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손을 흔드는 여인 앞에 있는 커다란 배는 그 당시 신세계였던 미국을 가는 여객선이다. 갑판은 보이지 않지만 화면 중간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들은 떠나는 친척들을 배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화면에서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여인 그리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모자를 흔들고 있는 남자는 머지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있던 상류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열심히 환송해주고 있다.

제임스 티솟(1836~1902)은 어린시절 항구도시에서 자라 바다와 항구는 그의 그림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박희숙
동덕여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한 후 7회의 개인전을 연 화가다. 2004년에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를 출간하면서 작가로도 명성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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