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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2:45
1
어느 노스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문제를 냈다. “지금부터 각자 새장에서 새 한 마리를 꺼내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인 다음 그 새를 내 앞에 가지고 오너라”

제자들은 새를 한 마리씩 꺼내 들고 흩어져 갔다. 시간이 흐르자 각자 죽인 새를 들고 노스님 앞에 나타났다. 죽은 새가 수북하게 싸였다. 그러나 평소에 다른 스님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하던 제자 하나만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들 바보 하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고 불평을 했다.

이윽고 그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새를 죽이지 않고 산채로 안고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새를 죽이려 했지만 어디를 가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보고 있고 바위가 보고 있었습니다’

(참고) 위의 이야기는 <너거는 고기묵고>(3)에 나온 이야기인데 필자가 축약해서 옮겼다.


이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교육용 우화로 만든 것인지는 따지지 말기로 하자. 아무튼 여기서 선생의 말을 알아들은 이는 바보 하나뿐이다.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이는 그 사람 하나 뿐이다. 그를 바보라고 놀리던 똑똑하던 스님들은 다 새를 죽였다.

노스님은 분명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이라’고 했다. 그 소리는 분명 죽이지 말라는 소리였지만 제자들은 ‘죽이라’는 소리로 들렸던가 보다. 눈만 뜨면 마음타령을 하고 또 마음을 닦고 불경을 읽으면서도 정작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 이란 그 말은 마음에 닿지를 않았던가 보다.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라는 옛말도 있다. 그 어디를 가도 하늘이 보고 내가 본다. 하늘아래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고전에서는 신독(愼獨)을 말했다. 의미인즉 ‘홀로 있는데서 삼간다’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한 도덕률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자기 삶의 건강성을 지키고자 해서이다. 남들이 보건 안 보건 자신의 행위에 따른 인과는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 인과의 엄정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우리네 일상은 그렇지 않다. 남들이 보는 데서는 조심하지만 남들이 보이지 않으면 이내 흐트러진다. 이를테면 교회에서나 절에서는 참으로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그러나 문밖을 나서는 순간,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렇게 이중적이고 표리부동하다. 입으로는 신앙을 말하지만,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일거에 무너진다. 남들이 보고 안 보고에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 춤을 추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은 얄팍하다. 아마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서 새를 죽이라’고 하면 다 죽일 것이다.

요즘 유난히 ‘모습’이 강조되는 시절이다.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또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좋은 뜻으로 하는 소리 같지만 곱씹어 보면 묘한 소리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사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잘 살면 그게 좋은 모습인 것이지 굳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 그만인 것이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요즘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도 나도 ‘모습’을 강조한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열심이다. 사는 내용은 상관이 없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열심이다. 그래서 모습을 조작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왜 이렇게 모습이 강조되고 모습에 매달리는 것일까? ‘모습’으로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속일 수 있는 것일까? 사실은 제 꾀에 제가 속는 것일 뿐이다. 조작한 그 모든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 어느 하나 빠짐이 없이 그대로 자신에게 입력된다.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것일 뿐이다.

오늘 우리는 또 무슨 궁리를 하고 있을까? 무슨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조바심내고 있을까? 차라리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조바심 내는 우리 자신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일까?

/배영순(영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