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삶의등대▲

단일 민족의 두 얼굴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4:25
11세기 초반부터 200여년간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安南)을 다스렸던 리 왕조는 1226년 트란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마지막 왕인 혜종의 둘째 왕자 리 롱 떵(李龍祥)은 망명길에 올라 현재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 땅에 정착했다. 고려 고종때 리 롱 떵은 몽고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화산군으로 책봉됐고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됐다. 지난 달 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판 후이레 베트남역사학회장은 한국의 족보학자 편홍기씨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리 롱 떵보다 99년 앞선 1127년 리 왕조 인종의 셋째 왕자 리 즈엉 꼰이 경주에 도착한 후 정선에 정착, 정선(旌善)이씨의 시조가 됐다고 발표했다. 판 회장은 고려 명종 시절 정중부의 난을 도와 상장군에 오른 이의민이 리 즈엉 꼰의 6대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한족, 여진족, 발해인 등 다양한 다른 인종들이 귀화해 살았으며 그 숫자가 고려 전 시기에 걸쳐 23만8000명에 이른다(경인교대 박철희 교수의 ‘다문화교육의 관점에서 기초한 초등사회·도덕 교과서 내용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귀화해 특정 성씨의 시조가 된 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장으로 참전했다가 귀화해 조총기술을 전파한 사야가(沙也可)는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사성(賜性) 김해 김씨를 일으켰다. 같은 시대 명나라 지원군으로 왔다가 주저앉아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된 천만리는 영양(潁陽) 천(千)씨의 중시조로 알려져 있다. 고려와 조선은 외국인이라도 이 땅에 살고 풍습을 따르면 백성으로 포용했던 것이다.

소수 외국인의 귀화와 혼혈은 제외하고도 한민족이 순수한 단일혈통민족은 아님은 이젠 상식이다. 고구려는 이민족과의 병합과정을 거치며 영토를 확장했고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건국했던 국가였으며 나중 발해 패망 후 유민들은 고려로 흡수됐다. 얼굴 연구 전문가인 조용진 한남대 미술해부학 교수는 현대 한국인의 얼굴은 8가지 기본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는 한반도에 약 8차에 걸친 민족 대이동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에 배타적 단일민족의 개념이 생겨난 것은 일제가 식민지배의 야욕을 드러내던 1908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신채호에 의해서라고 앙드레 슈미트 캐나다 토론토대 부교수는 ‘제국, 그 사이의 한국에서’라는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슈미트 교수는 신채호가 단군을 혈연적 조상으로 해석하는 단군신화를 창조하고 민족이라는 용어를 등장시켜 과거의 중화주의를 탈피하는 동시에 현재의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개념을 제공했다고 쓰고 있다. 결국 단일민족은 민족의 단결을 위해 형성한 허상의 신념이라는 것이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가 지난달 18일 한국에 대해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인종적 차별행위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정부가 다른 인종·국가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권고한 후 순혈주의와 외국인 차별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 높아지고 있다. 반면 그렇다면 한민족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단일민족의 개념을 인종적인 것과 문화·정치적인 것으로 나눠 생각한다면 어떨까. 인종적 우월성에 뿌리를 둔 인종적 단일민족론은 배타적이고 인종차별적 사회통념을 부추길 뿐인 시대착오적인 것이지만, 차별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정치적 단일민족론은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열린 민족주의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개념이다.

신채호 이후 100여년간 국민의 머릿속에 굳어온 인종적 단일민족 개념을 바꾸려면 교육으로 관점을 정립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초등학교 교과서가 한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 민족을 폄훼하고 있는 내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박철희 교수의 지적에 정부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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