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병든 사람이 있어 아내에게 약을 달이게 했다.
어떤 때는 많고 어떤 때는 적어 양이 들쑥날쑥했다.
화가 난 사내는 약탕기를 빼앗아 첩에게 주었다.
과연 첩이 달여온 약은 늘 일정했다.
그는 기뻐하며 더욱더 첩을 사랑했다.
어느 날 첩이 약 달이는 모습을 엿보게 된 사내는 땅을 쳤다.
양이 많으면 땅에 쏟고 적으면 물을 타는 게 아닌가.
이것이 첩의 약의 비밀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마장전'에 나오는 얘긴데 우리 사회가 딱 그 모양이지 싶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물 탄 약처럼 맹탕이란 말이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아무 데나 둘러보면 안다.
모터쇼에 가보면 자동차보다 레이싱 걸이 더 많다.
자동차를 제대로 보려면 미녀들에게 "좀 비켜달라"는 무례를 범해야 한다.
파리 모터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도 가봤지만 우리 같은 데는 없다.
못난 송아지 못된 짓 먼저 배운다.
요즘 대한민국의 병원은 아픈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방의학 차원도 아니다.
그저 건강한 사람들이 가서 피부 마사지하고 살 빼고 주름 없애고 턱 깎고 하는 곳이 병원이다.
한방이고 양방이고 다를 바 없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베스트셀러 목록엔 오로지 '성공을 위한 몇 가지 법칙' '몇 년 안에 몇 억 모으기' 같은
출세나 재테크 관련 서적들뿐이다.
아, 어학 교재도 빠뜨리면 안 된다.
또 감자탕집이 잘된다 싶으면 동네방네 감자탕집밖에 눈에 안 띈다.
영어마을이 인기라니까 지자체마다 비슷한 걸 만들어 중복 투자가 우려된다는 뉴스도
전혀 놀라울 게 없다.
매사가 다 그런 식이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얼마 전 노교수들이 고백한 인문학 위기는 우리 사회의 이런 천박함이 그 원인이자 결과다.
사회가 가벼이 물질만 좇다 보니 오직 학문하는 즐거움에 매진하는 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 보니
기초 학문의 바탕이 없어 사회는 더 가벼워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러시아를 우습게 보고 있지만
우리네 풍토에서는 러시아의 그리고리 페렐만 같은 이가 나오길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수학 7대 난제 중 하나라는 '푸앵카레의 추측'을 풀고서도 고액의 상금도,
미국 대학의 교수직도 마다하고 산에서 고사리나 꺾으며 산다는 천재 수학자 말이다.
그런 우직함이 '괴짜'나 '또라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 바로 천박함이다.
그런 천박함을 느끼지도 못하는 풍토병이 더 큰 문제다.
그야말로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다.
에펠탑이 처음 세워질 때 파리 시민들은 칠을 위해 페인트만 50t이 필요한 철골 괴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에펠탑 없는 파리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됐다.
그처럼 자주 보는 것만으로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에펠탑 효과라고 한다.
노상 천박함 속에 사니 천박함이 보일 리 있느냐 말이다.
누구는 화광동진(和光同塵)한다는 말을 앞세우기도 한다.
'교만하게 지식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세상에 어울린다'는 얘긴데 가당치도 않은 변명이다.
원조교제하면서 아이들을 돕는다면 말이 되는가.
천박함 속에 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본처 같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모습들이 보고 싶다.
기원전 2457년, 하늘이 열리고 홍익인간의 뜻을 세운 환웅이 내려왔다.
124년 뒤, 단군 왕검이 그 정신을 이어받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반만년 세월이 어디 짧은가.
유장하고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 켜켜이 쌓아올린 이 나라에서 얼마만큼의
세월이 더 지나면 깊고 그윽한 본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