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기응변의 기재
삼국지통속연의에서 비춰진 「가후」란 인물은 자신의 책략에 의지해 난세를 헤쳐가는 모사의 전형으로 나오는 듯 하다. 적절한 계교를 내어 자신의 군주를 도울 뿐만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단순히 배를 갈아타는마냥 군주를 옮겨 섬기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한다. 비록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있는 난세에 『적과의 동침』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해도, 가후가 연출해보였던 『어제 적군의 수괴였던 자가 오늘은 나의 주군』이라는 식의 괴행(怪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신 아연케함과 동시에 감탄사를 연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가후란 인물은 알고 싶어하면 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드는 지도 모른다.
가후의 자(字)는 문화(文和)로서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사람이다. 소시적에 그의 재능을 알아주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다만 한양(漢陽)의 염충(閻忠)만이 그를 특이하게 보았고 『장량과 진평의 기이함이 있다.(有良平之奇)』고 평가해주었다. 이윽고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관(郎官;郎)에 오르지만, 질병으로 귀향하게 된다.
가후는 벼슬을 사임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저족의 반란군을 만나 큰 곤경에 빠진다. 이들은 가후와 행인들을 붙자고 위협한다. 이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가후는 짐짓 꾀를 내어 자신이 단영(段潁)의 외손자인 척 연기한다. 참고로 단영은 당대 한조정의 태위를 지내던 자로써, 특히 그 위세가 서쪽 변방을 진동시키고 있어 오랑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가후 스스로 자신의 시체를 따로 묻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자기 집안에서 후하게 자신의 시체를 사갈 것이라고 일침을 놓기에 이르니, 어지간한 저족의 무리들도 다른 행인들은 모두 살해하였지만 가후만은 쉽사리 해치지 못했다. 그리고는 서로간에 맹약까지 맺어가며 가후를 곱게 풀어주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살펴보건대, 어려운 상황에 닥쳐 기민하게 대처하는 가후의 임기응변은 여태후의 치하에서 보여주었던 진평의 기략과 견주어보아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 같다.
2. 시류를 꿰뚫는 혜안
무릇 임기응변이란, 세상의 흐름을 제 손바닥 보는 듯한 안목이 갖춰져야 실효가 있게 마련이다. 만약 이를 알지 못하고 섣부른 기략을 펼친다면, 자칫 부메랑이 되돌아오듯 책략을 펼친 자신에게로 재앙이 몰려들 뿐이다. 가후는 이 책략이 주는 양날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고, 그 뜻을 일평생 가슴속에 간직하고자 했던 듯 하다. 이런 모습이 역사 속에 처음 나타난 것이 바로 동탁이 살해된 직후의 때다.
이 당시 가후는 태위의 속관인 토로교위로서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의 휘하에 있었다. 그런데 왕윤 일파가 동탁과 우보 등을 모두 살해하자, 창졸간에 지도자를 잃게 된 동탁의 군대는 큰 혼란을 맞게 된다. 그래서 이각 곽사 이하 여러 교위들은 군대를 해산시키고 서둘러 귀향하고자 했다. 이때, 가후가 나서 그들을 제지하고 이해득실을 따진 다음 『국가를 받들고 천하를 평정한다(奉國家以征天下)』는 명분아래 장안 공격을 제의한다. 가후의 진언을 듣고 깊이 공감한 이각 일파는 그 말을 실천에 옮겼으므로, 이각 등이 왕윤 일파를 제거하였음은 물론이요, 황제를 붙들어두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모두가 사태를 흐림없이 명찰한 가후의 공로이므로, 정권을 장악한 이각 등은 그를 생각하여 제후에 봉하고자 했지만, 가후는 한사코 이를 사양한다. 그래서 이각 등은 대신에 가후에게 상서의 벼슬을 맡겼고, 가후는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며 많은 일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각 등의 전횡이 그치지 않자, 황제의 도주를 기회 삼아 벼슬을 버리고 같은 군 출신인 회음의 단외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오래지 않아 단외가 인물이 아님을 간파하고 남양의 장수와 접촉해 그 군문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가후는 가족을 단외에게 맡기면서 이것이 자신과 가족이 모두 안전하게될 길이라 호언하였는데, 실제로도 그러하였으니 이 또한 가후의 신묘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장수의 휘하에 들어가서 가후는 물 만난 고기마냥 대활약을 펼친다. 일전에 장수는 조조와의 사이가 틀어져서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후는 유리한 국면의 도모를 위해 유표와의 화친을 주선하여 조조와의 대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조조군이 내침하는데, 조조는 복병을 두고서 후퇴하는척하며 장수의 군대를 유인하였다. 이때, 장수는 가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나섰다가 크게 낭패를 보고만다. 하지만 가후는 방금 패하고 돌아온 장수에게 재차 싸울 것을 독려하여 큰 전과를 올리게 한다. 이로써 가후는 장수의 모든 신임을 한 몸에 받음과 동시에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하북대전의 시즌이 무르익어가자 가후는 장수에게 이런 우여곡절이 있음에도 볼구하고 원소의 화친 사절을 거절하게 하고 원수인 조조에게 붙으라며 권유한다. 가후를 전적으로 신뢰하던 장수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조조에게 귀순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장수측에서는 만전지책을 얻고 조조측에서는 천하의 신의를 얻게 되었으니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가후의 이러한 맹활약은 조조의 진중에서도 이어졌다. 대전을 앞두고 망설이던 조조에게 대기의 결단을 촉구하여 마침내 관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리고 형주 정복 직후에는 덕치를 강조하며 적벽전을 반대하는 식견을 보였고, 대 마초전인 관서전투때에는 갖은 이간책을 내놓아 조조군 승리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일로부터 정세와 인물을 두루 살필 수 있었던 가후의 뛰어난 혜안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말년에 가서 위문제(魏文帝) 조비(曺丕)가 남진(南進)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덕치를 강조하며 반대의 의견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릉 방면으로 군대를 내었지만 결국에는 대다수의 사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참패를 당하였으니, 시들지 않은 가후의 혜안을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3. 정론을 펴는 능변가
대개 모사라고 하면 계락을 꾸미는 사람들을 일컫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해서인지 세상 사람들은 모사라고 하면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방법론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탈피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무의식중에 곧잘 이분법적 등식으로 사람을 판단해 나누려는 딜레마에 빠지고는 한다. 아마도 가후가 이러한 케이스로 해서, 마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오해받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배송지의 말로부터 모사란 두 가지의 부류로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배송지가 평한 바대로 청운지사(靑雲之士)라 할만한 장량의 부류라 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야광에 대한 증촉의 무리로 비유되어지는 진평의 부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의 부류로는 순욱과 순유를, 뒤의 부류로는 정욱과 곽가를 곧잘 일컫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가후는 삼국지에서 순욱·순유와 함께 같은 전(傳)으로 꾸며져 있지만, 세상의 많은 이들은 가후를 정욱이나 곽가와 같은 부류로서 취급하는 실정이다.
가후가 비록 굳은 절개를 지녔다거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까지 충성을 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더라도, 의견을 내야할때는 도리에 맞는 정론을 펼쳤으므로 최소한 정욱·곽가와 같은 진평의 부류라고 보기엔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모습은 이각 등과 더불어 대사를 일으켰을 때에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이각 등이 대사를 이루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 내부적으로 수뇌부 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가후가 나서서 도리에 맞게 그들을 꾸짖었으니, 대부분 가후의 말을 따랐다. 그래서 이각 등은 가후와 친하게 지냈지만 또한 언제나 도리에 맞게 말을 하는 가후였으므로 그를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루는 이각이 장안에서 곽사와 대규모의 권력다툼을 일으키게 되자, 좀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 황제를 자신의 군영에 가두고자 했다. 이 일을 가후에게 상의하니, 가후는 천자를 위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엄중히 타일렀다. 하지만 인물이 아니었던 이각이었으므로 이를 듣지 않았다.
황제가 도주했을 즈음, 분노한 이각은 자기가 싫어했던 공경들을 살해하고자 했다. 이때도 가후가 나서서 도리에 맞게 따지니, 이각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각 등은 그릇이 무척 작은 인물들로서 늘상 권력다툼을 하였다. 도중에 번조가 죽기에 이른 것은 치열한 권력다툼의 산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상황에서도 가후가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던 연유는, 바로 그가 정론에 입각해 논지를 펼쳤던 능변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예는 조비가 오관중랑장 시절에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할 때에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조비의 물음에 가후가 대답하기를, 덕행과 배려를 중시하면서 매사 게으름을 삼가하고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건데, 가후가 비록 모사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숱한 계략을 내기는 했지만, 적어도 삶의 도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때만은 정론을 고집했던 능변가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4. 은거와 출세를 동시에 지향한 처세술
전술한 바와 같이, 가후란 인물은 책략이 주는 양날의 의미에 정통했었던 사람이다. 나서야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았고,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공을 다투지 않았으며, 가급적 매사를 삼가고 사양하여 위로는 군주의 역린(驛鱗)을 건드리지 않았고 밑으로는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가후가 정론에 입각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저에 이렇게나 조심스러웠던 처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각 등과 더불어 대사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고관대작을 사양한 행동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평소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고, 자식들의 혼례에 있어서도 권문세족과는 전혀 연을 맺지 않았다는 점은 이러한 평소 행실의 산물이라할 만 하다.
가후는 본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고집부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것은 고금 이래로 많은 지식인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인데, 자신이 내었던 의견이 받아지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무척이나 섭섭해하고 원망스러워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 친함마저 끊어지기에 이른다고도 하니, 이것은 분명 골치 아픈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가후가 이에 대한 오류를 회피하려했다는 점에 있어서 유독 지나친 감이 없지 않으므로 그로 인해 그의 절개나 신념이 옅어 보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처신이 유연한 대인관계 형성에 있어서는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군주와의 의사소통에서는 더욱 탁월하여서 당장 자신의 의견이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군신의 관계가 소원해지지는 않았다. 이각 곽사 등과 장수 그리고 조조에게서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내었던 과정들이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가후가 자신의 정확한 혜안을 신뢰함과 동시에, 언젠가는 자신의 말을 가납(嘉納)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가후는 사교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의 지혜 주머니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不結高門, 天下之論智計者歸之)은 이를 크게 반증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만한 점은, 가후가 상당히 주위파악에 능했다는 점이다. 저족과의 만남에서 재빠른 상황판단을 내린 것도 그렇거니와, 단외에게 의지했을 때도 그 이면의 본심을 정확히 파악해 환란을 피한 것도 아마 이러한 점이 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장안의 왕윤 등이 거사를 일으켜 양주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고 호언하였을 때, 가후가 재빠른 기략으로 대처하였던 점은 상당히 눈부신 점이다. 물론, 이로 인해 삼국지의 주를 쓴 배송지로부터 크게 힐난을 받게 되지만, 당시 장안의 새 정부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선처를 베풀었다면 사태가 과연 그리 진행되었을까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드려보고 싶다.
가후는 자신의 생각을 개진함에 있어서 이각이나 장수와 같이 신흥세력일 경우에는 정론에 입각하여 당당히 주장하였고, 조조와 같이 가닥이 잡힌 세력일 경우에는 간접화법에 입각하여 조심스럽게 의견을 펼쳤다. 어쩌면 세상사는 이치는 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별들이 밤하늘을 일주하는 중에 북극성에 대한 방향이 언제나 달라지듯이, 사람이 처하는 관계나 정황도 또한 언제나 변하는 법이니... 가후는 이와 같은 연유로 항시 주위의 형세에 대해 주시하였고 그때마다 적절히 잘 대처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던 진정한 지자(知者)
논어 옹야편 21장에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子曰 : 知者는 樂水하고 仁者는 樂山하며 知者는 動하고 仁者는 靜하며 知者는 樂하고 仁者는 壽하니라. (공자가 말했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자는 움직이고 인자는 고요하며,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산다.」』
이 말은 곧 知者의 부류와 仁者의 부류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성격과 성향을 서로 비교 대조한 문장이다. 知者는 유연한 인간 관계 속의 지혜로움을 얻기 위해 언제나 동적인 마음 속에 있기를 즐긴다. 이에 반해 仁者는 천명(天命)을 얻기 위해 고요한 마음 속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知者는 모든 것을 구분하고 규정지어 그 사이의 지식을 얻으려하고, 仁者는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여 자신을 수양하며 道를 닦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仁者도 지혜로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같은 편(篇) 속의 24장에서『군자는 가 보게 할 수 있으나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속일 수는 있으나 멍청하게 만들 수는 없다.』라는 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주안점은 바로 仁者와 知者가 가지는 각자의 본래 마음가짐을 살펴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말에 따라 굳이 가후를 따져본다면, 知者의 부류에 속하게 된다. 그는 우리(We)라는 테두리 속에 자신(I)과 자신이 아닌 사람(You)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했다기보다, 자신과 남 사이에 적정한 거리를 두며 그 속에서 유연한 인간관계를 다지는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이상적 정치가(君子)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기에, 그다지 중한 대우를 받지 못 했다. 그 단적인 예로, 순욱별전에 실려있는 진무제(晉武帝;司馬炎)와 (晉臣)순욱과의 대화에서 그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위문제(魏文帝;曺丕)가 가후를 삼공에 임명한 것에 대해 오(吳)의 손권이 비웃었다는 점을 들며 위문제의 인선 및 가후의 됨됨이를 비꼬았던 것이다.
가후의 처세는 물처럼 유연했지만 산과 같이 품이 넓다거나 정의를 실현하는 투사다운 기질이 거의 없었으므로, 중히 평가받지 못 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자의 이상적 모델과 멀다고 해서 그를 가벼이 취급하는 것은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가후가 위기를 맞이하여 보신(保身)을 위해 책모를 펼치기는 하였지만, 그 심중에는 언제나 정도(正道)를 견지하였으며 논의를 펴야할 적에는 가급적 정론(正論)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는 분명 사회정의를 위한 투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결코 밀고자나 간신배의 무리는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를 지나치게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후는 보신을 위해 빈틈없는 권모와 임기응변를 구사하였으므로 장량과 같은 청운지사의 부류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그 심지에 정도를 견지하며 가급적 정론을 펴려고 하였기 때문에 진평과 같은 간교한 책모가의 부류로도 분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불합리하게 어느 양단으로 꼬집어 분류하기보다는, 새로이 「은거와 출세를 동시에 지향하며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던 진정한 지자(知者)」로서 평가해본다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삼국지통속연의에서 비춰진 「가후」란 인물은 자신의 책략에 의지해 난세를 헤쳐가는 모사의 전형으로 나오는 듯 하다. 적절한 계교를 내어 자신의 군주를 도울 뿐만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단순히 배를 갈아타는마냥 군주를 옮겨 섬기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한다. 비록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있는 난세에 『적과의 동침』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해도, 가후가 연출해보였던 『어제 적군의 수괴였던 자가 오늘은 나의 주군』이라는 식의 괴행(怪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신 아연케함과 동시에 감탄사를 연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가후란 인물은 알고 싶어하면 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드는 지도 모른다.
가후의 자(字)는 문화(文和)로서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사람이다. 소시적에 그의 재능을 알아주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다만 한양(漢陽)의 염충(閻忠)만이 그를 특이하게 보았고 『장량과 진평의 기이함이 있다.(有良平之奇)』고 평가해주었다. 이윽고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관(郎官;郎)에 오르지만, 질병으로 귀향하게 된다.
가후는 벼슬을 사임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저족의 반란군을 만나 큰 곤경에 빠진다. 이들은 가후와 행인들을 붙자고 위협한다. 이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가후는 짐짓 꾀를 내어 자신이 단영(段潁)의 외손자인 척 연기한다. 참고로 단영은 당대 한조정의 태위를 지내던 자로써, 특히 그 위세가 서쪽 변방을 진동시키고 있어 오랑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가후 스스로 자신의 시체를 따로 묻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자기 집안에서 후하게 자신의 시체를 사갈 것이라고 일침을 놓기에 이르니, 어지간한 저족의 무리들도 다른 행인들은 모두 살해하였지만 가후만은 쉽사리 해치지 못했다. 그리고는 서로간에 맹약까지 맺어가며 가후를 곱게 풀어주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살펴보건대, 어려운 상황에 닥쳐 기민하게 대처하는 가후의 임기응변은 여태후의 치하에서 보여주었던 진평의 기략과 견주어보아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 같다.
2. 시류를 꿰뚫는 혜안
무릇 임기응변이란, 세상의 흐름을 제 손바닥 보는 듯한 안목이 갖춰져야 실효가 있게 마련이다. 만약 이를 알지 못하고 섣부른 기략을 펼친다면, 자칫 부메랑이 되돌아오듯 책략을 펼친 자신에게로 재앙이 몰려들 뿐이다. 가후는 이 책략이 주는 양날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고, 그 뜻을 일평생 가슴속에 간직하고자 했던 듯 하다. 이런 모습이 역사 속에 처음 나타난 것이 바로 동탁이 살해된 직후의 때다.
이 당시 가후는 태위의 속관인 토로교위로서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의 휘하에 있었다. 그런데 왕윤 일파가 동탁과 우보 등을 모두 살해하자, 창졸간에 지도자를 잃게 된 동탁의 군대는 큰 혼란을 맞게 된다. 그래서 이각 곽사 이하 여러 교위들은 군대를 해산시키고 서둘러 귀향하고자 했다. 이때, 가후가 나서 그들을 제지하고 이해득실을 따진 다음 『국가를 받들고 천하를 평정한다(奉國家以征天下)』는 명분아래 장안 공격을 제의한다. 가후의 진언을 듣고 깊이 공감한 이각 일파는 그 말을 실천에 옮겼으므로, 이각 등이 왕윤 일파를 제거하였음은 물론이요, 황제를 붙들어두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모두가 사태를 흐림없이 명찰한 가후의 공로이므로, 정권을 장악한 이각 등은 그를 생각하여 제후에 봉하고자 했지만, 가후는 한사코 이를 사양한다. 그래서 이각 등은 대신에 가후에게 상서의 벼슬을 맡겼고, 가후는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며 많은 일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각 등의 전횡이 그치지 않자, 황제의 도주를 기회 삼아 벼슬을 버리고 같은 군 출신인 회음의 단외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오래지 않아 단외가 인물이 아님을 간파하고 남양의 장수와 접촉해 그 군문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가후는 가족을 단외에게 맡기면서 이것이 자신과 가족이 모두 안전하게될 길이라 호언하였는데, 실제로도 그러하였으니 이 또한 가후의 신묘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장수의 휘하에 들어가서 가후는 물 만난 고기마냥 대활약을 펼친다. 일전에 장수는 조조와의 사이가 틀어져서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후는 유리한 국면의 도모를 위해 유표와의 화친을 주선하여 조조와의 대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조조군이 내침하는데, 조조는 복병을 두고서 후퇴하는척하며 장수의 군대를 유인하였다. 이때, 장수는 가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나섰다가 크게 낭패를 보고만다. 하지만 가후는 방금 패하고 돌아온 장수에게 재차 싸울 것을 독려하여 큰 전과를 올리게 한다. 이로써 가후는 장수의 모든 신임을 한 몸에 받음과 동시에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하북대전의 시즌이 무르익어가자 가후는 장수에게 이런 우여곡절이 있음에도 볼구하고 원소의 화친 사절을 거절하게 하고 원수인 조조에게 붙으라며 권유한다. 가후를 전적으로 신뢰하던 장수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조조에게 귀순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장수측에서는 만전지책을 얻고 조조측에서는 천하의 신의를 얻게 되었으니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가후의 이러한 맹활약은 조조의 진중에서도 이어졌다. 대전을 앞두고 망설이던 조조에게 대기의 결단을 촉구하여 마침내 관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리고 형주 정복 직후에는 덕치를 강조하며 적벽전을 반대하는 식견을 보였고, 대 마초전인 관서전투때에는 갖은 이간책을 내놓아 조조군 승리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일로부터 정세와 인물을 두루 살필 수 있었던 가후의 뛰어난 혜안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말년에 가서 위문제(魏文帝) 조비(曺丕)가 남진(南進)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덕치를 강조하며 반대의 의견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릉 방면으로 군대를 내었지만 결국에는 대다수의 사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참패를 당하였으니, 시들지 않은 가후의 혜안을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3. 정론을 펴는 능변가
대개 모사라고 하면 계락을 꾸미는 사람들을 일컫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해서인지 세상 사람들은 모사라고 하면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방법론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탈피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무의식중에 곧잘 이분법적 등식으로 사람을 판단해 나누려는 딜레마에 빠지고는 한다. 아마도 가후가 이러한 케이스로 해서, 마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오해받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배송지의 말로부터 모사란 두 가지의 부류로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배송지가 평한 바대로 청운지사(靑雲之士)라 할만한 장량의 부류라 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야광에 대한 증촉의 무리로 비유되어지는 진평의 부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의 부류로는 순욱과 순유를, 뒤의 부류로는 정욱과 곽가를 곧잘 일컫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가후는 삼국지에서 순욱·순유와 함께 같은 전(傳)으로 꾸며져 있지만, 세상의 많은 이들은 가후를 정욱이나 곽가와 같은 부류로서 취급하는 실정이다.
가후가 비록 굳은 절개를 지녔다거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까지 충성을 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더라도, 의견을 내야할때는 도리에 맞는 정론을 펼쳤으므로 최소한 정욱·곽가와 같은 진평의 부류라고 보기엔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모습은 이각 등과 더불어 대사를 일으켰을 때에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이각 등이 대사를 이루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 내부적으로 수뇌부 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가후가 나서서 도리에 맞게 그들을 꾸짖었으니, 대부분 가후의 말을 따랐다. 그래서 이각 등은 가후와 친하게 지냈지만 또한 언제나 도리에 맞게 말을 하는 가후였으므로 그를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루는 이각이 장안에서 곽사와 대규모의 권력다툼을 일으키게 되자, 좀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 황제를 자신의 군영에 가두고자 했다. 이 일을 가후에게 상의하니, 가후는 천자를 위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엄중히 타일렀다. 하지만 인물이 아니었던 이각이었으므로 이를 듣지 않았다.
황제가 도주했을 즈음, 분노한 이각은 자기가 싫어했던 공경들을 살해하고자 했다. 이때도 가후가 나서서 도리에 맞게 따지니, 이각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각 등은 그릇이 무척 작은 인물들로서 늘상 권력다툼을 하였다. 도중에 번조가 죽기에 이른 것은 치열한 권력다툼의 산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상황에서도 가후가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던 연유는, 바로 그가 정론에 입각해 논지를 펼쳤던 능변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예는 조비가 오관중랑장 시절에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할 때에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조비의 물음에 가후가 대답하기를, 덕행과 배려를 중시하면서 매사 게으름을 삼가하고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건데, 가후가 비록 모사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숱한 계략을 내기는 했지만, 적어도 삶의 도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때만은 정론을 고집했던 능변가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4. 은거와 출세를 동시에 지향한 처세술
전술한 바와 같이, 가후란 인물은 책략이 주는 양날의 의미에 정통했었던 사람이다. 나서야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았고,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공을 다투지 않았으며, 가급적 매사를 삼가고 사양하여 위로는 군주의 역린(驛鱗)을 건드리지 않았고 밑으로는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가후가 정론에 입각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저에 이렇게나 조심스러웠던 처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각 등과 더불어 대사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고관대작을 사양한 행동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평소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고, 자식들의 혼례에 있어서도 권문세족과는 전혀 연을 맺지 않았다는 점은 이러한 평소 행실의 산물이라할 만 하다.
가후는 본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고집부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것은 고금 이래로 많은 지식인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인데, 자신이 내었던 의견이 받아지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무척이나 섭섭해하고 원망스러워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 친함마저 끊어지기에 이른다고도 하니, 이것은 분명 골치 아픈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가후가 이에 대한 오류를 회피하려했다는 점에 있어서 유독 지나친 감이 없지 않으므로 그로 인해 그의 절개나 신념이 옅어 보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처신이 유연한 대인관계 형성에 있어서는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군주와의 의사소통에서는 더욱 탁월하여서 당장 자신의 의견이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군신의 관계가 소원해지지는 않았다. 이각 곽사 등과 장수 그리고 조조에게서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내었던 과정들이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가후가 자신의 정확한 혜안을 신뢰함과 동시에, 언젠가는 자신의 말을 가납(嘉納)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가후는 사교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의 지혜 주머니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不結高門, 天下之論智計者歸之)은 이를 크게 반증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만한 점은, 가후가 상당히 주위파악에 능했다는 점이다. 저족과의 만남에서 재빠른 상황판단을 내린 것도 그렇거니와, 단외에게 의지했을 때도 그 이면의 본심을 정확히 파악해 환란을 피한 것도 아마 이러한 점이 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장안의 왕윤 등이 거사를 일으켜 양주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고 호언하였을 때, 가후가 재빠른 기략으로 대처하였던 점은 상당히 눈부신 점이다. 물론, 이로 인해 삼국지의 주를 쓴 배송지로부터 크게 힐난을 받게 되지만, 당시 장안의 새 정부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선처를 베풀었다면 사태가 과연 그리 진행되었을까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드려보고 싶다.
가후는 자신의 생각을 개진함에 있어서 이각이나 장수와 같이 신흥세력일 경우에는 정론에 입각하여 당당히 주장하였고, 조조와 같이 가닥이 잡힌 세력일 경우에는 간접화법에 입각하여 조심스럽게 의견을 펼쳤다. 어쩌면 세상사는 이치는 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별들이 밤하늘을 일주하는 중에 북극성에 대한 방향이 언제나 달라지듯이, 사람이 처하는 관계나 정황도 또한 언제나 변하는 법이니... 가후는 이와 같은 연유로 항시 주위의 형세에 대해 주시하였고 그때마다 적절히 잘 대처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던 진정한 지자(知者)
논어 옹야편 21장에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子曰 : 知者는 樂水하고 仁者는 樂山하며 知者는 動하고 仁者는 靜하며 知者는 樂하고 仁者는 壽하니라. (공자가 말했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자는 움직이고 인자는 고요하며,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산다.」』
이 말은 곧 知者의 부류와 仁者의 부류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성격과 성향을 서로 비교 대조한 문장이다. 知者는 유연한 인간 관계 속의 지혜로움을 얻기 위해 언제나 동적인 마음 속에 있기를 즐긴다. 이에 반해 仁者는 천명(天命)을 얻기 위해 고요한 마음 속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知者는 모든 것을 구분하고 규정지어 그 사이의 지식을 얻으려하고, 仁者는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여 자신을 수양하며 道를 닦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仁者도 지혜로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같은 편(篇) 속의 24장에서『군자는 가 보게 할 수 있으나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속일 수는 있으나 멍청하게 만들 수는 없다.』라는 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주안점은 바로 仁者와 知者가 가지는 각자의 본래 마음가짐을 살펴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말에 따라 굳이 가후를 따져본다면, 知者의 부류에 속하게 된다. 그는 우리(We)라는 테두리 속에 자신(I)과 자신이 아닌 사람(You)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했다기보다, 자신과 남 사이에 적정한 거리를 두며 그 속에서 유연한 인간관계를 다지는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이상적 정치가(君子)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기에, 그다지 중한 대우를 받지 못 했다. 그 단적인 예로, 순욱별전에 실려있는 진무제(晉武帝;司馬炎)와 (晉臣)순욱과의 대화에서 그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위문제(魏文帝;曺丕)가 가후를 삼공에 임명한 것에 대해 오(吳)의 손권이 비웃었다는 점을 들며 위문제의 인선 및 가후의 됨됨이를 비꼬았던 것이다.
가후의 처세는 물처럼 유연했지만 산과 같이 품이 넓다거나 정의를 실현하는 투사다운 기질이 거의 없었으므로, 중히 평가받지 못 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자의 이상적 모델과 멀다고 해서 그를 가벼이 취급하는 것은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가후가 위기를 맞이하여 보신(保身)을 위해 책모를 펼치기는 하였지만, 그 심중에는 언제나 정도(正道)를 견지하였으며 논의를 펴야할 적에는 가급적 정론(正論)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는 분명 사회정의를 위한 투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결코 밀고자나 간신배의 무리는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를 지나치게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후는 보신을 위해 빈틈없는 권모와 임기응변를 구사하였으므로 장량과 같은 청운지사의 부류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그 심지에 정도를 견지하며 가급적 정론을 펴려고 하였기 때문에 진평과 같은 간교한 책모가의 부류로도 분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불합리하게 어느 양단으로 꼬집어 분류하기보다는, 새로이 「은거와 출세를 동시에 지향하며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던 진정한 지자(知者)」로서 평가해본다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