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살롱전]에서 낙선이란 오명을 입었던 [피리 부는 소년]은 이제 오르세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는 스페인에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특징 없는 텅 빈 배경에 덩그러니 그려진 왕족의 커다란 초상화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마네의 이러한 감흥은 팡탱 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너무나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필립 4세 때 어느 유명한 배우의 초상화이다.
이 놀라운 회화는 아마도 사람들이 전혀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작품일 것이다. 생기를 띤 남자는 온통 검은색 옷으로 차려입고'배경'이 아닌 단지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거장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마네는 자신의 작업실에 돌아오자마자, 벨라스케스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로 영웅적인 느낌을 살린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몇 점 완성했다.
텅 빈 공간 속에 주인공만 홀로 있는 그림이었다. 당시 마네의 작업실은 파피니에르 병영 근처의 귀요트 거리에 있었는데,
황실 근위군의 소년 병사 하나가 마네의 그림을 위해 군복을 입은 채 포즈를 취해주었다.
마네는 회색을 바탕으로 한 매우 간결한 구도를 선택했다. 인물을 그릴 때 나타날 수 있는 풍속화 분위기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극도로 단순화된 그의 초상화는 당시 바스티앵르파주가 그린 감상적인 어린이 초상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로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마네는 자신의 작품이 [살롱전]에서 거부된 사실에 실망하여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은 다른 그림들과 함께 이 그림을 두 달 동안 아틀리에에 걸어놓았다. 마네에게 쏟아지는 혹평들 가운데 에밀 졸라만이 유일하게 마네를 옹호했다.
졸라는 1866년 5월 7일 [레벤느망]지에 [피리 부는 소년]에 대해 무게를 실어 다루었다."(중략) 올해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피리 부는 소년]을 손꼽을 수 있다. 회색빛 바탕에 소년 음악가의 모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중략) 소년은 정면을 바라보며 피리를 불고 있다. 이보다 더 단순한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 작품만큼 강력한 효과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 속에서 뭔가 특별한 진실과 활력이 느껴진다. 온갖 기교로 현실을 모방하기보다 본질에 집중해 화폭을 넉넉하게 사용했다. 부드러운 붓놀림은 18~19세기에 유행하던 에피날 채색판화 작품들처럼 인물의 형체를 평면적으로 가볍게 표현했다. 한쪽 발에 중심을 두고 서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소년에게서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발 뒤로 보이는 그림자는 소년의 발이 바닥에 닿아 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또한 소년의 앳된 얼굴과 대조를 이루는 정갈한 군복은 관람자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흰색 멜빵에 달려 있는 금색 악기집은 어두운 색의 윗저고리와 붉은색 바지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마네는 1860년대에 들어 파리에 공연하러 온 음악가들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 작품들은 모두 소재와는 달리 인물이 침묵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이 작품 속 피리 부는 소년 역시 입술을 다문 채 피리를 부는 척하며 관람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당시 피리는 날카로운 소리로 보병들을 전투로 이끄는 역할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같은 상황이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소년의 손만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물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우수가 느껴지는데, 마네가 그린 다른 음악가의 초상화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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