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다게르(Louis Jacques Mande'Daguerre)가 은판 사진(銀板寫眞:다게레오타입) 기술을 발표한 것은 1839년 8월 19일이었다. 그 날부터 한동안 파리의 안경점들은 사진용 렌즈와 기자재를 주문하려는 사람들로 법석대는 일종의 열광적(panic) 현상을 보였다.
사진의 열기가 유럽을 휩쓰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 그림은 대단한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의 역사 화가 폴 들라로시는 ‘이로써 오늘부터 그림은 죽었다!’ 고 외쳤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맞았다.
그림은 르네상스 이래 수세기에 걸쳐 눈에 보이는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몫을 담당해 왔고, 화가들은 사실(寫實)적인 기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수련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 노력이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많은 화가가 위기감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사진의 등장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은 화가가 적지 않았다. 특히 세밀 초상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들은 스튜디오 사진의 보급과 함께 직업을 잃어버리거나 사진가로 전향하거나 아니면 사진 스튜디오의 배경을 만드는 소도구 담당자로 전락하는 등 사진의 등장 이후 약 10년 사이에 수백 명의 화가가 직업을 바꿔야 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파리에서는 1849년에 약 10만 장의 초상 사진이 촬영되었으며 런던의 사진 스튜디오는 수년 사이에 12개에서 150여 개로 늘어났다고 하니, ‘초상’ 이라는 장르에서 사진이 거둔 승리는 의심이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림(회화)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을 회화의 보조 수단으로 적극 이용한 화가가 많았던 것이다. 예컨대 사진을 보며 초상화를 그리면 모델에게 오랜 시간 무리한 포즈를 강요할 필요가 없었고 화가 역시 서둘러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앵그르나 들라크루아는 그 점을 이용했다. 또한 드가와 같이 맨눈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순간적인 움직임을 사진에서 배운 화가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진 덕분에 그림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긴시로의 명화의 수수께께 中
그 스스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드가는 머이브릿지의 사진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말을 직접 관찰하기 위하여 경마장을 자주 찾았다. 그는 말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해부학적인 탐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결과 그가 그린 경주마들은 살아 움직이는 긴장감과 균형 잡힌 우아한 자태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다. 그는 말 자체뿐만 아니라 말을 조련하는 기수의 다양한 자세, 말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모습들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카메라로 한 순간 한 순간을 즉석에서 촬영한 듯, 화면 오른쪽에는 마차와 실크 햇을 쓴 신사가 캔버스 밖으로 잘려져 나갔다. 이러한 의도적인 구성은 경마장의 순간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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