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Delacroix)
1832년 5월 파리에서는 콜레라가 발생해 약 2만 명이 사망했다. 1년 전 리용에서 일어난 견직공들의 반란 때 1000여명을 사살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내각 수반 페리에 역시 이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대도시의 위생은 형편없었고 이는 콜레라 같은 대재앙을 불러오곤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골목길을 정리해 대로를 뚫고 무엇보다 수인성 전염병을 막기 위해 하수도를 정비하는 일은 시급한 일 중 하나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흘리고 다니는 엄청난 양의 말똥도 골칫거리였다. 도시 계획을 해야 한다는 명분은 확실했다.
하지만 동기야 어떻든 파리의 골목길을 없애려는 제2제정 당시 오스만의 도시 계획은 민중의 시위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했다.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파리의 골목이 폭동과 혁명의 골목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뒤로 노트르담 성당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바스티유에서 출발해 현재 파리 시청 쪽에 도달한 시민군을 그린 것 같다.
이 그림은 1831년 살롱 전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다. 새로 즉위한 시민왕 루이 필립은 즉석에서 그림을 구입했고 그림은 당시 생존 중인 작가들의 작품을 보관하던 현대 예술 미술관인 뤽상부르 궁에 전시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림의 선동적인 분위기를 두려워한 인사들은 그림을 즉각 철거해 수장고에 처박아둔다.
●루브르 박물관 소장
들라크루아는 이 혁명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단지 자유주의자였고 굳이 지지한다면 공화파를 지지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7월 26일에서 28일까지의 이른바 ‘영광의 3일’로 불리는 7월 혁명을 그린 이 그림은 우의적인 그림일 뿐이다. ■ 글 · 정장진 · 문학평론가ㆍ고려대 불문과 강사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골목이 없어지면 ‘바리케이드’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군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실핏줄 같은 골목길을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던 시민들에게 골목길은 진지이자 공격 루트였고 또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는 퇴로이기도 했다. 파리는 혁명이 안 일어날래야 안 일어날 수 없는 도시였다.
이 그림은 낭만주의 시대에 그려진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이면서 포스터나 광고 등에 자주 이용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한 외국계 시중 은행에서 자사의 신용카드를 광고하며 이 그림을 패러디해 사용한 적이 있다.
‘새로운 시대’를 두 번씩이나 강조한 광고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찾아냈고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던 프랑스 삼색기 대신 카드를 펄럭이게 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뿐만인가. 황금색 골드 카드를 하늘을 나는 융단처럼 펼쳐놓고 그 위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탑승시켰다. 요즈음 낙하산도 없이 이 황금 융단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등장하게 될 가브로슈 같은 소년, 실크 햇을 쓴 부르주아, 에콜 폴리테크닉 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풍만한 젖가슴을 풀어 헤친 채 나를 따르라며 앞으로 돌진하는 여인. 이들은 실제로는 혁명의 현장에 잘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들라크루아는 국민의 단결을 바라고 있었고 이 취지는 바로 루이 필립의 그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이 필립은 들라크루아의 이 그림만이 아니라 엄청난 사재와 국가 예산을 투입해 베르사이유 궁을 역사 박물관으로 꾸미고 수천 점의 역사화를 구입하거나 새로 그리게 했다. 가로 길이만 3미터가 넘는 이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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