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만나는 세계의 현대미술 ① 앤디 워홀과 팝아트
“나는 미술공장의 CEO”
코카콜라·수프 깡통·마릴린 먼로… 싸구려 이미지를 예술로 찍어내
낙찰 총액 피카소 이어 2위… 국내서도‘자화상’은 외국작 최고가인 27억원
- 세계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외국 현대미술 거장들의 전시가 잇따르고, 경매에서도 외국 작품의 출품 비율이 늘고 있습니다. Weekly Chosun은 ‘한국에서 만나는 세계의 현대미술’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조선일보 미술담당 이규현 기자가 서울을 비롯해 국내의 공개된 장소에 들어와 있는 세계적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가고, 그 작가를 둘러싼 현대미술 경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서울 청담동 호텔 프리마의 여성사우나 & 휘트니스에는 남자들도 출입 가능한 구역이 하나 있다. 3층 레스토랑인데, 여기엔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년)의 실크스크린 판화‘덴마크 여왕 마가렛’이 걸려 있다. 마가렛 여왕은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워홀이 즐겨 그렸던 스타들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워홀이 죽기 2년 전인 1985년에 제작한 판화로 작가의 서명이 들어 있다. 이 호텔 옴니버스홀 로비에는 ‘마릴린 먼로’와 ‘꽃’이, 에메랄드홀 로비에는 ‘자화상’ 시리즈 5점이 걸려 있는데, 이 판화들에 워홀의 서명은 없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서명이 없거나 작가의 사후(死後)에 찍은 판화가 정식으로 미술시장에서 거래될 만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하지만 워홀의 경우 최근 인기가 하도 올라서 서명 없는 판화조차 시장에서 인기리에 거래가 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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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텔 프리마 에메랄드홀 로비에 있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판화 ‘자화상’.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사실 워홀이 즐겨 쓴 실크스크린 판화 방식은 팝아트가 지향하는 ‘민주적인 미술’의 특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다. 미술작품을 기계적으로 대량생산해서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워홀은 자기 작업실을 스스로 ‘공장(factory)’이라 불렀고, 조수들이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작품을 찍어내게 했다. 미술작품이 마치 코카콜라나 캠벨수프 통조림처럼 대량생산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또 미술작품은 작가의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므로 작가가 직접 손을 댈 필요가 없다며,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I want to be a machine)”고 선언하기도 했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아하는 외국 화가로 으레 밀레, 피카소, 반 고흐 등을 꼽았다. 요즘은 아마 앤디 워홀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적잖을 것이다. 우선 전반적으로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고 최근 국내외에서 앤디 워홀 관련 뉴스가 워낙 많이 나와서 그의 이름이 익숙해진 것도 이유가 된다. 특히 2007년은 워홀의 타계 20주년이었기에 삼성미술관 리움 등 국내외 주요 전시장에서 특별전시들이 열렸고, 경매에서도 기록가 경신 행진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워홀이 대량생산방식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크스크린으로 인쇄된 뒤 워홀이 직접 붓으로 덧칠해 마무리를 한 것은 값이 천정부지로 뛴다는 사실이다. 이런 작품들은 작년 한해 동안 국내외 미술경매에서 줄줄이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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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옥션에서 27억원에 낙찰된 실크스크린화 ‘자화상’.
- 2007년 봄 뉴욕 크리스티 현대미술 경매에서 하루 저녁에 잇따라 작품 두 점이 종전 기록을 깬 게 가장 큰 사건이었다. 노란색 톤의 마릴린 먼로 그림인 ‘레몬 마릴린’(1962년)이 2800만달러(약 256억원)에 팔렸고, 실제 일어난 교통사고 사진을 토대로 만든 ‘그린 카 크래쉬(Green Car Crash·1963년)’가 7200만달러(약 660억원)에 팔려 워홀 작품 중 최고 기록을 세웠다. 국내 시장도 워홀 붐이었다. 9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실크스크린화 ‘자화상’(30.5×30.5cm·1986년)이 27억원에 낙찰돼 국내에서 경매된 외국 작품 중 최고 기록을 세웠다.
앤디 워홀은 광고와 삽화를 그리던 상업디자이너 출신으로, 1960년대 미국 팝아트를 이끈 중심인물이다. 코카콜라, 캠벨수프 깡통,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처럼 이미 세상에 널려 있는 이미지를 도둑질해서 조금 가공만 했고, 기계처럼 찍어내는 실크스크린 방식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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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크스크린 판화 ‘덴마크 여왕 마가렛’
- 서양미술사에서 팝아트의 시초는 사실 영국 작가 리처드 해밀턴의 1956년 콜라주 작품 ‘오늘날 가정을 특이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무엇인가?(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로 본다. 잡지에서 오려낸 반라(半裸)의 남녀 모델 사진, 축음기 사진 등을 덕지덕지 붙인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현대인들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키치(Kitsch·대중에게 익숙한 싸구려 이미지)’를 고급 예술의 소재로 당당하게 쓴 기념비적 작품이다.
하지만 팝아트가 대중에게 폭발적 호응을 얻은 것은 1960년대 미국 작가들에 의해서다. 미국은 코카콜라, 마릴린 먼로 등 대중문화의 종주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런 싸구려 이미지가 상류층도 즐기는 고급예술의 소재로 사용된다는 점은 바로 미국이 자랑하는 민주주의 정신과 맞아떨어졌다. 이런 팝아트의 정신과 제작방식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수많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워홀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태연하게 예쁜 미술로 만드는 도발적 행위도 했는데, 이 역시 오늘날 작가들이 하고 있는 작업이다. 워홀의 최고 기록을 세운 ‘그린 카 크래쉬’가 바로 실제 일어난 자동차 사고 사진을 폴라로이드처럼 여러 장 이어 붙이고 녹색 톤으로 처리한 작품이다. 끔찍한 사고 장면을 장식적 그림으로 바꿔 낯설게 만드는 그의 ‘재난 시리즈(Death and Disaster Series)’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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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크스크린 판화 ‘마릴린 먼로’와 ‘꽃’
- 워홀은 이처럼 당시로서는 이상해 보이는 획기적 시도를 많이 했는데, 결국 미술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꾼 계기가 됐다. 이런 미술사적 중요성 때문에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작가들은 비싸다. 국제 미술시장 분석기관인 아트프라이스닷컴(artprice.com)은 매년 세계 미술경매에서 거래된 작품의 낙찰가격 총액을 작가별로 매겨 순위를 내는데, 워홀은 2005년과 2006년 연속 2위에 올랐다. 1위는 피카소다.
얼마전 삼성그룹이 샀느냐 안 샀느냐 문제로 화제가 됐던 그림 ‘행복한 눈물(Happy Tears·1964년)’의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1997년)도 앤디 워홀과 함께 1960년대 미국의 팝아트 흐름을 이끈 중심인물이었다. 빨간 머리의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웃고 있는 간단한 그림인 ‘행복한 눈물’이 2002년 11월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환율로 약 86억5000만원인 715만9500만달러에 낙찰된 이유 역시 팝아트의 미술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워홀에게 코카콜라와 마릴린 먼로가 있었다면 리히텐슈타인에게는 싸구려 만화가 있었다. 그는 만화나 잡지사진의 한 컷을 변형하고 인쇄물 망점이 흉해 보일 정도까지 크게 확대한 뒤 캔버스 위에 그대로 그렸다.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같은 팝아티스트들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싸구려 복제 상품에 둘러싸여 사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 풍자화가였다. 오늘날 미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경향이 바로 이들이 불 붙여 반세기 가까이 꺼지지 않고 있는 ‘팝아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kyuh@chosun.com
출처 : Artist 엄 옥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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