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의 단단한 빗장이 풀린다.
2009년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동통신 재판매법안)이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해
우리나라에도 ‘제4 이동통신사(이하 통신사)’가 탄생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은 이동통신사업(MNO)에 신규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이 꽉 잠겨 있었다.
미국, 유럽, 일본에는 기존 통신사로부터 망 설비만 빌려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른바
‘가상 이동통신사업자(MVNO·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s)’가 수십, 수백 개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은 전무하다. ‘IT 강국’이라는 한국에 MVNO 사업자가 없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모바일 시장은 ‘다이내믹 코리아’가 아니었던 셈이다.
유럽은 2세대 이동통신 시장 때부터 MVNO 정책을 적극 장려해 사업자 간의 경쟁이 활발해지고 통신료 인하라는 효과를 얻었다.
가상 이동통신사업자 허용으로 경쟁 촉진
이제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이르면 6월부터 새로운 이동통신업체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MVNO가 SK텔레콤, KT, LG텔레콤이라는 오래된 3강체제에 균열을 가하고 통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지,
아니면 3강의 든든한 자금력과 로비에 밀려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것인지 대한민국 이동통신 서비스는 중대 기로에 섰다.
MVNO 도입의 의미는 한마디로 ‘경쟁 촉진’이다.
그동안 정부는 이동통신 서비스에 관한 한 경쟁보다 규제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신규 사업자의 진입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기존 사업자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대신 통신망 구축에 대규모 투자를 유도했던 것. 이 같은 규제 정책 덕분에 사업자들은 망에 투자한 비용을 뽑고도 남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우선순위가 사업자 보호에서 소비자 보호로 바뀐다.
MVNO 도입으로 신규 사업자가 늘어 경쟁이 증가하면 소비자는 요금 인하 혜택을 볼 수 있다.
MVNO는 ‘가계통신비 20% 인하’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과도 맞닿아 있다.
유럽 전역에는 약 300개의 MVNO 사업자가 활동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MVNO 시장 점유율이 30%에 달하며 노르웨이, 영국, 핀란드 등도 15~20%를 기록 중이다.
2002년부터 MVNO 진입이 본격화한 미국의 경우 약 55개의 MVNO 사업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7년 말 기준 미국의 MVNO 가입자는 1840만명으로 전체 이동통신 가입자의 7%를 차지한다.
일본에선 약 30개의 MVNO 사업자가 활동 중이다.
노키아, 델 등 단말기 제조업체도 MVNO 사업 진출을 선언해 눈길을 끌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MVNO 업체는 ‘괴짜 CEO’ 리처드 브랜슨으로 유명한 버진 그룹의 계열사 버진 모바일(Virgin Mobile)이다. 영국의 버진 모바일은 1999년 세계 최초로 MVNO 상업화에 성공해 서비스 개시
5년 만에 500만 가입자를 확보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미국에 진출, 또다시 500만 가입자를 유치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버진 모바일은 영국에선 T모바일의 망을, 미국에선 스프린트넥스텔의 망을 빌려 쓴다.
버진 모바일의 성공 비결은 틈새시장 공략이다.
여타 단말기와 다른 요금제, 차별화한 콘텐츠로 버진 모바일만의 시장을 창출했다.
‘USA 투데이’는 버진 모바일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로 ‘정확한 타깃’과 ‘역발상’을 꼽았다.
AT·T, 버라이즌 같은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장기 계약을 유도하는 데 반해
버진 모바일은 월 단위, 심지어 1분 단위로 쓸 수 있는 요금제를 마련했다.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 MVNO 사업자도 등장할 듯
부담 없는 요금제는 수입이 없는 10대 청소년에게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통신업계에서 가장 돈 안 되는 청소년층을 집중 공략하고, 고객을 잡아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지하고 싶을 때 언제든 해지할 수 있게 한 역발상으로 성공한 것이다.
때마침 10대 이동통신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버진 모바일의 이익은 짭짤했다.
한국판 버진 모바일을 꿈꾸는 기업들의 MVNO 출사표도 줄을 잇고 있다.
온세텔레콤은 법이 통과되기 2년 전부터 MVNO 사업을 준비했다.
법이 통과된 뒤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매출 1조, 200만 가입자 유치’라는 장기 목표를 공식화할 정도로
MVNO 사업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온세텔레콤은 단독으로 시장에 진출하는 방안과 BC카드, 이마트 등 금융업체나 유통업체와 손잡는 방안을 함께 검토 중이다.
온세텔레콤은 국제전화, 유선전화, 무선인터넷 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사업자로 연매출 규모는 약 4000억원이다.
KT 재판매 회사인 에넥스텔레콤 역시 MVNO 사업 진출 1순위로 꼽힌다.
이 업체는 2004년 구 KTF와 망 임대계약을 체결하고 ‘한겨레폰’ ‘순복음폰’ 등
특화 휴대전화를 내놓는 전략으로 16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에넥스텔레콤은 본격적인 MVNO 진출로 2011년까지 가입자 수를 40만명까지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상파 못지않은 시청자 기반을 자랑하는 케이블 방송 진영도 제4 통신사 설립을 검토 중이다.
예컨대 케이블 방송 사업자들이 연합해 서비스하는 형태다.
케이블 방송 가입자 규모가 1800만명에 이르기 때문에 망 임대 가격만 합리적이라면 승산 있는 사업이라는 설명이다.
SK텔레콤, KT, LG텔레콤 3강이 IPTV를 내세워 자신의 진영으로 침범해오는 게 무엇보다 부담스러웠던 케이블 TV로선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통신사업자들이 이동전화, IPTV, 인터넷전화, 초고속 인터넷을 묶음으로 판매해 소비자를 붙잡아두는 것처럼
케이블 TV 진영도 비슷한 결합상품을 출시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IT업계에서 그야말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다.
케이블 방송 진영은 MVNO 방식으로 이동통신사업 경험을 쌓은 뒤 주파수를 할당받아 (가상이 아닌)
직접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아마존의 전자책 ‘킨들’이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아마존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서점들이 몰락했던 것처럼 킨들은 종이책의 운명을 흔들고 있다.
킨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별도의 비용 부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신문과 잡지, 책을 무선으로 내려받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바로 MVNO 사업자다.
아마존은 스프린트넥스텔의 무선망을 빌려 데이터를 전송한다.
이를 음성통신 사업자와 구분해 데이터 MVNO라고 한다.
국내에도 조만간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 MVNO가 등장할 전망이다.
교보문고는 KT와 협력해 아마존과 유사한 전자책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교보문고는 콘텐츠 확보와 서비스 플랫폼 구축 및 운영을 맡고, KT는 통신망 제공·요금제 기획·망 연동 테스트 등을 지원하게 된다. 전자책 단말기는 삼성전자와 가전업체로부터 공급받을 계획이다.
LG텔레콤과 인터넷 서점업체 인터파크도 전자책에 관한 제휴를 맺었다.
인터파크는 올 2월 전자책 전용 단말기를 출시하는데 LG텔레콤의 3G 이동통신망을 이용해
신문, 잡지, 사전, 도서 등 각종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인터파크가 데이터 MVNO 사업자가 되는 것이다.
엔타즈라는 콘텐츠업체 역시 데이터 MVNO를 준비 중이다.
그동안 모바일 콘텐츠업체는 통신사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간접판매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통신사는 데이터통화료와 정보이용료를 모두 챙긴다.
엔타즈는 KT에 망 사용 대가를 지불하고 콘텐츠 서비스는 직접 제공할 계획이다.
콘텐츠 사용 요금은 엔타즈가 별도로 책정한다.
차별화 전략과 망 임대 가격이 연착륙의 관건이다.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업계도 MVNO 사업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사고 차량 모니터링 서비스, 교통안내 서비스 등 신규 서비스로 새로운 매출을 일으킬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대형 할인점들은 자체 모바일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면 통신사에 떼어줄 결제 수수료를 줄일 수 있어
MVNO 사업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MVNO 사업이 성공하려면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유럽과 미국에서 MVNO 성공 사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초기 시장부터 MVNO가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동통신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우리나라에선 개별 사용자의 특성을 최대한 고려한 고도의 서비스 전략과
효율적인 경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MVNO가 성공하기 어렵다.
최근 북유럽에서도 시장 포화로 가격경쟁 압박을 견디지 못한 MVNO들이 기존 이동통신사업자에
피인수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데이터 MVNO 사업도 쉽지만은 않다.
미국 스포츠 채널의 대명사 ESPN은 스포츠 콘텐츠를 모바일로 제공하기 위해 데이터 MVNO에 진출했으나 서비스를 중단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 디즈니도 10대와 부모를 동시에 겨냥하는 가족형 MVNO 사업을 내놓았지만, 역시 실패했다.
MVNO 사업에 출사표를 던진 업체들은 사업 진출에 앞서 한 가지 단서를 공통적으로 달았다.
기존 통신사업자들의 망 재판매 대가(망 임대 가격)가 적정한 수준에서 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CJ헬로비전, 에넥스텔레콤 등은 “MVNO 사업 진출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면서도
“원가에 기반을 둔 적정한 망 재판매 가격이 산정되는 것이 사업 진출의 전제”라고 입을 모았다.
지나치게 높은 망 임대료는 통신사업자만 배불리고 통신료 인하와 모바일 콘텐츠 활성화라는 본래 취지를 달성하는 데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이동통신 시장은 ‘빅3’가 과점한 공급자 위주의 시장이었다.
제4 이동통신사업자의 출현이 3강 구도를 깨지는 못할지라도,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혀 시장의 무게중심이
소비자 쪽으로 이동하는 터닝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류현정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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