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에밀놀데3

영원한 울트라 2005. 12. 4. 10:12

에밀 놀데 ( Emil Nolde 1867.8.7 ~ 1956.4.15 )

독일의 화가. 본명 에밀 한젠(Emil Hansen). 슐레스비히 출생. 슐레스비히의 조각학교를 졸업한 후 공업학교의 용기화(用器畵) 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회화 쪽으로 전향하였다. 뮌헨·파리·코펜하겐 등지에 유학하여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드레스덴의 브뤼케파에 참가했으나 곧 이들과 결별, 나치스의 탄압 후에는 중앙과도 교섭을 끊고 지냈다. 유채화와 함께 많은 수채화·판화는 현대 독일 회화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젊은 시절 목각공예를 습득하고, 한때 베를린에서 가구와 장식미술가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 시절 얻은 목판화의 제작 방법은 그림에까지도 감정표현, 그것도 현실 사회를 넘어선 종교적 감정표현으로 이색적인 종교적 표현주의 회화를 구현해 나갔다.
분방한 공상, 대담한 형태의 데포르메, 불꽃처럼 타오르는 정동적(情動的) 색채를 특색으로 하는 그의 조형은 괴기한 인간의 가면, 원초적 자연, 꽃과 물체의 마술적 현현(顯現), 영혼과 광기(狂氣)와 신앙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놀데는 덴마크와의 국경선 부근의 북부 독일에 있는 Schleswig-Holstein 근처에 거의 평생동안 머물면서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못하고 고독한 작품 세계를 구사했다. 이런 놀데에게 그의 회화의 근원은 언제나 그의 고향이었으며 그의 집 근처에서 언제나 가꾼 정원의 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랑하였고, 고향 근처를 그린 풍경화에는 언제나 바다가 존재하였다. 이런 모티브를 꾸준히 다루면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작품 세계는 다음과 같은 놀데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작품이 단순한 좋기 만한 일시적인 흥미 이상이 되길 원한다. 즉, 나의 작품이 정신을 고양시키고 감동을 주며 관람자로 하여금 인생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하고 싶다."
따라서, 놀데는 다른 표현주의자들이 시대정신을 지니고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다룬데 비해, 인간 본연의 본질성에 관한 문제만을 상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다루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심연의 정신, 종교, 그리고 정열을 표현하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열정에 따라 작품을 제작한 것이며 어떠한 투철한 의지나 지식에 의하거나 어떠한 신중한 사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놀데는 원시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회화에 또 다른 원천을 발견하였다. 1910년부터 종종 민속박물관에서 스케치를 하고 남태평양 같은 미개지를 여행하는 등 원시 미술에 포함된 절대적인 진실과 그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힘과 직접적인 표현에 사로잡혔다. 특히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와 물질이나 매체의 특성으로 인해 작품에 더해지는 신선함에 매료되었다. 단순한 형태로 된 원시 미술과 더불어 그에게 영향을 미친 홀더와 뭉크의 작품의 단순한 형태의 표현성으로 인해, 그가 표현하고자 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놀데는 형태들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했고, 넓은 지면에서 색채와 통합시켰다.
그러나, 놀데가 표현하고자 한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와 그가 평생 추구한 자연의 원천적이고도 근원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헤서 그에게 무엇보다도 적절한 회화의 매체는 색채(Color)였고, 보다 정확히 말해서, 앞에서 언급한 마네, 고호의 영향으로 알게 된 밝고 강렬한 색채의 표현력이였다.
"나는 나의 작품에서 색이 나로 인하여, 자연의 생성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논리로써 캐버스 위에 펼쳐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듯이 놀데는 고정된 규칙에 ㅇ매이지 않고 색의 표현력 그 자체가 발휘되는 회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놀데의 그림에서는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색의 덩어리 또는 색의 소용돌이로 나타나는 윤곽선으로 구성이 이루어진다. 또한 색의 물질적이고 유동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넓은 색면은 뉘앙스(nuance)가 풍부하고 시각적으로 최면적인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색은 그 자체을 통해 놀데의 감정이 표현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놀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는 방법으로 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통한 새로운 재현적인 표현 방법을 구사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것은 바다, 구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더욱 성공적이었다. 이 방법은 사물을 바라보는 하나의 새로운 방식, 즉, 'Noldean Way'를 확립하게 된다.
놀데의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마네,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발견되었으며, 원시 미술을 접함으로써 색채에 이국적인 마력을 부여하면서도, 그러한 것에 동화되지 않고 북구의 정신성을 표명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즉, 색채의 힘으로써 자연 이면에 감추어진 힘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이미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놀데를 일컬어 사우어란트(Sauerlandt)는 독일 민족예술의 개척자라고 일컬으며, 허버드 리드(H.Read)는 동방의 이국 취미와 북구의 정신성을 결합한 고딕 시대 이래 최초의 화가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저녘의 늪 풍경(Marsh Landscape)>같은 놀데의 회화는 야수파 작가중 한 사람인 마티스(Matisse)의 작품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다. 마티스의 것이 완전한 통제된 균형과 질서에 의해 조절된 형식만을 위한 회화라면 놀데의 회화는 균형과 질서는 무시한 채 작가의 세계를 묵시적으로 암시하면서 생동하는 정서적 추이로 변형되었다.
놀데는 1913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을 순례하면서 원시 토속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1914년의 [무희 그림이 있는 정물]에 나오는 무희는 그 여행 때에 어디선가 원주민의 춤을 보고, 급하게 화구 상자에 스케치했던 것을 뒤에 다른 정물과 조화시키면서 다시 작품화한 것이다. 흡사 정신이상자로까지 보이는 이 열광적인 여인들은 붉은 머리와 반라의 옷차림에서 더욱 생생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놀데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약 20여점이 넘는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이다. 그의 종교화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을 과감히 탈피해, 표현주의자다운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그림으로 앙소르, 루오, 고갱과 더불어 현대회화사에서 손꼽히는 종교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1909년에 그린 [오순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한 북부 독일의 건장한 농임과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함께 나누며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눈은 크고 선명히 그려지고 있다. 서구미슬에서 전통적으로 눈은 마음과 정신의 상징으로서 정신성을 강조할 때는 눈을 크게 그리는데, 이 방식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령 강림제》(1909) 《그리스도의 생애》(1912) 《방랑자》(1910~1915) 등의 대표작이 있다.

글. http://www.pohangart.com/moogi007/art30-_25B3_25EE_25B5_25A5.htm

한국일보 2002년 5월 23일

獨 에밀 놀데, 1913년 한국방문 인물화 그렸다
김혜련씨 책 '낭만을…'서 밝혀

에밀 놀데, 1917.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1867~1956)가 세계적인 서양 화가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 노인 소녀 등의 인물화를 그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놀데는 우리나라를 방문하기에 앞서 이미 장승을 소재로 한 유화도 그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미술대 강사인 김혜련(金惠蓮ㆍ38)씨는 22일 출판한 ‘낭만을 꿈꾸는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열화당 발행)라는 책에서 놀데가 1913년 부인 아다 등과 함께 독일의 식민지였던 뉴기니를 여행하기 앞서 시베리아를 횡단, 우리나라를 방문해 펜과 잉크로 노인, 소녀 등을 그렸다고 밝혔다.

저자는 세계적인 화가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은 놀데가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일행은 우리나라의 이국적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부인 아다는 자서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사람들, 황홀하게 아름다운 색동옷의 아이들, 연꽃이 피어나는 궁전의 연못…부드럽고 고상하며 매력적이며 순수한 여인들이 있던 서울”로 표현했다.

<한국 노인> 1913. 펜과 잉크 소묘.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한국 소녀> 1913. 펜과 잉크 소묘.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놀데는 우리나라 여행중 틈틈이 스케치를 했는데 그가 그린 노인 인물화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듯 절망스런 표정을 담고 있으며, 소녀의 얼굴에서는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이 엿보인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이들 그림은 현재 독일 북부 제빌에 있는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에 소장돼 있다.

놀데는 이에 앞서 1912년 독일 베를린민속학박물관에 보관돼있던 장승을 소재로 유화작품 ‘선교사’를 그리기도 했다.

저자는 “놀데는 장승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선교사> 1912. 캔버스에 유채. 베르톨트 글라우에르트 컬렉션, 졸링겐.숭배의 대상이라는 사실만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며 “당시 기독교가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한다며 토속 신앙을 몰아내는 등 나쁜 행동을 많이 했는데 놀데는 순박한 아프리카 사람에 군림하려는 선교사를 장승의 뻣뻣한 모습에 빗대 표현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1998년 독일 베를린공과대학에서 ‘에밀 놀데의 이국적 정물화와 독일어 접두사 ur과의 관계’ 로 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번 자료는 논문 수집과정에서 찾아낸 것이다.

에밀 놀데는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히틀러가 ‘퇴폐 예술가’로 분류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거장 에밀 놀데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는 20세기초의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강렬한 색채와 거친 형상으로 동시대인들에겐 거의 ‘원시적’이라고 여겨질 작품들을 그렸다. 경제적 궁핍과 동료들의 몰이해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원초적 존재’를 꿈꾸며 이국적인 정물화를 그렸고, 멀리 남태평양의 열도까지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시베리아를 횡단해 뉴기니로 향하던 1913년 서울을 방문함으로써,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현대화가가 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나치로부터 퇴폐적·반게르만적인 예술가로 낙인찍혔으며, 작업 금지령을 받은 후에도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못다 한 그림들’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수채화를 남겼다.

놀데의 매력은 아무래도 그의 삶을 관통하는 인간적인 ‘모순’에 있지 않나 싶다. 이는 작품 속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주제가 극히 다양할 뿐만 아니라 기법들도 빠르게 변화하며, 또 한 시기 안에서도 다양한, 때로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기법들이 공존한다. 또한, 그의 자서전들을 읽게 되면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들이 작품의 주제와 기법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 자체로까지 확장됨을 알 수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주장하는가 하면 이국의 예술을 열렬히 칭송했고, 스스로 속세를 떠나 있음을 표방하는가 하면 베를린 분리파의 거두 막스 리버만에 대항해 미술계에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극단적인 반문명주의적 주장을 고수하면서도 함부르크의 항구 풍경이나 대도시 베를린의 밤 풍경에 본능적으로 매료되어 그 주제로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치당에 참여한 적도 있었고 반유태주의적 주장을 공공연히 드러낸 적도 있었다. 놀데라는 인물은 이렇듯 확실히 자기 분열적인, 모순에 가득 찬 인물이었으며,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통해 삶을 초극하려 노력했던 한 명의 낭만주의자였다.

<자화상-파이프를 물고 있는 얼굴> 1907. 석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

<자화상-파이프를 물고 있는 얼굴>

1907. 석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

놀데는 판화작품을 제작할 때, 일단 완성하여 찍어낸 판에 다른 색을 추가함으로써, 원작품에서 변형된 작품군을 여럿 남기고 있다. 석판화인 <자화상>을 단색조로 찍고 난 후 경쾌하고도 자유스럽게 여린 쑥색과 분홍색을 채색하고, 여기에 밝은 노란색을 추가로 채색했다. 동일한 형상이지만 여린 색채가 추가됨으로써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새로운 작품으로 변모했다.

1913년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 화가

놀데는 남태평양 여행 중에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와 관련된 작품들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우리에게는 비교미술사의 입장에서 논의될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1913년 가을 베를린을 출발한 놀데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몽골을 지나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특히 그의 부인은 한국인과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글로 남겨 놓기도 했다.

놀데는 여행 중에 틈틈이 스케치를 했는데 한국 사람을 펜과 잉크로 속기처럼 그려 놓은 작품들도 있다. 간결한 표현 속에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 소묘인 노인의 얼굴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듯 절망스런 표정을 지니고 있다. 반면 어린 낭자를 그린 소묘에서는 소녀가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정서인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이 엿보이는데, 여기에다 서양인이 투영하고 있는 약간의 이국적 신비감까지 겹쳐지고 있다.

또한, 놀데는 한국 방문 이전인 1912년에 이미 장승을 소재로 유화작품을 그린 적이 있다. 그는 장승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맥락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이 목조가 가지는 내면적 힘, 즉 마술적 의미부여를 본능적으로 읽었고, 이러한 느낌을 작품에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 노인> 1913. 펜과 잉크 소묘.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한국 노인> 1913. 펜과 잉크 소묘.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놀데는 비록 독일제국 식민지 관리국의 초청으로 남태평양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식민지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던 그는 노인의 얼굴에서 절망감을 포착하고 간단한 선 표현 속에 이러한 감정을 드러냈다.

한국 방문을 포함한 놀데의 남태평양 여행은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창조적인 것을 경험하려는 열의에 항상 가득 차 있던 놀데에게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방랑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예술가의 일반적 속성 중 하나라면, 놀데는 서울까지 가서 한국 사람을 그리게 될 것을 예감이나 한 듯이 베를린에서 한국 장승을 먼저 그린 것이다.

에밀 놀데는 서양미술사 내에서 이미 확고한 평가를 받은 작가인데, 그렇다면 그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세계적 화가이자 한국인과 한국 민속품을 그린 최초의 세계적 화가가 되는 셈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한국을 소재로 그린 놀데의 그림을 살펴봄으로써 놀데와 같은 서양예술가가 어떻게 타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는가를 확인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책의 구성 및 특징

제1장에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선 놀데의 개인적인 인생항로를 소개하며, 제2장에서는 놀데가 ‘고전주의’ 양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이유 및 그의 독특한 조형능력을 추적한다. 제3장에서는 이 책의 중심 논제인, 놀데가 취한 원시주의의 특성을 설명하고 이국적 정물화가 그의 전체 양식발전에 끼친 영향을 검증한다. 제4장에서는 놀데 특유의 색채처리와 후기 수채화의 예술적 가치, 그리고 그의 예술관 ‘의도하지 않음’을 양식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제5장에서는 독일어 접두사 ‘우어(Ur)’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다양하면서도 모순적인 놀데의 예술성 속에서 바퀴의 축처럼 자리잡고서 그의 창조력을 대변하고 있음을 밝힌다.




<가을 바다 19> 1911. 캔버스에 유채. 72.5X86.5cm.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북해와 발트 해 사이에 있는 유틀라트 반도는 놀데의 고향이 있는 곳이다. 그는 여름철 뿐만 아니라 가을철에도 때때로 이 지역에 머물며,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를 조그만 배로 헤치며 다니곤 했다. 그가 그린 가을 바다는 시각적 관찰에 의거한 작품이 아니라, 감각적 체험 뒤에 생겨나는, 감정의 분출구로서의 기록이다. 화면을 뒤엎고 있는 격렬한 붓의 속도와 불협화음적으로 병치된 색채의 에너지들은 가을 바다를 향한 놀데의 감정 그 자체이다.

이 책은 예술가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서나 평전이 아니라, 예술과 관련된 여러 분야들이 놀데라는 한작가에게,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에 어떠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치밀한 조직물이다. 한 작가의 면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하여 예술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그 시대의 독일 역사에 관한 지식이라든가, 놀데의 작품을 어떠한 미학이론과 연결시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라든가, 서양미술사 내에서 독일미술이 갖고 있는 복잡한 역학관계라든가, 모더니즘 형성기에 비유럽 미술이 어떠한 양상으로 서양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색채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과 예술가의 주관적 경험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예술가가 예술재료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물질이 정신과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지, 농촌 출신의 놀데가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노출시키고 있는 자기 모순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독일어 접두사 ‘우어’에서 어떠한 사변적 세계관을 읽어낼 수 있는지 등, 놀데라는 한 인간과 그의 예술세계를 다각적인 방향에서 분석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놀데라는 화가를 본격적으로는 처음 소개하는 터라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충실히 보여주고자 했다. 풍부한 자료사진은 물론, 그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도록 거의 모든 작품들을 생생한 컬러 도판으로 실었다. 또한 각 작품마다 설명을 달아 본문을 읽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반 고흐, 클림트 등과 같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거장들만큼 에밀 놀데는 미술 전공자들뿐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예술가이다. 그는 인간적 모순이 많았던, 그리하여 예술가가 갖고 있는 숙명적인 부조리를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나약하면서도 강인한 인물이었다.

글.http://www.youlhwadang.co.kr/modernart/artessay/nold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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