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출생.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배웠으나, 1895년 인상파전을 보고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인 18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그 전후에 이탈리아 ·튀니지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908년 이후 뮌헨 ·무르나우에 살면서, 19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집단인 ‘청기사(靑騎士)’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처음 바이마르, 1925년부터 데사우)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만년에는 1933년부터 프랑스에 정주하여,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 살았으며,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Über das Geistige inder Kunst》(1921) 《점 ·선 ·면 Punkt und Linie zu Fläche》(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그로피우스가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에 초빙한 근거로는 먼저 그의 작품이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생존작가들 중 가장 유명한 추상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 또 그가 미술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최초의 비구상미술의 창시자라는 점, 그리고 그가 1911년 집필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그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로 꼽힌다는 점들이었다. 또 하나 그로피우스가, 칸딘스키가 좋은 바우하우스 선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요소는 그가 지칠줄 모르는 이론가라는 점과 미술의 기본문제를 분석하는 방식이 물리학에서부터 법학까지 모든 영역의 지식을 동원,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었다.
칸딘스키는 일찌기 자신이 공감각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는 것 (가령 하나의 감각이 자극을 받으면 다른 감각이 반응한다)을 알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의 장면이나 색채를 보고 있을 때 어떤 소리를 들었고 음악을 들으면서 하나의 색채나 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하며 그가 보거나 들은 것은 어떤 특수한 악기의 특별한 음조와 같이 꽤 구체적이었다고 한다. 여하간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에서 맡은 과목은 기초 코스였는데 그것은 두 부분 (분석드로잉과 색채와 형태의 이론적인 고찰)으로 구성되었고 그의 코스는 비록 교수방법이 권위주의적이고 엄격하긴 했으나 바임르 바우하우스의 교과과정에서 가장 유용한 요소들 중의 하나였다. 색채, 형태, 선을 매우 엄중하면서도 준과학적인 분석에 맡기면서 그는 생도들을 지적으로 통제되면섣 감정적으로 표현적인 미술의 다양한 가능성들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칸딘스키 자신의 바우하우스 시절의 그림도 외형적으로는 한정적인 추상언어의 거의 무한한 잠재력을 과시해 보이고 있다. 그는 기하형태들의 미묘한 기용은 특히 1925년 이후의 바우하우스 디자인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칸딘스키의 유명한 색채이론은 괴테로부터 쉐브뢸, 뉴턴, 마티스, 들로네를 거쳐 인지학자 (anthroposophist)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론들을 섭렵한 결과에 자신의 공감각의 경험과 지식을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색채의 모든 요소와 잠재력들, 가령 음향 또는 물리학과의 관계, 상징 의미 등을 포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는 색채의 본질이 말의 언어보다 감정의 느낌들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각언어라는데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우하우스의 중요한 색채이론가의 또 한 사람인 이텐과 같이 색채는 형태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으며 그의 형태론은 그 언어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칸딘스키의 형태에 대한 고찰은 더 이상 축약될 수 없는 가장 작은 요소인 점에서 시작, 점이 움직이면 선이 산출된다. 그러나 점의 성질은 그것이 나타나는 바탕의 크기와 상대적이다. 가령, 비교적 커다란 점은 원판이 된다. 선의 유형은 점에 가해진 힘에 좌우된다. 단일하고 규칙적인 힘은 직선을 산출하며 둘 혹은 세개의 힘들은 각이 지거나 구불구불한 선들을 낳는다. 아울러서 각 선들은 색채의 그것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다. 형태와 색채의 정확한 상응의 개념은 칸딘스키가 수업 중에 행한 연습들의 기본골격을 형성했다. 가령 가장 기본적인 형태들에는 삼원색, 즉 삼각형에는 노랑, 정사각형에는 빨강, 원은 파랑이 적절한 것과 같이 색채의 혼합은 형태의 혼합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삼각형과 정사각형의 혼합체인 오각형은 오렌지색을 요한다. 칸딘스키의 이론은 색채와 형태 뿐 아니라 전체 구성에도 적용된다. 수평적 구성은 차갑고 수직적 구성은 따뜻하며 눈을 위로 향하게 하는 구성은 자유롭고 가벼우며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반대로 무겁고 우울하게 한다.
왼쪽으로 움직이는 구성은 모험적이고 해방감을 산출하며 그의 반대는 친숙하고 안정감을 준다. 이러한 법칙들은 시각적인 조화, 부조화들의 창조와 미묘한 감정들이 표현될 수 있는 구성들로 유도되었다. 칸딘스키는 대부분이 바우하우스시기(1922 - 1931년)에 제작된 것들이며 이들 중의 예외가 1911년경의 목판화와 1912년 유채인 '홍수'이다.
12살때 베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정도로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클레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회화와 음악 간의 다양한 유사성에 주목, 그의 이론에서 응용하고 있다. 1920년부터 1931년까지 11년간 바우하우스에서 재직한 클레의 기여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기초교육과정을 통해서였다. 처음 클레는 무헤(Muche)로 부터 책제본 워크샵을 물려받아 가르쳤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워크샵 마스터와 논쟁을 벌이는데 소모했다고 한다. 1922년 그 과정이 취소되자 스테인드글레스 워크샵을 거쳐 직조 워크샵을 맡아 형식구성에 대한 특강을 하며 자리를 잡아갔고 그가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과정은 기초디자인 코스에서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형상제작의 근본문제들에 대해 비평적인 접근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코스는 바우하우스 뿐 아니라 클레 자신을 위해서도 생산적이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부연해 '내가 가르치러 왔을 때 나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거슬 나 자신에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해야만 했다"고 회고하고 있듯이 클레에게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업은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작업을 처음으로 지적인 관점에서 고려하도록 강요했다. 클레의 교육은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파생된다고 그가 믿었던 가장 요소적인 형태들에 대한 연구에 중심을 두었다. 미술은 이러한 형태들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의 피상적인 모방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라게 하는 과정들을 추적하는 시도에서 가능하다고 클레는 생각했다. 그는 또 그림에서 자연은 자연계로부터 떨어져 그 자신의 따로의 자립적인 환경내에서 같은 법칙에 순응할 때만이 재생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클레의 생각은 1925년 바우하우스 책으로 출판된 그의 '교육지침서(Pedagogical Sketchbook)'에 수록된 구절에 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클레는 자연 그 자체와 같이 풍요롭고 다양해지도록 모두가 노력해야만 한다. ("꽃봉오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어떻게 나무가 자라는가, 어떻게 나비가 날개를 펴는가를 경험으로 배우라. 그러면 자연 그 자체와 같이 풍요하고 가변적이며 변덕스러울 수 있으리라")고 하며, "자연이 창조하는 방법을, 형태들이 되어가고 기능해 가는 것을 따르라. 그것이 가장 좋은 학교다. 그러면. '아마도' 자연으로 출발하여 너 자신의 형성화를 성취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너 자신이 자연과 같이 되어 창조할 수도 있으리라."
[즉흥 Improvisation]시리즈, [인상 Impression]시리즈, [구성 Composition]시리즈는
칸딘스키의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입니다
<콤포지션>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입니다
콤포지션 시리즈 중 [콤포지션 7]이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추상미술과 관련하여 칸딘스키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어느날 자신의 화실에 들어서던 칸딘스키는 거꾸로 놓여있던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거꾸로 세워져 있는 그림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림이 무엇을 그렸느냐와 관계없이 색채와 선의 구성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칸딘스키의 추상 미술이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깨달음은 구체적인 대상이 완전히 배제된 미술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위의 그림을 봅시다. 상당히 추상화가 진척된 그림입니다만,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산과 나무가 있는 풍경화라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화면에서 사람, 나무, 산 등이 색채와 선적 패턴들로 녹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왠지 자연이나 사람같은 생명을 지닌 어떤 대상을 연상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생명력있는 표현성을 특징으로 하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구체적인 대상을 배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체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특이하군요. 즉흥이라는 제목과 함께 번호를 달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칸딘스키는 음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말하자면, 인상, 즉흥, 구성 시리즈죠. 구성은 영어로 하면 composition인데, 음악에서 이 말은 작곡을 의미하지요.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이 순수하게 추상적이라고 생각했고, 미술에서도 음악과 같은 순수한 표현성이 성취되길 바랐습니다. 마치 음악가가 리듬, 음색, 멜로디 같은 음악적 형식들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듯이, 미술가도 색채와 선의 다양한 배열을 통해 공포, 비애, 환희 같은 자신의 내적 경험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구성 no.7
칸딘스키가 최초로 순수 추상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어떤 대상을 암시하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색채와 선의 다양성이 있을 뿐입니다. 칸딘스키는 미술가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순수 조형적 요소로 표현가능하다고 보았던 겁니다. 그는 각각의 색, 직선 및 곡선이 각자 의미하는 느낌이 있어서 이들의 배합으로 일종의 작곡(composition)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빨강 색은 뜨거운 정열을, 녹색은 평화를, 굵은 직선은 강인함을, 곡선은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화가는 이들 요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칸딘스키는 그림 자체만으로 충분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목을 따로 붙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엔 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뭉크, 에밀 놀데, 키르히너, 칸딘스키. 이들은 모두 저마다 개성이 다르지만, 미술을 통해 작가의 내적 경험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외적인 세계의 현상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현상을 보다 중요한 표현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그림에서는 그들의 고유한 겅험이 표현되기 위해 형태가 왜곡되고 비자연적인 색채가 사용됩니다. 이러한 미술의 진전된 단계를 우리는 칸딘스키의 추상 미술에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딘스키의 추상은 "표현적 추상"이라고 불리우곤 합니다.
가브리엘의 초상
1902년 베를린에서 청기사 일원인 가브리엘 뮌터를 만난 칸딘스키는 이미 결혼을 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술적 동반자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후에는 그 이상을 넘게 되죠. 하지만 로뎅과 카미유 클로델처럼 그들의 결합도 서로에게 예술적 상승효과를 가져다 주는 자극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15년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동행은 쉽지 않은 시기에 개척자로 살아야 하는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주었습니다.
말을 타는 연인들
로마네스크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키는 그림입니다. 러시아의 민속예술에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의 초기작들은 위와 같은 단순하고도 현란한 색채의 향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점들의 장식성과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작가의 대담하고 특이한 실험 정신을 엿보이게 합니다.
인테리어
화려한 분홍색의 축제 같습니다. 당시 칸딘스키는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가브리엘 뮌터와 독일 뮌헨 근처의 무르나우에 집 한채를 장만하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당시 행복하고 화려했던 자신의 감정을 과감한 색채로 표현하였습니다. 부제로 "나의 침실"이라 명명되었습니다
무르나우의 교회
제목을 보지 않으면 교회라고 전혀 연상되지 않을 만큼 지극히 단순화 되고 추상화 된 그림입니다. 칸딘스키가 살고 있던 지방 무르나우에 있던 교회를 그린 것입니다. 화려한 색채와 형태를 무시한 구성이 이채롭습니다. 이 작품을 그린 때는 풍경화에서 추상화로 그의 작품경향이 옮기워 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추상화로 옮기워 지는 그의 예술로 인해 그는 동맹관계에 있던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기도 했습니다.
검은 점I
적극적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간 칸딘스키는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불규칙한 선과 형태, 색채가 서로 응집하기도 하고 교감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내적인 감흥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도 작가만큼 자유롭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칸딘스키는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흥 31
이 시기에 칸딘스키는 즉흥, 인상, 구성 등의 음악적 제목을 자신의 작품에 주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즉흥 시리즈를 제작하였는 데, 작품에 즉흥이라는 제목과 함께 번호를 주었습니다.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이 가장 순수한 추상이라고 생각했고, 미술에서도 음악과 같은 순수한 표현성이 성취되길 바랐습니다.
회색 속에서
어느날 자신의 화실에 들어서던 칸딘스키는 우연히 자신의 그림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참동안 작품을 감상하던 중 그는 자신의 그림이 거꾸로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림이 무엇을 그렸느냐와 관계없이 색채와 선의 구성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위의 작품도 제목이나 작가의 의도를 상관하지 않고 색채와 구성의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세계 II
그가 붙인 제목처럼 강인함과 연약함으로 표현되는 큰 원과 작은 원, 적은 수의 선과 색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유난히 적은 수를 사용하고 무채색과 흐릿한 터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정적입니다. 작은 세계라 명명한 대로,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야 하는 작가의 서글픔과 우울한 정신 세계가 보여집니다
구성 VIII
구성 시리즈는 몇 년마다 한 번씩 그려진 것으로 칸딘스키의 화풍이 어떻게 변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서서히 형성되는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위에 하나의 원이나 선을 올려놓는 것이나 색채를 결정하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칸딘스키의 감각에 따른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작곡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노랑, 빨강, 파랑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빨강과 파랑 등 여러 색의 원과 직선, 곡선이 정확하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왼쪽은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하고 오른쪽은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형태를 보입니다.이렇듯 대립되는 것과 통합적인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있으면 대립과 모순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세계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합니다.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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