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빨간 속옷의 오달리스크’ - 김씨님 글

영원한 울트라 2005. 12. 28. 18:00

 

울 카페 회원이신 김씨님이 쓰신 글...

[미술속의 에로티시즘] ‘빨간 속옷의 오달리스크’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예술은 모든 노동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락의자 같은 것”이라고. 이처럼 마티스의 이상은 완벽한 질서와 미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869년 프랑스 북쪽 카토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처음 법률에 뜻을 두었으나 맹장염 수술 후 뒤늦게 예술가로서 출발했다. 모로의 도움으로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게 된 그는 인상주의를 버리고 폴 세잔의 견고한 구성, 폴 고갱의 장식적인 색면, 반 고흐의 색채의 영향을 받아 야수파의 대표 작가로 성장했다.

여기 오달리스크는 53세, 니스와 파리에서 반반씩 작업을 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오달리스크’란 회교국 왕후에 딸린 궁녀를 지칭한다. 18세기 유럽의 엑조티시즘 회화에 나타난 이 아름다운 나부(裸婦)의 대명사는 19세기 들라크루아나 앵그르의 회화에 종종 등장했던 테마였다.

앵그르의 ‘노예를 거느린 오달리스크’,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마네의 ‘올랭피아’의 전통적인 포즈와 작품들은 그의 누드작품과 조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20세기 이 주제를 편안하고 우아한 여인의 아름다운 세계로 묘사했다. 마티스 특유의 시원스럽고 경쾌한 색채로 화려한 융단과 파란색 연속무늬의 장식적인 가리개에 기댄 여인의 모습이다. 이 모델은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로 1927년까지 마티스의 모델이었다. 그는 “오달리스크는 아련한 향수, 아름다운 백일몽 마법적인 분위기에서 황홀한 낮과 밤을 보낸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실제 실내장식을 갗춰 놓고 작업했다.

원색의 마술사처럼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관능적인 포즈로 여인의 가슴이 열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물론 그의 색채와 무늬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컸다. 후에 타이티와 모로코 여행으로 야수파 시대와 장식적인 현란함 대신에 아라베스크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과 색의 병치로 신선함을 이룩하였다.

“어느 누구도 나만큼 마티스 그림을 자세히 본 사람이 없으며, 내 그림 역시 마티스가 제일 자세히 봤다”고 말한 피카소는 마티스 전시를 본 후 6개월간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그림에는 빛을 발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마티스. 마지막 그의 예술과 사랑은 니스에서 약간 떨어진 방스의 로자리오(Rosaire) 성당 건축에서 꽃피웠다.

“가위는 색종이보다 더 감각적이다”라고 했던 그는 말년 성당의 실내장식 일체를 맡고 병중에도 색종이를 자르고 종이를 붙이는 콜라주 작업으로 재즈 작업과 마티스 예술의 집대성인 방스성당장식을 마무리했다.

어떤 작품은 열두번씩이나 에스키스를 찢어내는 철저함을 가졌고, 한때 수도자가 될 생각을 가졌던 그는 세기의 ‘색채의 시인’이란 이름을 남기고 84세로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김종근|미술평론가 critic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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