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코코슈카-바람의
신부(1914)
오스카 코코슈카(1886.3.1-1980.2.22) 그림 속의 두 인물은 오스카와 그의 영원한 여인 알마
말러입니다. 그림의 제목은 '바람의 신부'이지요. 두 연인이 누워있는 침대에는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와 거센 바람이
가득합니다. 알마를 손을 행여나 놓칠새라 꼭 잡고 있는 오스카의 퀭한 눈.. 차갑고 싸늘한 침실의 분위기와 색채는 그의 그런 걱정과
근심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평온함을 누리고 있는 것은 오스카옆에 누워있는 알마 말러뿐이지요.
사랑하는 자와 사랑의 받는
자의 차이를 이토록 잘 표현한 그림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는 받기만 하는 사랑에 길들여져 곁에 있는 사람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반면,사랑하는 자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걱정과 번민에
휩싸여있습니다. 오스카에게는 늘 내일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뜬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질지 모릅니다. 알마 말러..그녀
인생에는 '구속'과 '안정'이라는 단어가 없었지요. 그녀는 19세기말의 회색빛 가운을 입은 팜므파탈이었으며
보헤미안이었습니다.
19세기 회색빛으로 물들어진 빈의 도시엔 많은 유명인들이 있었습니다.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에곤
실레,오스카 코코슈카등 당대에 내 놓라하는 화가들이 살았던 곳이지요. 그리고 음악계엔 정통적 규범을 깨고 나타난 신진 세력인 구스타프
말러,쇤베르크,젬린스키,알반 베르크등의 작곡가들이 빈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정통을 중시하고 보수를 고수하던 빈의 도시엔
새로운 것에 대한 염려와 충돌이 하루도 그칠날이 없었습니다. 보헤미안...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인 그들은 사랑에 있어서도 거칠것이 없었죠. 알마 말러,본명은 알마 쉰들러..화가 에밀 쉰들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음악과
미술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훗날 작곡가로써 이름을 남깁니다. 아버지 에밀 쉰들러의 제자였던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만남은
숨겨진 그녀만의 매력과 본능을 자유롭게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던 남자들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그녀의
매력은 빈을 아수라장으로 만듭니다. 그녀의 첫 키스의 남자인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스스로의 자유로움을 중시하던 사람이었기에
쉽게 그녀를 놓아줍니다. 그리고 그녀를 신부로 맞는 행운(?)을 거머쥔 사람은 다름아닌 구스타프 클림트이상으로 명성을 날리던
구스타프 말러였다.이 두명의 구스타프의 실랑이는 꽤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알마 말러를 두고 클림트와 말러가 여러 번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보쌈'에 해당되는 행태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많은 염문을 뿌리던 알마 말러와의 결혼은
역시나..구스타프 말러에게 행복과 불행! 이 두가지를 끊임없이 공존하게 만들었으며 늘 '죽음'이라는 숙명을 떠 안고 살던 말러에게 가정의
안정된 지킴은 너무나 버거운 삶의 무게였다. 밖으로 끝없이 돌고 싶어하는 길들일 수 없는 야생동물과 같았던 알마 말러를 지키는
일은 그에게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은 그녀에게 슬픔도 주었지만,동시에 미망인이라는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 자유! ' 얼마나 그녀가 고대하던 것인가! 음악가로써의 재능 또한 남편의 바깥출입 제재로 할수 없었던
그녀는 이때부터 더욱 문란하고 방탕하게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인간간계를 넓혀간다.
그때 그렇게 만난 두사람..'오스카
코코슈카와 알마 말러'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고질적인 집착과 편집증과 너무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오스카는 알마 말러의 상대가
아니! 적수가 될수 없었고..그들의 뻔한 수직관계의 애정전선 역시..자연스럽게 끝나게 된다. 알마 말러가 당대 유명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한 것이다. 그녀의 재혼은 1915년,오스카의 '바람의 신부'의 제작년도는 1914년이다.
그 일년간의
사랑에 대한 고통과 번민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그렇게 해서 생긴 오스카의 이별은 고통은 그의 기괴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알마 말러와 똑같이 생긴 밀랍인형을 제작! 마차를 탈때면 항상 옆자리에 앉히고.같이 오페라를 보러가며 밥을 먹을 땐 그
인형과 대화를...심지어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오스카의 광적인 사랑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그가 죽음을 맞이할때도 그 그리움을
가지고 가려했다고 한다.
이제 다시 '바람의 신부'를 보면..오스카의 슬프고 퀭한 눈과 알마 말러의 평온한 잠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지 알게될것입니다. 평생을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사람들은 그의 사랑을 '미친 사랑'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랑에는 정의란 없다. 그것이 '미친 사랑'이던 '온전한 사랑'이던..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오스카 코코슈카의 사랑인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생각난 것인데..난 개인적으로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을 몹시
좋아한다. 사실 거의 광적으로.그의 염세주의를 좋아하며 그 염세주의 이면에 깊게 깔려진 그의 삶에 대한 솔직한 애착이
좋다. 누구나 쉽게 죽음에 대해선 말하는 우리..'죽어야해.','죽고 싶어','뭐하러 사나 싶어.' 그렇게 아무렇게나 공공연히 죽음을
말하지만 또 얼마나 내 삶에 집착을 보이는가?
말러가 알마 말러와 가장 행복했을때는 그가 그의 교향곡6번을 작곡하던
때였다. 그는 알마 말러에 대한 사랑을 그 6번 교향곡 2악장에 묘사해 놓았는데,몹시 부드러운 선율로 장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악장이다. 그런데..'비극적-Pathetique'이것이 그 교향곡의 제목이다. 항상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던 말러는 알마 말러를 이미
꾀뚫어 본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주는 아름다운 미소와 관능적인 육체와 지성미를 갖고 싶다면.. 그 어떤 댓가를 치뤄야하는 지를
말러만은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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