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홍콩 로덴스쿨을 졸업하고 5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미학과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도쿄대)했으며, 56년 독일로 건너가서는
음악사를 공부했고(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 전자음악에도 심취했다.
이 다양한 예술적 편력은 훗날 그의 풍성한 예술적 변주로 구현된다. 그는 문화 건달그룹으로도 불리는 전위그룹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60년대부터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 공연, 뮤직일렉트로닉TV전 등 수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가졌다.
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하면서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가 넥타이를 자르는 등 파격적인 행위예술을 펼치며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플럭서스’는 그의 예술적 모태였다. 그는 그곳을 통해 당대의 도드라진 예술가들과 예술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교유했다.
플럭서스의 창시자이자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 그의 정신적 쌍둥이로 일컬어지는 전위미술가 요제프 보이스, 음악과 소음, 삶과 예술의 구분을 배척했던 쇤베르크의 제자 존 케이지 등. 그에게 이들은 영혼의 동반자였고, 예술적 혈연이었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등에서 활동하며 극단의 실험적 음악운동을 이끈 무어만은 백남준의 성공적인 뉴욕 상륙을 도왔으며, 64년부터 10년간 구미 각국을 돌며 그 유명한 반나의 콤비 공연을 벌인 파트너였다. 그리고 이들은 존 케이지(92년 사망)를 마지막으로 모두 백남준의 곁을 떠났다.
물론 백남준의 말년은 예술적으로 푸근했다. 그에게는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받은 ‘황금사자상’이며, 96년 독일
‘포쿠스’지 선정 ‘올해의 100대 예술가’, 97년 독일의 경제월간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을 비롯한 숱한 메달과
훈장들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96년 3월 뇌줄중으로 쓰러진 뒤 왼쪽 신경이 마비된 몸으로, 끊임없이 창작활동에 매달리며 97년 스위스 바젤국제아트페어를 비롯한 굴지의 행사에 기를 쓰고 참가한 것도 그 고독의 공백을 예술로 메우기 위해서 였는지 모른다.
그는 예술을 통해서만 그들과 하나일 수 있었고, 그 방식대로 세상과 대면했다. 백남준의 빛나는 예술 혼과 작품들은 그렇게 우리와의 새로운
교유를 위해 남겨져 있다.
조윤정 기자 yj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