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백 남 준

영원한 울트라 2006. 1. 30. 21:33


 

 


 

 


 

 


 

 



 

 

"내 나이는 먹었어도 비디오 아트는 아직 유년기야.

비디오 아트는 말하자면 2년마다 샤로운 종류의 물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분야야.

나는 한 10년은 할 일이 남아 있어."


-시간과 영상의 마술사, 백남준 (1932~ )-

해프닝과 비디오아트는 서로 다른 예술 형식들이지만, 백남준에 있어서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귀결되는, 혹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총체적 과정이다.
그의 해프닝은 처음부터 비디오아트로의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그의 비디오아트는 해프닝을 포함하는 미디어 공연예술로 발전하였다.
1956년 독일에 도착한 후 아방가르드 예술에 경도된 백남준은 1959년에 이미 자신의 해프닝 작품에 산 수탉, 오토바이와 함께 'TV 수상기 1대'를 포함시킬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년 후 1963년에 그는 <음악의 전시회-전자텔레비?gt;이라는 이름의 개인전에서 TV 수상기 13대를 예술로 변형시킨 '장치된 TV'(pre- pared-TV), 즉 미술사상 최초의 비디오아트를 발표함으로써, 그 자신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백남준의 예술 활동은 해프닝과 비디오아트 두 영역을 왕래하며, 때로는 해프닝의 문맥 속에 비디오를 사용하고, 때로는 비디오아트에 해프닝을 접목시킴으로써, 비디오 공연, 우주 중계 방송 공연 같은 새로운 미디어 공연 예술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다시말해 해프닝에서 출발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공연적 요소를 포함하여 극도의 기계 미학에 인간적 내용을 더하고, 해프닝은 비디오 기술의 도입으로 위성 예술과 같은 새로운 국면의 공연 예술로 발전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순환적 발전 양상을 보이는 해프닝과 비디오아트는 백남준 예술의 수레를 끌고 나가는 두개의 바퀴가 되어 새로운 예술 창조를 위해 전진하는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

―지금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세요?
“아, 연애.”

―연애 많이 하셨잖아요.
“아직 부족해.”

―선생님 보고 다 천재라는데요.
“나 천재 아니에요. 괜한 말이야.”

―미술사에 남을 위대한 예술가시잖아요.
“남긴 남을 거야.”

―어떤 예술가로요?
“미디어 아티스트.”

―그냥 그렇게만 기억되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럼 어떡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어때요?
“관계없어요. 난 내 일만 하면 돼.”

―연애 말고 예술 쪽에서 뭔가 하고 싶은 건 없으세요?
“책 하나 쓰고 싶어. 내 자서전. 영어로 쓸 거야.”

―제목은요?
“스크루타브루 오리엔타루(scrutable oriental).
‘알기 쉬운 동양인’이란 뜻이야. 다들 동양인 보고 ‘인스크루타블
(inscrutable)’ 하다고 하잖아.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솔직하다고.”

―한국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일 많이 하고 잘 놀라고.”

―노는 게 중요해요?
“중요해.”

―어떻게 놀아요?
“술 많이 먹으면 돼. 막걸리 먹으면 돼.”

―혹시 한국서 보고 싶은 사람 있으세요?
“작은 누이(누나). 백영득이. 못 본 지 오래 됐어. 다리가 아프대.
뼈다귀가 부러졌다고.”

―예술가는요?
“박서보. 작품이 좋으니까. 젊은 여자들도 보고 싶어. 이경희(수필가)도 보고 싶어. 애국 유치원 같이 다녔어.”(그는 또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김대중(전 대통령)도 훌륭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멋진 예술가예요?
“글쎄.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한국 가서 하고 싶으신 일은요?
“금강산 가고 싶어. 세 살 때 가족하고 갔었어. 제주도도 가고 싶어.”

―혹시 몸이 불편해 답답하지 않으세요?
물리 치료 열심히 안 받으신다는데.
“내가 게을러요.”

―예술가가 손이 불편하면 신경질 나잖아요.
“물론이지. 그래도 난 콘셉슈얼 아티스트(개념미술가)이니까 괜찮아. 머리 괜찮고 말 괜찮아. 답답한 것 없어요.”(그는 요즘 주로 페인팅을 한다. 물감으로 캔버스에, 오래된 TV에, 로봇에 그린다.)

―뉴욕에 오신 지 40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발표하신 지 20년이네요. 세월 빨리 가지요?
“그렇지. 할 수 없지.”

―뉴욕이 왜 좋아요?
“더러우니까 좋지. 범죄가 많고.”

―그래서 뉴욕이 좋으시다고요?
“예술이 그래야 되니까. 인생이 썩으면 예술이 돼. 사회가 썩으면
예술이 돼.”

―과거에 ‘예술은 사기’라 그러셨잖아요. 이번엔 ‘사회가 썩으면
예술이 된다’?
“그렇지.”

―무슨 뜻이에요?
“그런 뜻이야.”

―그럼 서울(한국)도 더 썩어야 예술가가 많이 나올까요?
“그렇지. 서울도 부패했지. 그러니까 좋은 아트가 나올 거라고.”

스튜디오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닮은 몸에 힐러리 상원의원의
얼굴이 달린 거대한 풍선이 설치돼 있다. 백남준씨는 조만간 이를
맨해튼 상공에 띄울 예정이라고 한다.

“기천달러밖에 안 들었어. 원래 마돈나로 하려고 했는데, 조수가
힐러리로 하자고 해서.”

―센세이셔널 하겠네요. 역시 ‘백남준’ 하면 ‘충격’인가요?
“그렇지.”

―의도적으로 충격을 주려고 하세요?
“글쎄. 예술가니까 아무래도. 쇼크, 챌린지….”

―예전에 한 TV 광고에서 ‘창조 창조 창조’ 하고 외치셨잖아요.
“에이전시가 하라는 대로 했어. 돈 받으려면 타협을 해야지.”

―백남준은 누구인가요?
“난 바보라고.”

―왜요?
“바보니까 바보지. 바보야 바보. 미친놈.”

―젊어서 미친놈 소리 많이 들으셨죠?
“그럼. 미국에선 아직도 미친놈이래.”

―그런 소리 들어도 괜찮으세요?
“할 수 없지. 난 스놉(snob)이라고. 명성을 즐긴다고. 돈은 없어도
명성은 있었지.”

―도대체 왜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고 하셨어요?
“그게 다다이즘이니까.”(“젊었을 때. 케이지 만났을 때”가 제일 좋았다는 그는 인생의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TV붓다’, ‘TV 정원’을 꼽았다.)

―인생은 뭔가요?
“인생은 썩은 막걸리야.”

―그게 무슨 맛인데요?
“몰라. 나도 못 먹어봐서. 시큼털털하지.”(그는 또 “죽음은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난 두려운 것이 없다”고 했다.)

―요즘도 신문 열심히 보세요?
“한국 신문도 보고. 뉴욕 타임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도 읽어.”

―미국 대선에 관심 있으세요?
“응. 케리가 됐으면 좋겠어. 평화주의자니까.”

―언젠간 한국에 정착하고 싶으세요?
“우리 여편네 죽으면. (애정 섞인 말투로) 우리 여편네 여간해선 안
죽어. 비디오 아트했는데 나 때문에 예술 맘껏 못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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