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화파 분류

영원한 울트라 2006. 2. 1. 12:03

 

이탈리아 움브리아지방에서 번영했던 회화파.

움브리아회화는 14세기에는 피렌체와 마르케지방의 영향도 받았지만 주로 시에나파의 지배 아래 있었다. 15세기가 되자 피렌체에서 탄생한 새로운 회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 화파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1430년대 후반 이후 D.베네치아노·F.안젤리코·B.고촐리등이 움브리아 각지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60년 이후로는 P.델라 프란체스카와 F.리피가 페루자와 스폴레토에서 중요한 작품을그렸다.
이러한 활동에 자극받아 페루자와 폴리뇨를 중심으로 B.봄필리·F.디 로렌초·M.다 구아르도 등의 뛰어난 화가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며 움브리아파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사람이 페루지노이다. 그는 움브리아인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경건한 종교심을 반영한, 온화한 자연과 감미로운 인물을 합리적으로 구성시킨 독특한 종교화로 15세기 말에 널리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페루자와 피렌체에 큰 공방(工房)을 내고 활동을 했으며,제자로는 우르비노 출신인 S.U.라파엘로, 페루자 출신인 핀토리키오가 있다. 이 밖에 움브리아파에는 로 스파뇨로 알려진 디 페에트로와 에우제비오 디 산 조르조, 또는 파스토라(안토니오 마사리) 등이 있는데, 폐루지노와 라파엘로 또는 핀토리키오 등의 작풍을 따른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르네상스 전성기 거장들의 영향하에서 움브리아파는 그 독자적 성격을 잃어갔다.


▣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Gentile da Fabriano 1370∼1427 이탈리아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20?∼1492 이탈리아
▣ 페루지노 Perugino, Pietro 1450∼1523 이탈리아
▣ 라파엘 Raphael,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 베네치아노 Domenico Veneziano ?1400∼1461 이탈리아
▣ 안젤리코 Angelico, Fra 1400?∼1455 이탈리아
▣ 고촐리 Gozzoli, Benozzo 1420∼1498 이탈리아
▣ 핀투리키오 Pinturicchio 1454?∼1513 이탈리아
▣ 루카 시뇨렐리 Signorelli, Luca 1445?∼1523 이탈리아

 

 

 

 

19세기 말 프랑스의 회화운동, 또는 그 양식의 하나.

1889년 파리의 카페 보르피니에서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 전람회를 E.H.P.고갱 등이 개최한 것이 그 최초의 운동이다.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斷片)을 강력한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으로 종합하고, 화가의 주체성에 바탕을 둔 형태나 색채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를 이은 나비파는 종합주의를 명확한 슬로건으로 내걸고 예술작품은 눈(감각기관)의 소산이 아니라 마음(상상력)의 소산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대상(對象)의 데포르마시옹과 평탄한 색면의 장식적인 구성이 특징인 종합주의는 아르누보를 거쳐 반인상주의적인 20세기 회화의 저류(底流)를 이루고 있다.


▣ Gauguin 고갱, Eugene Henri Paul 1848∼1903 프랑스
▣ Bernard 베르나르, Emile 1868∼1941 프랑스
▣ Louis Anquetin 앙크탱 1861∼1932 프랑스

 

 

 

미학적으로는 상징·우의(寓意)·표정 등의 수법으로 본래 형상화할 수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또는 내면·관념 등을 이미지로 전달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종교적 도상(圖像)의 대부분은 상징주의적이며, 특히 중세 그리스도교는 상징주의적 표현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는 19세기 후반에 인상주의 등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과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 광범위한 예술표현에 미친 경향을 상징주의·상징파라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좁은 뜻으로는 상징파의 비평가 A.오리에가 E.H.P.고갱과 그 주변의 화가들을 미술분야의 상징파로 간주하였고, 나비파의 M.드니도 자신의 그룹을 상징파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이른바 종합주의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19세기 상징주의는 합리주의·사실주의를 사회적 원칙으로 했던 이 시대의 정신측면에 내재해 있던 <개(個)>의 내면적·정서적 세계의 탐색 요구에 대응한다. 낭만파는 이른바 정열을 외화(外化)함으로 써 <개>를 확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비적인 내면의 침잠도 갖추고 있었다.

독일의 K.프리드리히, 나자레파, 영국의 라파엘전파(前派) 등이 이러한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여기에서는 삶과 죽음, 불안, 사랑, 성(性) 등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졌다. 한편 상징파 선구자의 한 사람인 J.M.휘슬러는 주제가 아니라, 색채나 필촉의 음악적 정조만으로 상징성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사고는 말라르메 등의 방법에도 대응된다고갱도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것은 주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면의 형태나 색채의 음악적 배치에 있다고 설명하였고, 드니도 똑같은 것을 말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상징주의는 주제적·문학적인 측면에서와 순수조형적인 구성이라는 2개의 관념에 따라 양면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특히 1880년대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세기말> <아르 누보>와 복합되면서 매우 광범위하게 파급되어갔다. V.고흐·고갱의 경우는 물론이고, 만년의 P세잔과 C.모네에서도 상징주의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주요한 조류로서는 프랑스에서는 P.P.샤반·O.르동·G.모로 등, 벨기에에서는 <장미십자>그룹, 스위스에서는 F.호들러, 오스트리아에서는 G.클림트, 영국에서는 라파엘전파의 후기 제작, 북유럽에서는 E.뭉크 등을 들 수 있다. 이 경향은 1910년대까지 잔존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야수파·입체주의의 출현으로 차츰 그 힘을 잃어갔다.



▣ Gauguin 고갱, Eugene Henri Paul 1848∼1903 프랑스
▣ Denis 드니, Maurice 1870∼1943 프랑스
▣ Klimt 클림트, Gustav 1862∼1918 오스트리아
▣ Hodler 호들러, Ferdinand 1853∼1918 스위스
▣ Munch 뭉크, Edvard 1863∼1944 노르웨이
▣ Puvis de Chavannes 퓌비 드 샤반, Pierre 1824∼1898 프랑스
▣ Redon 르동, Odilon 1840∼1916 프랑스
▣ Moreau 모로, Gustave 1826∼1898 프랑스


 

 

 

원래 다다이즘과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곧 그로부터 분리가 강조되었다.

이 분야에서는 프로이트 외에도 20세기초 미술사조의 하나인 입체주의(cubisme)의 영향이 역시 중요하다. 입체주의는 전통적 사실주의 회화를 부정하고 공간·형태면에서의 순수한 이념화만을 꾀하는 등 혁신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초현실주의 예술에 이어져 상상 적 공간, 비현실적 공간을 중시하는 공간의식을 형성시켰다.
그러나 이 초현실주의 개념이 반드시 사실주의나 추상미술과 대립하는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술적으로는 사실성·추상성도 그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 비현실 세계를 겨냥한 공간의식은 당연히 새로운 기법을 필요로 하였는데, 프로타주·데칼코마니 등과 같이 우연한형태의 무늬를 통하여 내면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수법이나, 사물을 원래의 익숙한 장소로부터 전혀 뜻밖의 장소로 옮겨 돌발성과 충격을 일으키는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의 수법 등이 있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제 1 선언》 발표 다음해인 1925년 파리에서 이러한 미학(美學)과 기법으로 창작된 작품들을 전시한 최초의 초현실주의전(展)이 열려 운동을 본격화시켰다. 참가자는 M.에른스트를 중심으로 G.데 키리코·A.마송·J.미로·J.아르프·M.레이 등이있었고, 그룹에 가입하지 않은 P.R.피카소·R.클레·P.루아 등도 출품하였다.
그 뒤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에 걸쳐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 Y.탕기·S.달리·A.자코메티 등이 참여한 가운데 우수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다. 특히 달리는 꿈이나 편집광적(偏執狂的) 환각 등을 회화화(繪畵化)한 <편집광적 비판분석방법>을 개발하여 초현실주의 미술의 제 2 세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이들 미술가를 하나의 조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동일한 미학적 이념이나 방법보다는 이들이 제각기 꿈이나 내면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고유한 자아 탐구 수단을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부는 의식의 규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자발적인 현시(顯示)를 추구하였고, 다른 일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인적 환상의 탐구 기점(起點)으로서 초현실주의를 이용하였다.

대체로 분류하면, 한편에서는 생물 형태를 띤 모호하고 암시적인 이미지들을 주로 묘사하여 감상자가 이 돌발적 이미지들로 무의식적 연상(聯想)과 창조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도록 하는 작품 경향을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완벽하게 정의내려지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미지들을 원래의 정상적 맥락에서 이탈시켜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구도로 재결합시킴으로써 감상자가 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정서에 공감하게끔 만드는 작품 경향을 추구하였다.

앞의 부류로는 아르프를 비롯한 에른스트·마송·미로 등의 화가가 있는데, 이들을 특히 유기적 초현실주의, 상징적 초현실주의라고 하였다.
뒤의 부류로는 R.마그리트를 비롯한 달리·루아·P.델보 등의 화가가 있다 30년대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은 국제적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정치적 이유로 내부적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 뒤 제 2 차세계대전중에는 브르통에 이어 달리·에른스트·탕기 등이 미국으로 망명, 이들의 활동이 미국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47년에는 파리에서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열려 달리마송 등의 탈퇴자를 제외한 이전의 참가자들이 다시 모이고 많은신인이 가입하였으나 과거의 성과를 재현하지는 못하였다.


▣ Magritte 마그리트, Rene Francois Ghislain 1898∼1967 벨기에
▣ Duchamp 뒤샹, Marcel 1887∼1968 프랑스
▣ Picabia 피카비아, Francis 1879∼1953 프랑스
▣ Chagall 샤갈, Marc 1887∼1985 러시아
▣ Miro 미로, Joan 1893∼1983 스페인
▣ Ernst 에른스트, Max 1891∼1976 독일
▣ Klee 클레, Paul 1879∼1940 스위스
▣ Dali 달리, Salvador 1904∼1989 스페인
▣ Masson 마송, Andre 1896∼1987 프랑스
▣ Arp 아르프, Jean C.1887∼1966 프랑스

 

 

 

기하학적인 순수 추상회화(抽象繪畵)운동. 쉬프레마티슴이라고도 한다.

러시아 화가 K.S.말레비치가 1915년에 처음 그린 것으로, 대상을 극도로 간략화하고 순수감성을 절대시하는 회화 양식이다. 말레비치는 <쉬프렘(supre낌me)>이란 자연형태 그대로를 묘사대상으로 하지 않고 기하학적인 색채평면 형태만을 묘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절대주의에서는 색채와 표면의 모습만이 중요하며, 이러한 추상적 경향은 말레비치가 말한 <형태의 제로(zero)>에서 출발함으로써 가능해졌다.
17년 2월혁명 후 쉬프레마티슴 회화도 새로운 사회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이 요구되었다.

색채를 지닌 평면이 독립된 요소로서, 에너지의 경제원칙에 따른 <경제적 기하학주의>라는 명칭 아래 새로이 시간·공간 속에서 지구와 달 사이의 새로운 위성계획안(衛星計劃案)으로 전개되었다.
L.M.리시츠키는 이것을 받아들여 19년부터 <프로운(PROUN;새로운 사실의 확립을 위한 계획)>을 계획하고, N.M.수에틴, I.G.차수니크 등도 각기 쉬프레마티슴의 작품을 제작했다. 쉬프레마티슴과 20년대 구성주의를 통틀어서 혁명 전후의 전위적인 예술 동향을 가리킬 때<러시아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 Malevich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1878∼1935 러시아
▣ Lissitzky 엘 리시츠키, El 1890∼1941 러시아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번창했던 미술의 유파.

특히 15세기후반부터 16세기 및 18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회화에 한하여 사용될 때가 많다. 묘선(描線)에 관심이 많았던 지성적 피렌체파에 비해, 베네치아파는 색채에 중점을 두고 감각적·관능적미를 추구했다.

베네치아미술의 출발점은 11세기에 재건된 산 마르코대성당과 그 내부를 장식하는 모자이크였다. B.조토의 혁신에 호응하는 화가는 나타나지 않았고, 15세기에 들어와서도 G.파브리아노나 A.피사넬로 등의 외래미술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15세기 중반에 가서야 비바리니(안토니오·바르톨로메오·알비체)와 베르니니(야코포·젠틸레조반니)의 두 화가일족이 베네치아파회화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조반니 베르니니는 템페라화(畵)에서 유채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하며 난색계 색채를 사용하여 베네치아파의 기본적 특색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에 V.카르파치오·A.다 메시나(시칠리아 출신) 등이 활동했다.

16세기에는 조르조네가 자연과 밀착한 서정 넘치는 서정성을 화면에 도입하였고, V.티치아노는 관능적 색채에서 극적인 빛의 효과에 이르는 폭넓은 양식을 전개하였으며, 이어서 S.피옴보·L.로토·틴토레토·P.베로네제 등이 배출되어 베네치아파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17세기는 대체로 정체적이었으나, 18세기에는 G.피아체타·G.B.티에폴로·카날레토·F.과르디·P.롱기 등 화가가 나타나 베네치아파의 최후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 바사노 가문 / 베키오 / 벨로토 / 안토니오 비바리니 / 바르톨로메오 비바리니 / 알비체 비바리니 / 야코포 벨리니 /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 Mantegna 만테냐, Andrea 1431?∼1506 이탈리아
▣ Tintoretto 틴토레토 1518∼1594 이탈리아
▣ Veronese 베로네세, Paolo 1528∼1588 이탈리아
▣ Gentile da Fabriano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1370∼1427 이탈리아
▣ Pisanello 피사넬로, Antonio 1394∼1455 이탈리아
▣ Titian 티치아노, Vecellio 1485∼1576 이탈리아
▣ Longhi 롱기, Pietro 1702∼1785 이탈리아
▣ Piazzetta 피아체타, Giovanni Battista 1682∼1754 이탈리아
▣ Antonello da Messina 안토넬로 다 메시나 1430?∼1479 이탈리아
▣ Lotto, Lorenzo 로토 1480∼1556 이탈리아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에 있는 피렌체·시에나·피사·루카·아레초등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였던 미술가에 대한 총칭.

시대와 분야를 한정시키지 않는데 예를 들면 19세기 마키아파 등도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으나, 좁은뜻으로는 13세기에 토스카나에서 활동하였던 화가들을 말한다.

13세기말 G.치마부에와 B.두치오가 등장하여 각각 피렌체파와 시에나파의 개조가 되었으나 그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토스카나 각지역에서 배출되었다. 루카의 베를링기에리일족, 피사의 준타(피사노), 엔리코 및 우골리노 디 테디체, 이른바 산 마르티노의 화가, 아레초의 마르가리토네, 피렌체의 코포 디 마르코발도, 시에나의 귀도 등이다.
모두 비잔틴미술의 강한 영향 아래 생겨난 소박한 작풍이 특색이며, 새로운 이탈리아회화의 탄생을 예고하는 청신함과 진솔함을 나타내고 있다.


▣ Cimabue 치마부에, Giovanni Cenni di Pepe 1240?∼1302? 이탈리아
▣ Duccio 두초, di Buoninsegna 1255?∼1319? 이탈리아
▣ Berlinghieri 베를링기에리, Bonaventura ?~? (활동 1235∼1244) 이탈리아
▣ Giunta Pisano 준타 피사노 ?~1260경 이탈리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자치주의 시에나현에서 배출된 화가의 한 파.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전반에 걸친 이탈리아회화의 요람기에 조토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파와 함께 이탈리아회화, 나아가 유럽회화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기초를 세운 것은 두초 디 부오닌세냐이다.
그는 비잔틴풍의 회화에 세련미를 가하여 조토의 현실감 넘치는 힘찬 표현과는 대조적인, 우아함과 장식성과 인간미가 잘 조화된 섬세한 화풍을 확립하였다.

두초의 제자인 S. 마르티니가 이 화풍을 이어받아서 프랑스 고딕 미술의 영향 아래 한층 세련미를 더하였다. 과민할 정도로 섬세하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마르티니의 예술에 이르러 시에나파의 회화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조토와 함께 이탈리아풍의 유럽적인 화가로서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다음으로 중요한 화가는 A.로렌체티·P. 로렌 체티형제이다. 제각기 개성적인 두 사람은 피렌체파의 성과를 잘 소화시켜 조토의 사후 피렌체파와 시에나파를 잇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348년의 페스트로 그 희망은 무산되었다. 14세기에는 이들 화가의 영향으로 시에나파는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화가가 시에나에서 활약하였다.
15세기로 접어들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화가는 없었으나, 사세타 조반니 디 파오로·사노 디 피에트로·마테오 디 조반니 등 독특한 환상성과 종교성을 지닌 매력적인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 Sodoma 소도마, Il 1477∼1549 이탈리아
▣ Duccio di Buoninsegna 두초 1255?∼1319? 이탈리아
▣ Martini, Simone ca 시모네 마르티니 1283∼1344 이탈리아
▣ Sassetta c.사세타 1390∼1450 이탈리아

 

 

 

북이탈리아 파도바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미술 유파(流派).

특히 15세기 중엽부터 말엽에 걸친 회화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역은 중세부터 이미 북이탈리아의 문화 중심지였고, 14세기초 B.조토가 내방하였고, 또한 구아리엔토나 알티키에로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15세기 전반 도나텔로·P.우첼로 등 피렌체 미술가의 내방에 자극되어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이 형성되었다.

이 파의 창시자 F.스쿠아르초네의 공방(工房)에서는 A.만테냐스키아보네·M.초포·N.피촐로·B.페라라·A.다 폴리 등이 배출되었다이 화파의 특색은 예리한 조각적인 선, 고대취미의 모티프, 단축법과 원근법의 과장이며, 베네치아·페라라·롬바르디아지방 등에도 큰영향을 주었으나, 16세기 베네치아파가 융성함과 동시에 쇠퇴하였다.


▣ Giotto 조토, di Bondone 1267∼1337 이탈리아
▣ Altichiero 알티키에로, de Zevio 1330∼1385 이탈리아
▣ Uccello 우첼로, Paolo 1397∼1475 이탈리아
▣ Mantegna 만테냐, Andrea 1431?∼1506 이탈리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활약한 화가 일파.

나폴리에서는 14세기부터 예술활동이 활발했으나, 다른 도시의 미술가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폴리 출신의 화가가 나타나서 독자적인화파(畵派)가 형성된 것은 바로크시대부터이다.

나폴리 회화발전에 큰 역할을 한 화가는 카라바조이다.
그는 1606년∼1607년과 1609년의 짧은 기간 체재했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으며, G.B.카라촐로, 에스파냐 태생인 J.리베라 등 이른바 카라바조파 화가들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카라바조풍(風)인 묘사와 명암대비(明暗對比)를 강조한 화법을 바탕으로 나폴리다운 체질을 느끼게 하는 독자적인 그림을 그렸다.
유달리 에스파냐의 민중적 감각을 반영한 리베라의 사실적 작품은 높이 평가받고있다.

그 밖에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느낌이 두드러진 B.카발리노,낭만주의적 풍경화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S.로사도 대표적 화가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뛰어난 프레스코장식화가 L.조르다노가 나타났는데 그는 빨리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피렌체·마드리드 등 각지에서 활약하였으며, F.솔리메나는 나폴리 바로크 회화 최후의 거장이 되었다.
이 밖에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L.포르테와 G.레코 등의 나폴리파 정물화도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눈에 띄는 화가가 없다.


▣ Caravaggio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 이탈리아
▣ Giordano 조르다노, Luca 1632∼1705 이탈리아
▣ Ribera 리베라, Jusepe de 1591∼1652 스페인
▣ Cavallino 카발리노, Bernardo 1616∼1656 이탈리아
▣ Solimena 솔리메나, Francesco 1657∼1747 이탈리아

 

 

북이탈리아밀라노를 중심으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난 화파(畵派).

처음 파도바파의 영향을 이어받은 V.포파 등이 나타나 롬바르디아 지방 특유의 장식성을 가미한 중후한 작풍을 형성하였다.
그 뒤 스포르차가(家)가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D.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빈치등이 이 도시에 찾아와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1506∼1512년 다시 이곳에 머물게 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지대하여명암법·스푸마토기법·구도법 등은 밀라노화풍에 큰 변혁을 가져오고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대표적인 화가로A.프레디스·A.솔라리·G.A.볼트라피오·B.루이니·F.멜치 등이 있다. 그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화풍을 모방하였으나 정신적인 깊이는 따르지 못하여 대체로 두드러진 작품이 없었으나,루이니는 20년경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전아(典雅)한 고전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 Foppa 포파, Vincenzo 1427?∼1516? 이탈리아
▣ Vinci 다 빈치, Leonardo da 1452∼1519 이탈리아
▣ Ferrari 페라리, Gaudenzio 1475∼1546 이탈리아
▣ Solari 솔라리, Andrea ?~1524 이탈리아
▣ Luini 루이니, Bernardino 1481?∼1532 이탈리아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14세기 초부터 16세기 중기까지 르네상스미술의 주류를 이룬 건축·조각·회화의 유파.

특히 회화에서는 주지적 합리주의와 조형적 형태주의가 그 특징이다.
피렌체회와의 전성기는 14세기 전반 G.치마부에를 이어 조토 디 본도네가 신선한 현실감각으로 전통적 중세회화와 결별하고 비잔틴양식을 극복하여,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간구성은 화면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든데서 비롯되며, 이를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로 그보다 1세기후에 등단한 마사초였다.
이 전통은 장식적인 시에나파와 대립하여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2대 조류를 이루었다. 건축가 F.브루넬레스키가 기하학적인 투시도법을 발견하여 이것이 마사초의 벽화와 도나텔로의 돋을새김〔浮彫〕에 도입된 뒤부터 회화적 현실의 표현에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피렌체파의 성과는 메디치가(家)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으며 기하학적 원근도법에서 볼 수 있는 합리적·지적 경향은 15세기 예술의 주류를 이루는 자연주의를 형성하였다.

조각가 L.기베르티는 그의 저서 《평론집》에서 미술가에게 필요한 학문으로 해부학을 들고 있는데, 자연과학 발흥과 더불어 A.베로키오·D.기를란다요·A.폴라이우올로·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I.로소 피오렌티노 등은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으로 회화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16세기에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해져 S.보티첼리의 후기작은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사실주의를 완성하면서부터 주관적 정신을 그 속에표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인체 표현속에 인간의 정신적고뇌를 표현하였는데 그 초월적 방향으로서 바로크양식의 선구자가되었다. G.바자리는 저서 《미술가 열전(列傳)》에서 피렌체 미술발전요인으로서 미술가들이 범용(凡庸)한 것과 모방에 만족하지않고 풍부한 탐구심으로 자기 스타일을 찾으려 한 정신과 이것을 가능하게 한 이 도시의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들고 있다.

피렌체파 작가로는 15세기 전반에 활동한 마사초 이외에 P.우첼로·프라 안젤리코·D.베네치아노·A.카스타뇨·F.F.리피 등과 후반에 활동한 폴라이우올로 형제, A.발도비네티·보티첼리·F.리피·기를란다요 등이 있다.
16세기에는 미켈란젤로·F.바르톨로메오·안드레아델 사르토 등에 이어서 J.폰토르모·A.브론치노와 같은 마니에리슴화가가 피렌체 회화 말기에 등장하였다.


▣ Angelico 안젤리코, Fra 1400?∼1455 이탈리아
▣ Botticelli 보티첼리, Sandro 1445∼1510 이탈리아
▣ Domenico Veneziano 베네치아노 ?1400∼1461 이탈리아
▣ Masaccio 마사초 1401∼1428 이탈리아
▣ Michelangelo 미켈란젤로,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
▣ Uccello 우첼로, Paolo 1397∼1475 이탈리아
▣ Verrocchio 베로키오, Andrea del 1400∼1461 이탈리아
▣ Vinci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1452∼1519 이탈리아
▣ Baldovinetti 발도비네티, Alesso 1425∼1499 이탈리아

 

 

15∼16세기 북이탈리아 페라라를 중심으로 성행한 화파(畵派).

르네상스시대에 들어 에스테가(家) 궁전에는 A.피사넬로·P.프란체스카 등뛰어난 화가들이 모여 새 화풍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자극을 받은 페라라파 창시자 C.투라는 풍부한 공상적 디자인을 장식면에 구사하였으며 때로는 이것을 지나치게 과장, 조형성을 왜곡하여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 뒤 프란체스코델 코사는 스키파노이아궁전 벽화에 고대신화의 우의적(寓意的)주제를 풍속화처럼 다루어 그 동적 표현에 세밀한 사실성을 가미,페라라파의 양식을 완성하였다.

15세기 후반에는 E.로베르티·B.보나시아·L.코스타 등에 계승되어 르네상스 회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16세기에 북이탈리아 회화의,중심무대는 베네치아로 옮겨갔지만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받아들여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 Dossi 도소 도시, Dosso 1490-1542 이탈리아
▣ Mantegna 만테냐, Andrea 1431?∼1506 이탈리아
▣ Pisanello 피사넬로, Antonio 1394∼1455 이탈리아
▣ Cossa 코사, Francesco del 1436?∼1478 이탈리아
▣ Garofalo 가로팔로, Benvenuto do 1481∼1559 이탈리아
▣ Tura 투라, Cosme 1430∼1495 이탈리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번영하였던 화가의 일파.

보통 16세기 말에서 17, 18세기에 배출한 화가들을 가리킨다.
볼로냐파 황금시대의 기초를 세운 것은 로드비코·아고스티노·안니발레 등의 카라치 일족이었다. 그들은 볼로냐에서 일종의 아카데미를 열고, 16세기 후반의 마니에리슴회화를 극복하는 새로운 회화를 연구하여 많은 화가에게 전파하였다. 특히 안니발레 카라치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회화를 종합한 작품으로 큰 영향을 주어 P.카라바조와 나란히 바로크 회화의 기초를 세운 화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활동하였으나, 카라치 일족이 키운 화가도 로마와 나폴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Z.도메니키노·G.레니·F.알바니·I.구에르치노는 특히 중요하다.

볼로냐파는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G.M.크레스피 등을 끝으로 중요성을 잃었다.



▣ Albani 알바니, Francesco 1578∼1660 이탈리아
▣ Carracci 카라치, 안니발레, Annibale 1560∼1609 이탈리아
▣ Guercino 구에르치노 1591∼1666 이탈리아
▣ Reni, Guido 레니 1575∼1642 이탈리아
▣ Carracci 카라치, 아고스티노, Agostino 1557∼1602 이탈리아
▣ Carracci 카라치, 로도비코, Lodovico 1555∼1619 이탈리아
▣ Domenichino 도메니키노 l581∼1641 이탈리아
▣ Lanfranco 란프란코, Giovanni 1582∼1647 이탈리아

 

 

 

정지적(靜止的)이고 질서가 잡힌 구도를 통해 전려(典麗)한 미를 찾는 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동적인 리듬을 통해 인간감정의 표출을 시도한 낭만파 화가들의 미술.

철학·문학에서의 낭만주의에 대응하여 어느 정도 그 영향하에서, 또는 18세기 미술의 독자적인 연장선 위에서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 특히 1820년대부터 40년 전후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전개를 보인 미술이다. 그러나 본래는 정신적인 양상으로받아들여진 낭만주의의 표현은 극히 여러 분야에 걸쳐 있어서, 다른 미술상의 유파(流派)나 운동처럼 양식·방법의 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무한적 풍경》을 그린 C.D.프리드리히는 치밀한 사실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F.V.E.들라크루 아의수법은 바로크적이다.
또한 주제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부터 J.D.T.제리코의 《메두사호(號)의 뗏목》 등에서처럼 현실적인 사건에 미쳤고, 문예적 소재로는 신화·기사(騎士)이야기를 비롯하여 단테·셰익스피어로부터 동시대의 낭만파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다.
이처럼 자연의 풍경이나 동물, 이국적 정서와 풍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예술가 각자가 발견해낸 낭만주의적인 해석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꿈·상상력·광기·비극·숭고미·동물적 생명력 등 다양한 낭만주의적 관념과 상상력을 그들의 주제선택에서 엿볼 수 있다.

낭만주의 미술의 경향은 정서성·상상력·목가성(牧歌性)을 찾아헤메는 18세기 미술 그 자체에 내재하였다. J.A. 와토의 목가적인 아연화(雅宴畵)를 비롯, T. 게인즈버러의 정취적인 풍경화, 18세기에 유행된 <폐허의 그림> 등에서 낭만주의의 징조를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선구자로는 악몽의 세계를 그린 F.H.퓌슬리, 환시적인 시의 세계를 그린 W.블레이크, 역시 악마적인 인간정신을 찾은 L.F.고야, 풍경 속에서 무한정하게 이어지는 환상을 발견한J.M.W.터너를 들 수 있다.
고전파의 거장 J.L.다비드는 《마라의 죽음》 등의 작품을 통하여 종종 죽음을 주제로 다루었다. 그의 제자들도 나폴레옹을 제재로 하는 전쟁화에서 죽음과 그 밖의 인간의 극적인 상황을 다루었으며, 영웅주의와 이국정서취미를 환기시킨 점에서 역시 낭만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19세기초 동시대의 문학과 미술의 강한 영향 하에서 다양한 형태로 낭만주의미술이 각국에서 일어났다.

대표적 화가로 영국의 J.컨스터블·터너, 독일의 프리드리히·P.O.룽게 등을 들 수있다. 단순하게 역사·문학·현실의 사건에서 낭만파의 제재를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미술의 영향하에서 명암과 색채의 대조, 다이내믹한 극적 구도 등으로 그 주제에 맞는 회화적 방법을 발견한 제리코·들라크루아 등이 주도한 프랑스의 낭만파는 미술사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819년 미술전람회 출품작인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22년 출품작인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작은 배》는 이후 약 20년 이상에 걸쳐서 고전파에 대항하면서 최고조에 달한 낭만주의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와 계속 대항해 왔던 J.A.D.앵그르의 작품도 《오시안의 꿈(1813)》에서는 낭만주의를 내재하고 있던것에서 알 수있듯이, 낭만주의는 정신적·심리적인 유행으로이 시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낭만주의는 1840년대부터 자연주의·인상주의의 대두에 따라 점차로 종식되어 갔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T.샤세리오와 G.모로에 의하여, 영국에서는 라파엘 전파(前派)에 의하여, 독일에서는 베크린 등에 의하여 세기말의 상징주의(象徵主義)로전개되었다.


▣ Barry 배리, James 1741∼1806 영국
▣ Fusel 퓨젤리, Henry 1808∼1874 영국
▣ Constable 컨스터블, John 1776∼1837 영국
▣ Blake 블레이크, William 1757∼1827 영국
▣ Turner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1775∼1851 영국
▣ Gericault 제리코, Theodore 1791∼1824 프랑스
▣ Delacroix 들라크루아, Ferdinand Victor Eugene 1798∼1863 프랑스
▣ Mortimer 모티머, John Hamilton 1740∼1779 영국
▣ Gros 그로, Antoine-Jean 1771∼1835 프랑스
▣ Rousseau 루소, Henri 1844∼1910 프랑스
▣ Corot 코로, Jean-Baptist-Camille 1796∼1875 프랑스
▣ Daumier 도미에, Honere 1808∼1879 프랑스
▣ Girodet-Trioson 지로데-트리오종, Anne-Louis 1767∼1824 프랑스
▣ Friedrich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1774∼1840 독일
▣ Stubbs 스텁스, George 1784∼1806 영국
▣ Bonington 보닝튼, Richard Parkes 1802∼1828 영국
▣ Goya y Lucientes 고야, Francisco Jose de 1746∼1828 스페인
▣ Cozens 카즌스, Alexander 1717∼1786 영국
▣ Mengs 멩스, Anton Raphael 1728∼1779 독일

 

 

 

미술양식의 한 경향. 로코코란, 로카유장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본래는 l8세기 프랑스의 섭정시대 및 루이 15세 시대에 유행한 장식양식에 대해 경시하는 명칭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실내장식뿐 아니라 회화·건축을 포함한 프랑스혁명 전 18세기 유럽미술양식의 명칭으로 쓰이며, 또한 폭넓게는 같은 시대의 문화·풍조도 가리킨다.
형태나 양식의 원리 그 자체는 바로크양식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지만, 섬세함·우아함·경쾌함이 강조되고 정신적·감각적으로는 오히려 바로크의 장중함·권위성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르사유로 상징되는 대궁전시대에 대한 반발, 17세기 주지주의에 대한 감각주의, 그리고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확립되는 사회적인 자유의 관념에 선행하는 감각적 자유의 자발적인 표현이 로코코양식의 배경이 되었다.

17세기말, 이미 고전주의를 주류로 하는 아카데미즘에 대하여 색채적인 매혹을 중요시하는 자세가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 감각주의의 새로운 재능인으로서 J.A.와토가 등장했다. 그의 주제·기법은 로코코를 선도했을 뿐 아니라 그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하였다.

아카데미 입회 작품으로 그린 《시데르섬에의 순례(1717, 루브르미술관)》 등, 전원에서의 남녀의 회화(會話)·사랑·음악·댄스의 주제는 <아연(雅宴)>으로서 새로운 쟝르가 되었으며, 경판 도안과 도자기에 그림넣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랑의 흥정이라는 연극적인 설정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낙원도(樂園圖)의 발상이 와토의 기본적인 주제였다.
18세기 후반에는 그리스양식이 유행하였으며, 대혁명전에는 D.디드로 등에 의하여 도덕적 회화가 칭송받았다.

퐁파두르부인의 비호하에 루이 15세 시대의 신고전양식을 리드한 F.부셰의 회화도 신화적인 장식을 묘사한 로코코적 정서에 속하고 있으며, J.B.그뢰즈 등의 도덕적 회화도 그 일화성(逸話性)·정서성의 측면에서는 역시 로코코적이다. 또, 궁정 생활과 대조적인 시민의 일상과 무심한 정물을 그린 J.B.S.샤르댕의 회화도 섬세한 실내 광선에 대한 감각과 일상의 일화적 풍경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역시 로코코적이다.


▣ Watteau 와토, Jean Antoine 1684∼1721 프랑스
▣ Boucher 부셰 , Francois 1703∼1770 프랑스
▣ Fragonard 프라고나르, Jean Honore 1732∼1806 프랑스
▣ Chardin 샤르댕, Jean-Baptiste-Simeon 1699∼1779 프랑스
▣ Greuze 그뢰즈, Jean-Baptiste 1725∼1805 프랑스
▣ Vernet 베르네, Claude-Joseph 1714∼1789 프랑스
▣ Nattier 나티에, Jean-Marc active 1685∼1766 프랑스
▣ Hogarth 호가스, William 1697∼1764 영국
▣ Gainsborough 게인즈버러, Thomas 1727∼1788 영국
▣ Goya y Lucientes 고야, Francisco Jose de 1746∼1828 스페인

 

 

 

14세기 말엽부터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나서, 전유럽을 휩쓸었던 문예부흥(르네상스)시대의 미술양식 및 시대구분의 개념.

19세기 이후, 르네상스는 일반적으로 문예부흥이라고 번역되어, 널리 유럽의 문화현상을 파악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문학·미술·사상 등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 했던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전유럽적인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술사의 통설로는 1420년 건축가 F.브루넬레스코가 고대연구의 성과를 최초로 실현한 피렌체대성당의 원개(圓蓋;돔) 공사가 기공된 무렵부터 1520∼30년경에 고전적 미술이 마니에리슴으로 이행한 연대까지의 이탈리아미술에 한정시켜 좁은 범위에 사용한다.
그런 경우 특히 1500년을 경계로 1400년대를 전기르네상스, 1500년대를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한다.

르네상스라고 하는 프랑스어는 <재생·부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견scita)에서 유래한다. 14세기의 시인 F.페트라르카와 G.보카치오 등이 사라져가는 고대예술을 그들의 새 세대로 되실리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한 이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 역사만으로 계승되고 있다.
15세기의 미술가 L.기베르티와 건축가 L.B.알베르티, A.P.A.필라레테등의 저서에서 이것을 볼 수가 있다.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G.바사리는 그의 《미술가 열전(美術家列傳, 1550)》에서 여러 차례 리나시타라는 말을 사용하여<고대미술의 좋은 양식이 야만민족의 침입과 중세 그리스도교에 의한 우상파괴운동 때문에 쇠퇴했으며,또한 조잡한 마니에라 테데스카(maniera tedesca;독일양식)와 딱딱한 마니에라 그레카 maniera greca;비잔틴양식)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13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지방에서 화가인 G.치마부에와 B.조토, 조각가인 N.피사노와 아르눌포 디 캄비오 등이 나타나 고대의 뛰어난 예술정신이 부활했다>고 서술했다.
더구나 이 고대의 재생이 고전 연구와 자연모방에 입각한 자연주의의 추진에 의한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일찍이 19세기의 J.미슐레와 J.C.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를 <인간 과세계의 발견>의 시대라고 말한 이후, 르네상스는 단순한 고대의 재생일뿐만 아니라 중세와 결별한, 오히려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관의 도래를알리는 빛나는 문화사적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르네상스는 중세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유럽문화 전체를 휩쓴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카롤링거왕조와 12세기의 문화에도 르네상스가 거론되어 복잡하고 많은 의미를 가진개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바사리가 본 것처럼 르네상스는 본래 이탈리아의 미술풍토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인식과 예술의지에서 생겨난 미술현상(美術現象)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고전고대의 문화적 기반 위에 선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의 재생은15세기에 갑자기 자각한 것은 아니다. 이미 새로운 미술의 싹은당시의 사람들이 대립시켜 취했던 중세의 고딕미술 가운데서 일찍부터 나타났다북방의 중세미술의 영향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에도 미쳤다.
그러나 이 지방의 미술은 13세기경부터 차츰 독자적인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4세기에 피렌체화파(畵派)의 기초를 확립한 조토는 풍부한 자연감정에 의해 인물의 표정이나 자태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고, 배후의 공간에 깊이와 명암을 묘출함과 동시에 화면에 합리적인 균형과 질서를 구성하여 지성과 감정의 융화를형성했다.
시에나에도 미술의 새로운 태동(胎動)이 일었다. 수많은 성모자상을 그린 B.두치오는 우아한 감수성과 감미로운 색채를 특색으로 하여 실화적인 도해력을 발휘했다. 그것을 계승한S.마르티니는 선의 리듬에 인간감정의 기복과 이국적인 정취를 표출시킨 장려한 세속적 화풍을 수립했다.
또한 로렌체티 형제는 종교화뿐만 아니라 애향적인 시민의식에 뿌리를 내린 우의적(寓意的)인 주제에도 인간의 생생한 정열과 시선을 주입하여 일상생활과 정경(情景)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한편, 공간묘사를 3차원적으로 진전시켰다.

14세기 전반까지의 이러한 토스카나 여러 도시의 미술동향을 15세기의 전기 르네상스에 선행하는 미술활동으로서 특히 플로트 르네상스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페스트(흑사병)의 내습을 전환기로 14세기 후반의 유럽사회는 극단적인 염세(厭勢)와 구원 사상에 뒤덮여서, 이탈리아미술도 그 무렵의 세속적인 사실주의와 금욕적인 초월주의의 대립이라는 상극을 반영했다.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의 방향을 정체 또는 역행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히려 주변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사실적 태도와 장식적 경향을 강화하여, 마침내 1400년 전후 약 70년에 걸쳐 유럽 각 도시의 궁정을 중심으로 전개된 몽환적이면서 섬세하고 감미로운 후기 고딕 국제양식의 풍조에 합류해 나갔다.

전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열성적인고대작품의 연구,치밀한 묘사대상의 관찰, 인체의 해부학적 연구, 빛과 명암의 광학적 추구, 공간>에 대한 기하학적 법칙성의 해명 등에 대해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러한 자연모방, 즉 인간과 자연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주의의 증대는 고대예술의 재생을 뜻하며 고전적인 이상주의에의 도달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고차원의 고전적 예술로 가는 길은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간신히 열렸다. 그는 회화·조각·건축의 조형예술은 물론, 다방면에 이르는 과학적 연구에도 뛰어나 르네상스 미술가로서 가장 전형적인<만능의 천재>였다. 그는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했으며 객관적인 묘사대상에 주관적인 깊은 정신내용을 통일시켰다.

미켈란젤로도 이 무렵 넘치는 정열과 왕성한 조형력을 구사하여 힘이 넘치는 영원한 인간상을 회화와 조각에 표현했다.
그는 오히려 사실(寫實)을 억제한 주관적인 이상형식(理想形式)에 치우쳤다. S.라파엘로는 전생애를 전성기 르네상스에바쳤다고 해도 무방하며, 고대 연구에서 얻은 식견을 종합하여 이상적인 인간미의 형식을 수립했다. 그 밖의 화가로서는 피렌체의바르톨로메오와 A.사르토,시에나의 G.A.B.소도마, 에밀리아의 코레지오와 D.도시그리고 특히 베네치아의 조르조네와 초기의 V.티치아노등이 있다.


▣ Dossi 도소 도시, Dosso 1490-1542 이탈리아
▣ Duccio 두초 di Buoninsegna 1255?∼1319? 이탈리아
▣ Ghirlandajo 기를란다요, Domenico 1449∼1494 이탈리아
▣ Raphael 라파엘로,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 Gozzoli 고촐리, Benozzo 1420∼1498 이탈리아
▣ Angelico 안젤리코, Fra 1400?∼1455 이탈리아
▣ Bronzino 브론치노, Agnolo 1503∼1572 이탈리아
▣ Lorenzetti 로렌체티, 피에트로, Pietro 1280?∼1348? 이탈리아
▣ Giotto 조토, di Bondone 1267∼1337 이탈리아
▣ Masaccio 마사초 1401∼1428 이탈리아
▣ Mantegna 만테냐, Andrea 1431?∼1506 이탈리아
▣ Michelangelo 미켈란젤로,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
▣ Domenico Veneziano 도메니코 베네치아노 ?1400∼1461 이탈리아
▣ Cimabue 치마부에, Giovanni Cenni di Pepe 1240?∼1302? 이탈리아
▣ Martini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ca. 1283∼1344 이탈리아
▣ Veronese 베로네세, Paolo 1528∼1588 이탈리아
▣ Verrocchio 베로키오, Andrea del 1400∼1461 이탈리아
▣ Botticelli 보티첼리, Sandro 1445∼1510 이탈리아
▣ Uccello 우첼로, Paolo 1397∼1475 이탈리아
▣ Vinci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1452∼1519 이탈리아
▣ Sodoma 소도마, Il 1477∼1549 이탈리아
▣ Signorelli 루카 시뇨렐리 , Luca 1445?∼1523 이탈리아
▣ Baldovinetti 발도비네티, Alesso 1425∼1499 이탈리아
▣ Vasari 바사리, Giorgio 1511∼1574 이탈리아
▣ Cellini 첼리니, Benvenuto 1500∼1571 이탈리아
▣ Lorenzetti 로첸체티, 암브로조, Ambrogio 1285?∼1348 이탈리아

 

 

 

미술에서의 사실주의는 넓은 뜻으로는 추상에 반대되는 개념인 구상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수법적으로는 그리스미술이나 르네상스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대부분의 회화와 조각에서의 현실재현의 수법, 이른바 착시적 재현의 수법(illusionism)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도 어떤 때는 양식화·이상화·왜곡·상징주의의 수법과 대립하거나 또는 그들과 융합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고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각 경우의 문맥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는 착시적으로 자연의 공간이나 사물의 형태·질감·명암을 표현하는 방법과 태도를 가리키는 경우와, 그와 같은 기법을 수반하면서도 일상적 현실 속의 풍속이나 사물을 주제로 하여 특히 서민적인 생활에 서 테마를 구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좁은 뜻의 사실주의, 사실파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쿠르베에 의해 제창·실천된 제작태도·수법, 그리고 그 유파에 적용되는데 이는 서민적인 생활에서 테마를 구하는 경향의 한전형이다.

1855년 파리세계박람회에 출품을 거부당한 쿠르베는 대회장 근처에서 개인전을 열고 <사실주의자>를 표방하여 <자기가 속한 시대의 풍속·관념·사회상을 그린다>고 선언하였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주제·테마·기법에서 확실히 사실주의적이며, 낭만주의나 고전주의에 대한 새로운 주장과 기법을 명확히 밝혔는데, 프랑스에서보다도 오히려 다른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쳐 19세기의 주요한 조류가 되었다.


▣ Courbet 쿠르베, Gustave 1819∼1877 프랑스
▣ Caravaggio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 이탈리아
▣ Daubigny 도비니, Charles-Francois 1817∼1878 프랑스
▣ Daumier 도미에, Honere 1808∼1879 프랑스
▣ Durer 뒤러, Albrecht 1471∼1528 독일
▣ Mille 밀레, Jean-Francois 1814∼1875 프랑스
▣ Goya y Lucientes 고야, Francisco Jose de 1746~1828 스페인
▣ Rousseau 루소, Pierre Etienne Theodore 1812∼1867 프랑스

 

 

 

러시아 화가M.라료노프가 20세기 초에 제창한 회화 이론.

주로 라료노프와 그의 부인 N.곤차로바가 이 이론을 실천했는데, 그들이 주장한것은 화폭의 형태들은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동력선>에 따른 분할이 아닌, 빛이 퍼져나감에 따라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선주의 그림에 나오는 주제는 뾰족한 각도의 색선의 다발로 분해가 되어 거의 추상에 가까와지는 것으로 20세기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료노프가 1915년 서유럽으로 떠나 러시아에서는 이 회화이론이 발전되지 못하였다. 서유럽에서도 이이념은 추상회화속으로 흡수되어, 그 자체로서는 계승되지 못하였다.


▣ Larionov 라리오노프 , Mikhail Feodorovich 1881∼1964 러시아
▣ Goncharova 곤차로바, Natalia Sergeevna 1881∼1962 러시아

 

 

 

1848년 런던에서 결성한 젊은 예술가들의 그룹.

약칭 P.R.B.로열 아카데미학교의 학생인W.H.헌트·D.G.로세티·J.E.밀레이등을 중심으로 J.콜린슨·T.울너·F.J.스티븐슨·W.M.로세티 등7명으로 결성되었다. 르네상스 말기의 문학·회화의 전통을 반대하고, 중세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 이전의 소박하고 참신한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기법적으로는 당시 자연신학적인 과학사조를 반영하고자연에의 침잠, 과학적인 정확함과 현미경적인 세밀함이 추구되고 있다. 또한 태양빛 아래에서의 밝고 맑은 색채를 재현하기 위해 혼합한 백색을 밑바탕에 칠하고 그 위에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는 수법을 개발하였다.

구상(構想)면에서는 J.러스킨의 《근대화가론(2권, 1846)》등의 영향으로부터예형론적(豫型論的)인 의미가 합쳐진 종교적 주제의 작품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밀레이의 작 《양친의 집에 있는그리스도(1850)》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50년 그들은 부제로 <시·문학·미술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제고찰>을 명시한 기관지 맹아(萌芽;The Gern)》를 간행하였고, 53년 밀레이가 로열 아카데미 준회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룹 활동은 거의 실질적 종결을 하였다.
그 후 헌트·밀레이의 세밀묘사는J.블레이트나 J.W.안티보르드등의 풍경화로 계속 이어졌고, 로세티의 주위에는W.모리스·E.C.반존스와 같은 중세 취미적 색혼합이 강한 디자이너나 화가들이 모였다.


▣ Rossetti 로세티, Dante Gabriel 1828∼1882 영국
▣ Hunt 헌트, William Holman 1827∼1910 영국
▣ Millais 밀레이, Sir John Everett, 1st Baronet 1829∼1896 영국
▣ Dyce 다이스, William 1806∼1864 영국
▣ Brown 브라운, Ford Madox 1821∼1893 영국
▣ Burne-Jone 번 존스, Sir Edward Coley 1833∼1898 영국
▣ Morris 모리스, William 1834∼1896 영국 (공예가)

 

 

 

빛을 색채로 환원시키는 인상주의의 감각 추구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방향을 개척한 것이 후기 인상주의이다.

이는 영국 비평가 R.프라이가 인상주의 이후에 다양한 양식들을 표현해 낸 작가들에게 편의상 붙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주로 세잔·고갱·V.고흐 3명을 가리키는데, T.로트렉·르동을 포함시키기도한다.
세잔은 형태감각이 결여된 인상주의의 화면에 대해 견고하고질서감 넘치는 화면을 구축하고자 하였고, 고갱은 인상주의의 섬세한 필치 위에 강력한 장식성과 심리적인 화면구성으로 상징주의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흐는 격렬한 감정으로 밝은 색채를 철저히 주관화하여 화면에 쏟아부음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세잔을 제외한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를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상징주의회화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인상파 이후>의 화가들이 의미내용의 상징화를 목표로 설정한데 기인한다. 즉 객관적 빛의 묘사에 치중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그들은 주관적 내면세계의 형상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 Cezanne 세잔, Paul 1839∼1906 프랑스
▣ Gauguin 고갱, Eugene Henri Paul 1848∼1903 프랑스
▣ Redon 르동, Odilon 1840∼1916 프랑스
▣ Toulouse Lautrec 뚤루즈 로트렉, Henri de 1864∼1901 프랑스
▣ Gogh 고흐, Vincent Willem van 1853∼1890 네덜란드

 

 

20세기 초 이탈리아 현대회화의 한 유파.

1917년 G. 키리코·C. 카라에 의해 제창되었다. 형이상학적인 심리를 회화 속에 표현한 미술운동으로 20세기 전반 미래주의와 함께 이탈리아 미술경향을 대표한다. 키리코가 독일에서 화가 A. 뵈클린·M. 클링거,철학자 F.W. 니체·A. 쇼펜하우어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린 환상적 작품이 계기가 되었으며, 참가화가로는 키리코·카라 외에 G. 모란디·A. 상비뇨·F. 피시스·A. 사비니오 등이 있다.
작품경향은 속도와 기계성을 강조한 미래주의의 동적(動的) 경향에 반대하여 명상적이고 조용한 감각과 건축적인 정확성으로 일상생활의 기물(器物) 등 정물을 그렸다.

흉상(胸像), 얼굴 없는 마네킹, 광장, 철도역, 거리의 후미진 구석기하학적 형상의 물체를 모티프로 하여 일종의 수수께끼같은 배합과 가공의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원근법을 쓰는 등 신비하고 마술과 같은 분위기를 표현하려 하였다. 형이상회화파는 21년 기관지《발로리 풀라스티치》의 종간과 함께 활동이 끝났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Carra 카라, Carlo 1881∼1966 이탈리아
▣ Bocklin 뵈클린, Arnold 1827∼1901 스위스
▣ Morandi 모란디, Giorgio 1890∼1964 이탈리아
▣ Klinger 클링거, Max 1857∼1920 독일

 

 

 

1912년 무렵부터 R.들로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한 화풍.

시인 G.아폴리네르가 그리스신화의 음악신 오르페우스를 따서 명명하였다. 들로네는 스스로 입체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형체 중시에 의한 색채 배제라는 점에 반발하여, 밝고 풍부한 색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밝은 색채를 되찾기 위해 M.E.슈브뢸의 색채론을 배워 색채대조법을 이론적으로 익히고, 이탈리아 미래파의 영향도 받아 색채와 형체의 조합에다 다이내믹한 운동감을 도입하여 화면에 음악적인 리듬과 선율을 가져왔다.

색채의 음악적·시적 이미지를 구체적인 대상에서 분리하여 순수하게 추구한 오르피슴 회화는 W.칸딘스키·P.C.몬드리안과 나란히 추상회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들로네 외에는 F.레제·F.피카비아M.뒤샹 등을 들 수 있다.


▣ Delaunay 들로네, 로베르, Robert 1885∼1941 프랑스
▣ Duchamp 마르셀 뒤샹, Marcel 1887∼1968 프랑스
▣ Leger 르낭 레제, Fernand 1881∼1955 프랑스
▣ Picabia 피카비아, Francis 1879∼1953 프랑스
▣ Kupka 쿠프카, Frantisek 1871∼1957 체코
▣ Delaunay 들로네, 소니아, Sonia 1885∼1979 프랑스

 

 

19세기 초의 영국 지방화파.

1803년 2월, 잉글랜드 동부 노퍽주(州)의 노리치지방에서 활약하는 화가들이 풍경화가 크롬의 집에 모여 회화·건축·조각의 진보향상을 목적으로 <노리치의 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1805∼25년까지 매년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807년에 이 파의 대표적 화가가 된 코트먼이 가입하였고, 협회의 활동은 21년 크롬의 죽음을 거쳐 34년 코트먼의 런던이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화파의 활동은 거의 풍경화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를 모방한 자연관찰의 소박한 감정을 표현한 경향이었고 이것은 이른바 고전주의적인 <이상주의적 풍경화>의 전통과 영국의 J.콘스타블이나 J.M.W.터너의 자연적 풍경화로의 방향전환에 기여했다. 노리치화파는 지방에서 일정 기간에 어느정도 공통분야와 경향을 갖는 일군(一群)의 예술가가 배출된 영국 미술사상 유일한 실례이다.


▣ Crome 크롬, John 1768∼1821 영국
▣ Cotman 코트먼, John Sell 1782∼1842 영국

 

 

 

근대 프랑스 회화의 조류.

인상주의를 과학적 방법으로 추진하고자 한 운동이다. G.쇠라가 P.시냐크의 도움을 받아 창시하였으며, 쇠라가 죽은 뒤에는 시냐크가 그 대변자가 되었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인상파의 본능적·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즉,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나가면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는‘황금분할(黃金分割)’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와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90)이다.
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성주의 및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9)가 있다.


▣ Seurat 쇠라, Georges 1859∼1891 프랑스
▣ Signac 시냐크, Paul 1863∼1935 프랑스
▣ Pissarro 피사로, Camille 1830∼1903 프랑스
▣ Cross 크로스, Henri-Edmond 1856∼1910 프랑스

 

 

1912∼17년 네덜란드 화가 P.C.몬드리안이 입체주의의 철저한 추구를 통해서 도달한 조형이론.

일체의 재현적·우연적·자의적 요소를 회화에서 추방하고, 수평·수직의 2선분과 3원색 및 무채색의 배합을 통해서 생명력의 근원을 암시하는 질서와 균형있는 구성을 살리려는 것이다. 그 이론의 배경에는 신지학(神智學)과 신플라톤주의적 사고가 있다고 한다. 17년 몬드리안은 이 이론을 바탕으로 T.두스부르크 등과 <데스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단순명쾌한 구성원리는 추상회화뿐만 아니라 건축·디자인 등의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 Mondrian 몬드리안, Piet 1872∼1944 네덜란드
▣ Doesburg 두스부르크, Theo van 1883∼1931 네덜란드

 

 

 

독일 l9세기 초의 화가 그룹.

독일 중세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를 본으로 해서 종교화의 부흥을 기도했다.1809년 F.오버베크와 F.프포르에 의하여 빈에서 교단적(敎團的) 성격의 그룹으로 발족하고, 이듬해에 로마의 폐허화된 산이시도로수도원으로 이주했다.
P.코르넬리우스·S.카롤스펠트·P.파이트·W.샤도 등을 멤버로 추가하고, 교역자화가로서 가톨릭교 계율 아래 공동제작을 했다.
사람들은 비웃으면서 나사렛사람이라고 불렀으나, 그들은 이 칭호를 자진해서 그룹 명칭으로 삼았다.

초기 르네상스의 소박성에로의 복귀, 색채에 의한 낭만파적 정감의 고취와 중세의 공동제작의 정신을 부활시킨 벽화에 의한 기념비적시각(視覺)의 개척은, 당대 독일 미술에 대한 그들의 귀중한 공헌이며, 19세기 후반의 독일 미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Durer 뒤러, Albrecht 1471∼1528 독일
▣ Overbeck 오버베크, Johann Friedrich 1789∼1869 독일
▣ Cornelius 코르넬리우스, Peter von 1783∼1867 독일
▣ Pforr 프포르, Franz 1788∼1812 독일
▣ Schadow 샤도, Wilhelm von 1788∼1862 독일
▣ Schnorr von Carolsfeld 카롤스펠트, Julius 1794∼1872 독일

 

 

 

http://blog.naver.com/doolyking/60004036029
미술 용어. 아카데믹한 이론 및 기술과 무관한 소박함이 회화의본질에 나타나 있다고 생각되는 일군의 화가들을 말한다.

20세기 초 파리의 세관(稅關)에서 근무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H.루소의 작품이 P.피카소와 G.아폴리네르 등에 의해 인정받은 일을 발단으로 해서 루소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이 높이 평가되어 근대미술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였다.

개개의 화가들은 대부분 비직업적으로 각기 자기의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소박함 즉 풋내나는 양식화 데포르마시옹 등의 공통점으로 인하여 하나의 유파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를 내세운사람은 독일의 미술평론가 W.우데였다. 우데는 루소의 최초의 전기작가이고, L.비뱅·S.루이·A.보샹·C.봉부아 등은 찾아내었으며, 1927년 이들 4명에다 루소를 포함시켜서 <거룩한 마음의 화가>전을 기획하였다.
파리의 풍경을 정성들여서 성실하게 그린 비뱅, 환상의 식물을 추구한 루이, 무구(無垢)한 신화풍경의 보샹, 천진난만한 인물상의 봉부아 등은 참으로 <거룩한 마음의 화가>들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회화의 자세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정립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 후 계속해서 이들 프랑스의 화가들 뿐만 아니라, 폴란드 태생으로 미국에서 독특한 장식적 효과로 매혹적인 화면을 조성한 M.허시필드를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각지의 소박화가(素朴畵家)들도 주목받게 되었다이러한 추세는 기본적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연면히 이어온 사실주의 전통에 대한 의문에서 발단되었고, P.고갱이 타히티를 제작지로 삼은데서 시작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교나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원시미술이나 미개미술의 조잡한 활력이 재평가된 것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소박함과 조잡함은 오늘날의 미술을 활성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 Rousseau 루소, Henri Julien Felix 1844∼1910 프랑스
▣ Bauchant 보샹, Andre 1873∼1958 프랑스
▣ Bombois 봉부아, Camille 1883∼1970 프랑스

 

 

노브고로드파에 이어 1400년 무렵부터 16세기 말에 활동한 러시아 종교미술의 중심화파.

13세기 중반 이후 모스크바가 중심이 되어 러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했던 몽골인을 격퇴하면서 모스크바가 예술중심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실적·설화적인 것보다 전통적 전제군주정치의 영향으로 이내 추상화된 종교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모스크바파는 노브고로드파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테오파네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꽃피우기 시작하였으며 그의양식은 중세 러시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이면서 수도사였던 A.루블료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루블료프는 선의 정교함과 야광색채에 중점을 둔 우아하고 숭고한 양식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15세기모스크바 회화 중 대부분의 주요 작품에 나타나 있다.

루블료프 이후 모스크바는 세련되고 명성있는 도시로 변모되었고 실질적인 동방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성향은 디오니지의 작품에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인물의 표현에 있어 윤곽만으로 과감하게 단순화시키고, 이전의 러시아화가들이 사용한 구도를 과감하게 깨뜨리는 인상적인 구도를 창출하였다.

16세기 중반무렵에는 종교적 의식·교리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 새로운 교훈적 도상법을 기초로 교회의 지시에 따르는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다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명성이 많이 사라지고 화려한 장식으로 대체되어 그 우아함을 잃어버렸다.
17세기 초에 모스크바의 뛰어난 예술가들의 모임인 이른바 스트로가노프파가 러시아·중세예술의 마지막을 주도하게 되었다.


▣ Rublyov 루블료프로, Andrey 1360/70경~1430경 러시아

 

 

 

기성수법이나 형식을 관습적으로 답습하여 독창성이 없이 반복하며 약삭빠르게 처리하려는 소극적 태도. 수법·양식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의마니에라(maniera)를 어원으로 한다.

그러나 근년, 유럽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동안의 예술현상에 대한 특정양식개념으로 주목되어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예술양식인 마니에리슴의 연대는 지역이나 예술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1520년경부터 1600년 전후에 미친다. 20세기 초까지 이 시대의 예술은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기교적으로 모방했을 뿐인 침체기 양식을 표시하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그 뒤의 연구로 성기(盛期)르네상스와 판이한 독립된 예술로서 재평가되었다.

16세기의 유럽은 종교와 과학, 정치와 경제 등 사회나 사상의 온갖 면에서 커다란 동요와 불안의 시대를 맞아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후 문예부흥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이탈리아에서는 그것들을 전형적으로 미술발전에 반영시켰다. 조화·균형·안정을 중시하는 규범적 이상미(理想美)에 대한 반발로 자연모방을 무시하고 주지적(主知的)이라고도 할 주관주의의 경향을 강화해갔다. S.U라파엘로와 B. 미켈란젤로의 영향도 받아 그 양식은 세련된 기교에 더하여 착종(錯綜)된 공간구성, 일그러진 원근법, 강한 가락의 명암법을 구사하여서 환상적인 우의적(寓意的) 표현, 이상할 만큼 변형된 비율이나 격하고 거센 운동감의 묘출, 비현실적 색채법 등을 그 특색으로 한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미술은 유럽의 궁정예술에 침투하였고, 마니에리슴도 국제양식으로 전파되어 갔다.

프랑스의 퐁텐블로파 성립에 이어, 회화에서는 틴토레토, 조각에서는 G. 볼로냐가 활동하였다.
이 밖에 네덜란드 출신자를 비롯하여 프라하빈·뮌헨 등의 각 궁정의 비호하에서 마니에리슴은 많은 예술가의 활동을 촉진시켰다.
당초의 반고전적 유미주의에서 궁정적 아카데미즘을 거쳐 점차 경직화된 절충주의 쪽으로 옮겨간 이 미술양식은 현실적 자연에 대한 긍정과 인간 생명의 고양에 뿌리박은 반(反)마니에리슴대두로 바로크 쪽에 그 길을양도하게 되었다.


▣ Bronzino 브론치노, Agnolo 1503∼1572 이탈리아
▣ Caravaggio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 이탈리아
▣ Michelangelo 미켈란젤로,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
▣ Parmigianino 파르미자니노 1503∼1540 이탈리아
▣ Pontormo 자코포 다 폰토르모, Jacopo da 1494∼1557 이탈리아
▣ Tintoretto 틴토레토 1518∼1594 이탈리아
▣ Raphael 라파엘로,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 Vinci Leonardo da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이탈리아
▣ Beccafumi 베카푸미, Domenico 1486?∼1551 이탈리아
▣ Primaticcio 프리마티초, Francesco 1504∼1570 이탈리아
▣ Vasari 바사리, Giorgio 1511∼1574 이탈리아
▣ Zuccari 추카리, Federico 1540?∼1609 이탈리아

 

 

 

19세기 말 고갱의 미학에 공감해서 파리에서 결성한 반자연주의적 화가 그룹의 명칭.

1888년 L.P.H.세뤼지에는 브르타뉴지방의 퐁타방에서 고갱의 혁신적인 가르침에 따라 대담한 색채와 평면적인 묘사법에 의한 한 장의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그 체험담을 파리로 되돌아가서 아카데미줄리앙의 젊은 화가들에게 전해 준 것에서 시작되어서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었다.
세뤼지에 외에 뷔야르 등이 그 멤버가 되었고, 당시 화가였던 마욜·발로통 등이 가입했다. 나비란 헤브라이어로 예언자를 의미하는데,일반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명칭으로 삼는 데에서 이 그룹의신비주의적 경향을 살필 수가 있다. 열렬한 가톨릭신자이고 신지학(神智學)과 신비철학에 통달했던 드니·세뤼지에·랑송 등은 나비파의 운동에 특히 신비적·종교적 취향을 부여했다.

1891∼99년에 걸쳐서 르바르크드부트빌화랑 등에서 그룹전을 개최하였다. 그 미학은 고갱을 비롯하여 루동과 퓨비스드샤반, 더 나아가서는 풍속화판화(版畵) 등의 영향을 받아, 반자연주의적·장식적·상징주의적인 것이자 조형요소(造形要素)의 자율성을 강조한 평면적이고도 대담한 화면구성으로 근대회화의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또 그들은 잡지류와도 관계를 가져 포스터·삽화·무대 장치와 의상 디자인에도 손을 댔다.

나비파의 운동은 세기말의 10년여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그 뒤 각 작가들은 각기 독자적인길을 찾았으므로, 운동은 자연히 없어졌다.


▣ Bonnard 보나르, Pierre 1867∼1947 프랑스
▣ Denis 드니, Maurice 1870∼1943 프랑스
▣ Vuillard 뷔야르, Edouard 1868∼1940 프랑스
▣ Vallotton 발로통, Felix 1865∼1925 프랑스
▣ Roussel 루셀, Ker Xavier 1867∼1944 프랑스
▣ Ranson 랑송, Paul 1864∼1909 프랑스
▣ Ibels 이벨, Henri Gabriel 1867∼1936 프랑스
▣ Serusier 세뤼지에, Paul 1863-1927 프랑스
▣ Lacombe 라콩브, Georges 1868∼1916 프랑스 (조각가)
▣ Maillol 마욜, Aristide 1861∼1944 프랑스 (조각가)

 

 

 

인상주의 회화는 대략 1867∼1886년 일련의 공통된 접근방식과 기법을 구사한 일군의 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망라한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빛과 색채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해 가시적 세계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한 점이었다. 주요화가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 폴 세잔, 베르트 모리조, 아르망 기요맹, 프레데리크 바지유 등으로서 이들은 함께 작업하고 서로 영향을 미쳤으며 공식적 인정을 받으려고 줄곧 애쓴마네를 제외하고 그들은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찍부터 문학적·일화적인 의미를 담은 역사적 신화적 주제를 그릴 것을 강조하는 전통적 아카데미 회화의 가르침에 불만을 느꼈다. 또한 아카데미 회화의 특징인 판에 박힌 공상적 또는 이상적 표현기법도 거부했다. 1860년대말에 이르러 마네의 미술은 장차 인상주의의 지도지침이 될 새로운 미학을 반영했다.
즉 전통적인 주제는 중요성이 떨어지고 예술가가 구사하는 색채와 색조, 질감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네의 회화에서 주제는 평평한 색면(色面)을 솜씨있게 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또 원근 법적 깊이를 최소화시켜 관람자가 그림에서 창출되는 환영적인 3차원 공간에 빠져들지 않고 그림표면의 형태와 관계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모네는 외젠 부댕, J. R.용킨트 같은 혁신적인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뛰어난 색감과 물감에 의한 다양한 질감으로 하늘과 바다의 변화무쌍한 순간적 효과를 묘사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또 야외에서 스케치한 것을 작업실에 가져와 유화로 완성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부댕이 그랬던것처럼 애초부터 야외에 나가 실제의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 방법을 채택했다.

1860년대말 모네·피사로·르누아르 등은 들과 강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여 특정한 시간에 자연의 빛 속에 나타나는 대상의 색채와 형태를 냉정하게 기록하고자 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풍경화의 색조인 흐릿한 녹색·갈색·회색 등을 버리고 보다 가볍고 밝으며 찬란한 색조로 그렸다. 먼저 그들은 물에 비치는 햇빛의 작용과 잔물결 위로 반사되는 색채를 그리면서 자신들의 눈에 비치는 햇빛과 그림자, 그리고 직사광선과 반사광의 복잡하고 생생한 효과를 재생시키고자 했다. 망막에 기록되는 직접적인 시각적 인상을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은 그림자에 회색과 검정색을 사용하는 것이 부정확하다고 판단하고 대신에 보색을 이용했다. 더욱이 그들은 순수한 조화색이나 보색의 불연속적인 점묘와 가벼운 붓질로 물체를 조형하여 햇빛과 그반사에 의해서 생기는 색조의 변화와반짝임을 표현하는 법을 익혔다.

그들의 그림에서 형상은 분명한 윤곽을 잃고 재창조된 야외의 현실상황 속에 명멸하고 요동하면서 비물질화되어갔다.
또한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 구성을 버리고 대신 그림틀 안에 좀더 우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물을 배치하는 것을 선호했다.이같은 새로운 기법을 인상주의자들은 풍경·나무·집뿐 아니라 도회지 거리풍경과 철도역 장면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 Monet 모네, Claude 1840∼1926 프랑스
▣ Manet 마네, Edouard 1832∼1883 프랑스
▣ Pissarro 피사로, Camille 1830∼1903 프랑스
▣ Renoir 르누아르, Pierre Auguste 1841∼1919 프랑스
▣ Sisley 시슬레, Alfred 1839∼1899 프랑스
▣ Degas 드가, Hilaire Germain Edgar 1834∼1917 프랑스
▣ Cezanne 세잔, Paul 1839∼1906 프랑스
▣ Morisot 모리조, Berthe 1841∼1895 프랑스
▣ Guillaumin 기요맹, Jean Baptiste Armand 1841∼1927 프랑스
▣ Bazille 바지유, Frederic 1841∼1870 프랑스
▣ Corot 코로, Jean-Baptist-Camille 1796∼1875 프랑스
▣ Cassatt 캐세트, Mary 1845∼1926 미국

 

 

20세기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예술운동. 미래파라고도 한다.

이 운동은 1909년 2월 20일, 시인F.T.마리네티가 파리의 《르 피가로》지에<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에 호응하여 밀라노의 U.보치오니·C.카라·L.루솔로, 파리의G.세베리니, 로마의 G.발라 등의 미술가가 1910년 2월 11일 밀라노에서의 <미래주의 화가 선언>에 이어 <미래주의 회화기법 선언>에 연서(連署)함으로써 명확한 운동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미래주의의 사상적 입장은 제1차세계대전 전 10년대 초기의 불안에 가득찬 이탈리아 사회정세, 즉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와 새로 일어선 노동자계급의 반발, 식민지 확장정책과 국수주의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전통적 문화와 복고적인 취미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급속하게 진보해가는 기계문명을 적극적으로 예술에 끌어넣어 아주 새로운 미학을 개척하는 데에 있었다.

<기관충의 탄환처럼 질주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키의 니케보다도 아름답다(미래주의 선언)>라는 마리네티의 말처럼 거기에는 속도가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었다. 미래파의 화가들은 후기인상파의 점묘주의(點描主義)와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분할주의에서 유래하는 빛과 형태의 해체방법을 활용하여 운동속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차례로 발표했다. 이런 이념은 필연적으로 기성 장르의 경계를 파괴하고 건축가·음악가등을 끌어넣고 시·장식미술·사진·영화·무대예술 등 모든 영역에 걸친 종합예술의 방향을 전개했다.

즉 F.B.프라펠라의 <미래주의음악가 선언(1910)>, 마리네티의 <미래주의연극인 선언(1911)>, A.산텔리아의<미래주의건축(1914)>을 비롯하여 그들은 공격적인 용어를 사용한 논문을 잇따라 발표했다.
<자유시> <색채음악><소음예술> <향기(香氣)의 회화>라는 혁명적 개념이 연달아 분출하였고 화가 루솔로는 13년 이후 소음음악을 언급,스스로 발명한 거대한 <소음기기>를 사용해 대중 앞에서 데먼스트레이션을 했다.
그러나 이런 미래주의의 옵티미즘은 본질적으로 기계문명을 찬미하는 성향을 나타냈으며 13년에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정치강령>을 발표한 후부터 파시즘과 결합한 형태가 되었다.
더구나 제1차세계대전으로 보치오니와 산텔리아를 잃었기 때문에 운동은 현저히 감퇴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발라 외에 15년에 그룹에 참가한 F.데페로가 중심이 되어 이른바제2의 미래파가 결성되었으며, 로마·밀라노·토리노등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지만, 이미 전위운동으로서의 통일성을 잃어 점차 쇠퇴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거의 외면되었으나 최근 그 미술사적, 문학사적 의의가 재평가되고 있다.


▣ Boccioni 보초니, Umberto 1882-1916 이탈리아
▣ Carra 카라, Carlo 1881∼1966 이탈리아
▣ Balla 발라, Giacomo 1871∼1958 이탈리아
▣ Severini 세베리니, Gino 1883∼1966 이탈리아
▣ Luigi Russolo 루이지 루솔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의 혁신운동. 포비즘이라고도 한다.

강렬한 색채를 나란히 늘어놓는 대담한 수법을 통해 색채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회화의 새로운 개성을 추구했다. 야수파 화가들은 명확하고 이론적인 전제를 기초로 결성된 것도 아니고 그룹으로서의 선언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유사한 의도를 가진 작가들이서로 교제와 접촉을 통해 차츰 하나의 동아리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그 범위는 때로 불분명했으나 기본적으로 기원을 달리하는 다음3개의 소그룹에서 성립되었다.

첫째 그룹은 H.마티스·A.마르케·H.망갱·C.카무앙으로 이루어진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의 G.모로의 작업실에서 공부한작가들.

둘째 그룹은 파리 근교의 샤투에서 살며 함께 제작했던 A.드랭·M.블라맹크의 이른바 샤투파

셋째 그룹은 좀 늦게 등장했던 H.프리에스·R.뒤피·G.브라크로 대표되는 르아브르 출신 작가들이다.

그 밖에 네덜란드 출신 K.동겐이 야수파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들은 앵데팡당전이나 베르트 베유화랑, 그리고 1903년 창설된 살롱도톤을 발표 장소로 삼아 하나의 그룹으로 통합되어 갔는데, 1905년의 앵데팡당전에서 브라크를 제외한 미래의 야수파 작품들이 거의 동시에 출품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살롱 도톤의 제7실에서 주최자의 배려로 마티스·드랭·망갱·마르케·카무앙·블라맹크 등의 생생한 색채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때 비평가 L.보크셀이《질브라스》지(紙)에서 전시회장을 소개하면서 중앙에 전시되었던 F.마르크의 고전적인 어린이조각을 가리켜 <야수(포브)들에게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조소한 데서 우연히 야수파(포비즘)의 명칭이 생겨났다.

야수파의 양식은 인상파 이후의 각종 경향, 특히 V.고흐의 색채표현과 격렬한 감정의 표출, P.고갱의 장식적 색면(色面), 나아가 P.시냐크 등 신인상파의 신선한 모자이크모양의 색채단위에 의한 구성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 P.세잔의 예술은 1907년에 결정적으로 재평가되어 야수파의 종말에 커다란 작용을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은 출발점에서부 터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중심적 존재는 야수파 작가 가운데 최연장자인 마티스이며,그는 여러 형태로 이 그룹을 이끌었으나 최초의 진정한 야수적 경향의 작품을 제작한 것은 드랭이었다. 주제면에서 야수파의 많은 작가들은 인상주의적 전통에 연관되어 현실세계의 즐거움을 솔직하게 그렸다.

야수파 운동은 1905∼1908년 무렵까지 겨우 몇 년 밖에 지속되지못하였으며, 그 뒤 동아리의 다수는 금욕적인 색조에 의한 구성적 방향으로 전환하거나 전통적인 고전적 세계로 복귀하였다.


▣ Matisse 마티스, Henri Emile Benoit 1869∼1954 프랑스
▣ Derain 드랭, Andre 1880∼1954 프랑스
▣ Vlaminck 블라맹크, Maurice de 1876∼1958 프랑스
▣ Dufy 뒤피, Raoul 1877∼1953 프랑스
▣ Braque 브라크, Georges 1882∼1963 프랑스
▣ Marquet 마르케, Albert 1875∼1947 프랑스
▣ Dongen 동겐, Kees van 1877∼1968 네덜란드
▣ Rouault 루오, Georges 1871∼1958 프랑스
▣ Manguin 망갱, Henri Charles 1837∼1911 프랑스
▣ Friesz 프리에즈, Achille Emile Othon 1879∼1949 프랑스

 

 

 

20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미술운동.

표현주의는 먼저 회화에서 시작하여 조형미술 전반에 미쳤으며 나아가 문학·연극·음악·영화 등 여러 분야에 파급되었다.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감정·감각의 직접적 표현이며 회화의선·형태·색채 등은 그것의 표현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구성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되었으며,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는 1880년대부터 그 싹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명확하게 자리잡은 것은 1905년무렵이다. 특히 독일의 경우,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표현주의가 발전하였다. 20세기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는 네덜란드의 V.고흐와 프랑스의 P.고갱을 선구로하고 있다.

고흐는 스스로 인상주의 전통에 속한다고 생각하였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감성적·상징적 특성은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더 적극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자연을 <인간의 심각한정열을 표현한 것>이라고 과장하였다. 이것이 색채를 감성적·상징적맥락으로 처음 사용하게 된 경우이며 선 또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갱은 더욱 의식적으로 인상주의를 깨뜨렸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표현주의의 주요한 요소가 된 상징주의의 규범을 명확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화가였다.

E.베르나르의 영향을 받아 모든 형태를 단순화·평면화시켰고 사실주의와 유사성이 전혀 없는 색채를 사용하였다. 또한 새로운 양식에 대한 대응으로 내용의 단순성을 추구하였는데 초기에는 브르타뉴 농민사회에서, 후기에는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서 그 단순성을 찾았다.
유럽 도시문명에 염증을 느낀 고갱은 이후 표현주의자들이 열중하게된 원시미술이나 민속미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고흐와 고갱을 알고있던 노르웨이 출신의 E.뭉크는 불안·공포·애정·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 그 가능성을 탐구한 표현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자신의 강박관념을 나타내고자 한 그는 그래픽기법의 단순한 직접성을 원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절규(1893)》는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적이고 상징적인 작품으로, 세기말 예술의 장식성을 타파하는 표현주의 미술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한편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한 가면을 이용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된 비열함을 그린 벨기에 출신의 J.앙소르,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친 스위스의 F.호들러도 초창기의 중요한 작가이다.

표현주의 미술의 정착은 1905년 무렵 독일에서 E.L.키르히너 주도로 브뤼게파가 결성되면서부터였다. 이 그룹의 회원인 E.헤켈·K.S로틀루프 등은 자연을 피상적으로 묘사하는 전형화된 인상주의에 반감을 가졌고, 무기력해진 독일 미술에 정신적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으며, 근원적·원시적·개성적·자발적 표현을 통하여 이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 뒤 E.놀데와 M.페히슈타인·O.뮐러도 이 그룹에 합류하였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1890년대의 선배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의 목각장식과 A.뒤러·M.그뤼네벨트와 같은 중세북유럽 미술가들의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독일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거칠고 대담하며 강렬한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진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불규칙하고 비뚤어진 선과 거칠고 빠른 붓놀림 및 눈에 거슬리는 색채 등을 사용하여 불안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혼잡하고 격앙된 구도의 도시풍경과 여러 주제를 묘사하였다. 브뤼게파의작품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표현주의를 확산시켰다.
한편 1911년 F.마르크와 러시아 출신 W.칸딘스키 등은 블라웨라이터 그룹을 조직해 뮌헨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마르크는 동물을 통해 세계를 다소 감상적으로 표현하였고 곧 순수 추상으로 전환하였다.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정신적체험의 표출을 목표로 하는 추상화를 개척하였으며 A.마케·L.파이닝거는 입체주의적인 형태의 분석과 재구성을 추구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브뤼게파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감정을 자제하며 형식요소들간의 조화에 좀더 관심을 기울였다. 표현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 후 냉소주의·소외·환멸감이 팽배한 전후 분위기와 어울려 독일 미술의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 운동의 후기 참가자들 가운데 G.그로스·O딕스는 표현주의와 사실주의를 혼합하여 신즉물주의라고 하는 보다날카로운 사회비판 미술양식을 개발하였다.


▣ Durer 뒤러, Albrecht 1471∼1528 독일
▣ Marc 마르크, Franz 1880∼1916 독일
▣ Nolde 놀데, Emil 1867∼1956 독일
▣ Macke 마케, August 1887∼1914 독일
▣ Dix 딕스, Otto 1891∼1969 독일
▣ Heckel 헤켈, Erich 1883∼1970 독일
▣ Kirchner 키르히너, Ernst Ludwig 1880∼1938 독일
▣ Gauguin 고갱, Eugene Henri Paul 1848∼1903 프랑스
▣ Kandinsky 칸딘스키, Wassily 1866∼1944 러시아
▣ Gogh 고흐, Vincent Willem van 1853∼1890 네덜란드
▣ Hodler 호들러, Ferdinand 1853∼1918 스위스
▣ Munch 뭉크, Edvard 1863∼1944 노르웨이
▣ Schmidt-Rottluff 슈미트 로틀루프, Karl 1884∼1976 독일
▣ Mueller 뮐러, Otto 1874∼1930 독일
▣ Soutine 수틴, Chaim 1894∼1944 프랑스

 

 

 

제1 · 제 2 차세계대전 사이인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한 한 무리의 외국인 화가들.

중세와 18세기에 외국 예술가들이 예술의 본고장인 파리에 모여일종의 파리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두 세계대전사이 파리에서 활동한 외국인화가들의 특수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으로 사용된다.

대표적 화가로 이탈리아의 A.모딜리아니, 러시아의 M.샤갈, 폴란드의 M.키슬링, 리투아니아의 C.수틴, 불가리아의 J.파스킨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대개 1883년∼1900년 사이에 출생한 유대계 외국인들로 제 1 차세계대전 후 조국을 떠나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활동하였다. 입체주의 영향을 받아 친교를 맺기도 하였으나 야수파·입체파 화가들처럼 특정한 유파를 형성하거나 특정한 운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유년시대 회상에서 주제를 찾은 샤갈이나 파리생활에 동화된 모딜리아니·파스킨과 같이 저마다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 나라의 예술전통에 뿌리를 두고 국제적 유랑자로서의 애환과 정서를 작품 속에 표현하였으며 순수한 조형적 실험이나 어떤 특정한 이념을 주장하지 않고 주로 일상적·구상적 테마를 추구하였다.

작품들에서는 주로 낭만적이고 서정성을 띤 표현주의적 경향이보이고, 우아한 애수가 깃든 인물상과 섬세한 관능미를 표현하였으며, 소박한 공상과 격렬한 정서를 나타내는 등 저마다의 감성을 화폭에 담았으나 공통적으로 불안과 애수가 바탕에 있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파리에서 활동하는 내외 예술가들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Modigliani 모딜리아니, Amedeo 1884∼1920 이탈리아
▣ Chagall 샤갈, Marc 1887∼1985 러시아
▣ Soutine 수틴, Chaim 1894∼1944 프랑스

 

 

 

19세기말 프랑스화파.

1888년 P.고갱이 브르타뉴지방의 작은 마을 퐁타방에 체류하고있을 당시 뜻을 함께 한 젊은 화가들의 그룹을 말한다. 미세한 색면분할(色面分割)과 점묘법(點描法)을 사용하는 인상주의에 반대하며, 강한 윤곽선으로 형태를 구분하고 짙은 색면으로 단순화하는 종합주의 화풍을 구축하였다.
이는 감각적 표현과 관념적 내용을 종합하려는 시도이며 이듬해 파리에서 인상주의와 종합주의에 관한 전시회를 열었다. 이 화파에는 고갱·E.베르나르를 비롯, C.라발·H.모레 외에 후일 나비파를 결성한 P.세뤼지에 등이 속하였다.


▣ Gauguin 고갱, Eugene Henri Paul 1848∼1903 프랑스
▣ Bernard 베르나르, Emile 1868∼1941 프랑스
▣ Serusier 세뤼지에, Paul 1863-1927 프랑스
▣ Maufra 모프라, Maxime C.1863∼1918 프랑스
▣ Moret 모레, Henri 1856∼1913 프랑스

 

 

16세기 프랑스에서 퐁텐블로 궁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미술가들과 그 예술. 바르비종파(Ba-rbizon派)라고도 하며 2기로 분류한다.

제 1 기는 1530년 프랑수아1세가 궁전의 대대적인 개축을 위해 이탈리아로부터 피오렌티노·F. 프리마티초를 초청하였던 때부터 70년 프리마티초의 죽음까지를 말한다. 그들은 B.첼리니를비롯하여 많은 이탈리아 미술가들을 거느리고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것은 이탈리아 마니에리슴의 프랑스 이식(移植)을 뜻하였으며, 프랑스의 고전주의적 전통의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제 2 기는 16세기 말부터 앙리 4세의 치하에서 플랑드르 화가들이 참가한 시기인 국제마니엘리슴 양식이 성행하던 때까지를 뜻한다.

제 1 차 퐁텐블로파의 H.루소와 프리마티초가 아바테의 협력을 얻어 완성한 《앙리 2세의 갤러리》 등은 지금도 퐁텐블로궁전에 있다.
여기에는 호화스럽지 않고 세련된 시상(詩想)이 넘치는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1542년 무렵부터 일련의 목판화 퐁텐블로파의 양식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결국 루소의 장식양식의 영향이 컸고 <유혁세공>이라고 하는 장식 디자인은 모든 장식예술의 영역에 퍼져나갔다.종교미술로는 루소의《피에타(1535)》외에 조각가 P.봉탕과 공동으로 제작한 프랑수아 1세 묘》프리마티초와 조각가 G.필론의 공동작품인 앙리 2세 묘》 등 독자성이 높은 묘비예술(墓碑藝術)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40년 루소가죽은 뒤부터 아카데믹한 고전주의 경향이 생겨났는데 이와 함께 조각가 J.쿠종, 초상화가 J.클루에,건축가 뒤 세르소 등 프랑스인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A.카론은 뒤에 종교전쟁의 학살 장면과 제례의 행렬을 똑같은 밝기의 색조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제 2 차 퐁텐블로파는 T.브루이유·A.뒤보아·M.프레미네 등이 대표적이다.


▣ Rosso Fiorentino 로소 피오렌티노 1495∼1540 이탈리아
▣ Caron 카롱, Antoine 1521∼1599 프랑스
▣ Clouet 클루에, Francois 1510∼1572 프랑스
▣ Rousseau 루소, Henri Julien Felix 1844∼1910 프랑스
▣ Abbate 아바테, Niccolo dell' C.1512-1571 이탈리아
▣ Cellini 첼리니, Benvenuto 1500∼1571 이탈리아
▣ Primaticcio 프리마티초, Francesco 1504∼1570 이탈리아

 

 

 

19세기 프랑스의 화파.

파리 교외 퐁텐블로 숲 부근에 있는 바르비종마을에서, 주로18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머무르면서 풍경을 그린 화가들을 일컫는다.

T.루소가 그 중심인물이었으나특정한 주장을 내세운 통일된 집단은 아니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성향과 화풍에 따라서 다양한 방향이 전개되었다. 다만 퐁텐블로 숲에 대한 애착과 그 장소에서 작업한다는 자연주의적 자세가 공통점이며, 낭만주의로부터 인상주의로 옮겨가는 시대의 자연주의에 대한 동향을 형성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요 화가는J.코로·J.밀레·J.뒤프레·C.F.도비니 등이며 동물조각가들도 참가하였다. 이 화가들의 화풍은 고전적인 역사풍 경화에서 벗어나 자연의 신비적·범신론적(汎神論的)인 감정을 묘사 한다는 낭만주의·자연주의적 풍경에서 출발하여 점차보다 현실적인 시각효과를 추구하는 쪽으로 다다른다. 인상파의 외광주의(外光主義)를 직접 지도한 도비니 등의 화풍이 그 보기이다.



▣ Corot 코로, Jean-Baptist-Camille 1796∼1875 프랑스
▣ Courbet 쿠르베, Gustave 1819∼1877 프랑스
▣ Daubigny 도비니, Charles-Francois 1817∼1878 프랑스
▣ Millet 밀레, Jean-Francois 1814∼1875 프랑스
▣ Troyon 트루아용, Constant 1810∼1865 프랑스
▣ Diaz de la Pena 디아즈 드 라 페나, Narcisse-Virgile 1807∼1876 프랑스
▣ Dupre 뒤프레, Jules 1811∼1889 프랑스
▣ Jacque 자크, Charles Emile 1813∼1894 프랑스
▣ Rousseau 루소, Pierre Etienne Theodore 1812∼1867 프랑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한 유파.

뒤셀도르프미술학교를 중심으로P.코르넬리우스, W.카울바흐,W.샤도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고딕시대의 종교와 예술과의 융합을 동경하는 낭만주의를 표방하고, 색채에의한 감정표현을 존중하여 종교적, 역사적 주체로 대규모의 벽화를 제작하였다.


▣ Cornelius 코르넬리우스, Peter von 1783∼1867 독일
▣ Schadow 샤도, Wilhelm von 1788∼1862 독일

 

 

 

16세기 전반에 독일 남부의 다뉴브강(江) 유역 지방에 퍼졌던 독일 회화의 한 유파(流派).

근대 풍경화의 성립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이 파에 속하는 주요 작가로는 레겐스부르크의 A. 알트도르퍼(1480~1538)를 비롯하여 V.후베르(1485?~1553), 청년시절의 L.그라나하 등이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나무가 무성한 숲이나 투명한 대기 아래펼쳐진 산과 들 따위의 웅대한 경관 속에 인물을 배치하여 환상에 넘친 시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 때까지 인물의 배경 역할만 맡았던 자연풍경이 화면의 구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회화의 한 분야로서의 풍경화를 성립하게 하였던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Altdorfer 알트도르퍼. Albrecht c.1480∼1538 독일
▣ Cranach the Elder, 크라나흐, Lucas 1472∼1553 독일
▣ Huber 후베르. Wolf c.1490-1553 독일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 단체.

1905년 독일 '드레스덴 실업학교'의 건축학과 학생 4명(그룹의 이름을 지은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 프리츠 블레일, 에리히 헤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이 결성했다.

1906년 이 단체의 가입을 요청한 에밀 놀데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슈미트 로틀루프는 "브뤼케파의 목적의 하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브뤼케파에 속한 화가들은 막스 페히슈타인과 오토 뮐러스위스 미술가인 귀노 아미에, 핀란드의 상징주의자인 아크셀리 갈렌 칼렐라, 네덜란드의 야수파 화가인 케스 반 동겐 등이 있었다.

브뤼케파의 미술가들은 원시주의에 영향을 받아 대담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을 강조한 단순한 양식으로 온갖 다양한 주제들(인물풍경·초상·정물 등)을 그림과 판화로 제작했다. 키르히너와 헤켈은 드레스덴 민속박물관에서 본 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의 미술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 원시주의가 브뤼케파의 양식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브뤼케파 화가들의 작품에는 공포나 불안이 잠재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나타나며, 이런 점에서 그들의 미술은 마찬가지로 원시미술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좀더 서정적인 방식으로 형태와 색을 다룬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과 구별된다. 브뤼케파의 미술은 또한 독일 후기 고딕양식의 목판화에 보이는 표현적인 단순함과 노르웨이 화가인 에드바르트 뭉크의 판화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06년 드레스덴의 자이페르트 램프 공장에서 열린 최초의 브뤼케파 전시회는 독일 표현주의의 시작을 알린 것으로, 이때부터 1913년까지 정기적으로 전시회가 열렸다(그러나 1911년쯤 브뤼케파의 주된 활동은 이미 여러 회원들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옮겨갔음).
이 그룹은 또한 '명예회원'을 모집하여 그들에게 해마다 보고서를 발행하고 지금은 매우 귀중한 수집품목이 된 판화 원본들을 선사하기도 했다.

회원들 사이의 분열은 언제나 있었지만 1911년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1913년 키르히너가 〈브뤼케파 미술가 단체의 연대기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ucke〉에 그들의 활동에 관해 지 나치게 주관적인 보고서를 실은 것을 계기로 이 그룹은 해체되었다.

브뤼케파의 화가들은 인간의 투쟁과 고통을 다룬 매우 감동적인 유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목판화를 부흥시켜 그것을 20세기의중요한 표현매체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 Dongen 동겐, Kees van 1877∼1968 네덜란드
▣ Heckel 헤켈, Erich 1883∼1970 독일
▣ Kirchner 키르히너, Ernst Ludwig 1880∼1938 독일
▣ Nolde 놀데, Emil 1867∼1956 독일
▣ Gallen-Kallela 갈렌 칼렐라, Akseli 1865-1931 핀란드
▣ Mueller 뮐러, Otto 1874∼1930 독일
▣ Schmidt-Rottluff 슈미트 로틀루프, Karl 1884∼1976 독일
▣ Pechstein 페히슈타인, Max 1881∼1955 독일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한 파. 운동이나 유파가 아닌, 1911∼1914년까지의 작품을 함께 전시했던 미술가들의 집단을 말한다.

이름의 유래는 창립회원인 F.마르크와 W.칸딘스키가 공동편집한 미학평론집 《청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사실주의(寫實主義) 원칙을 무시하고 색채 강조와 형태 과장 등에 프랑스의 입체주의 미학을 도입함으로써 화면을 정신성이 강조된 신비로운 형상으로 구성하였다.
이는 칸딘스키·P.클레 등에 의해 주도되어 표현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청기사파에 앞서 결성된 브뤼케파의 표현주의와 달리 서정적 추상성을 추구하고 다양한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어 추상미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첫 전시회는 1911년 뮌헨 탄호이저 현대미술관에서 A.루소·D.부를류크·A.마케 등의 참가로 개최되었다. 마지막 전시회는 13년 베를린의 슈투름미술관에서 열렸으며 A.트랭과 P.피카소 등이 참가하였다.
14년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해체되었으나 그 예술적 이념은 칸딘스키·클레·A.야울렌스키 등이 결합하여 24년에 결성한 <청색 4 인조(Die Blaue Vier)>에 의해 이어졌다.


▣ Rousseau 루소, Henri Julien Felix 1844∼1910 프랑스
▣ Derain 드랭, Andre 1880∼1954 프랑스
▣ Vlaminck 블라맹크, Maurice de 1876∼1958 프랑스
▣ Braque 브라크, Georges 1882∼1963 프랑스
▣ Kandinsky 칸딘스키, Wassily 1866∼1944 러시아
▣ Larionov 라리오노프, Mikhail Feodorovich 1881∼1964 러시아
▣ Goncharova 곤차로바, Natalia Sergeevna 1881∼1962 러시아
▣ Picasso 피카소, Pablo 1881∼1973 스페인
▣ Klee 클레, Paul 1879∼1940 스위스
▣ Macke 마케, August 1887∼1914 독일
▣ Arp 아르프, Jean C.1887∼1966 프랑스

 

 

 

제1차세계대전(1914∼18) 때부터 전후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전개된 미술 및 문학상의 운동.

반미학적(反美學的)·반도덕적인 태도를 특색으로 하는데, 운동이 전개된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성격이 반드시 한결같지는 않다.
대전 중의 중심지는 스위스 취리히였으며, 이곳에 전쟁을 싫어하여 모인 젊은 예술가들이 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아 부정과 파괴 정신을 호소했다.

루마니아 출신의 시인 T.차라, 독일의 작가겸 연출가H.발, 작가R.휼젠베크, 미술가 H.아르프·H.리히터 등은 1916년 2월, 전시장과 무대를 가진 예술가 클럽<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여기를 근거지로 일체의 전통적 가치나 인습적 형식과 이성의 우위에 도전하여 이들을 우롱하고 부정하는 데모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 때 그들은 무심코 펼쳐든 라루스 사전에서 우연히 눈에 띈 단어 <다다>를 운동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 취리히 다다는 전위미술전을 개최하거나 차라 편집의 잡지 《다다》를 발행하고, 그 잡지에서 우연의 모티프를 이용한 시의 새로운 형식을 개척하기도 했다.

이런 욕구를 제일 먼저 포착하여 전통미의 급진적인 부정을 구체화한 미술가는 M.뒤샹이다.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유럽현대미술전 <아모리 쇼>에서 회화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No.2》로 스캔들을 일으킨 그는 15년 뉴욕에 이주하여 레디메이드(기성품)를 그대로 조형적(造形的) 오브제로 전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다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화랑<291>의 중심적 존재로서 취리히와 거의 같은 시기에 다다적인 운동을추진했다.
이 서클에는 F.피카비아·만 레이 등이 있었다. 피카비아는 17년 바르셀로나에서 잡지 《391》을 창간한 후 취리히 다다와 합류했다.
그가 차라를 도와 편집한 《다다 Ⅲ》에는 다다의 선언문이 게재되었다.

독일의 다다는 휼젠베크의 자극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베를린의 서클에서는 대전 후의 사회 상황을 반영하여 강한 정치색을 띠었다.

여기서는사진몽타주의 기법이사회참여의 표현으로 개척된 것이 주목할만하다. 특히 독일 군국주의와 반동적 자본가층을 통렬히 비판한 화가G.그로스의 활약이 돋보였다.

하노버에서는 시인이기도 했던 K.슈비터스(1887∼1948)가 혼자서 잡지《메르츠》를 발행하였다. 그는 큐비즘의 파피에 콜레(콜라주)에서 힌트를 얻어 일상생활의 폐기물을 소재로 한 반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쾰른에서는 1919년H.아르프·M.에른스트·J.바르겔트(1891∼1927) 등이 잡지《통풍기》로써 다다운동을 일으켰다.

에른스트는 기계의 도판을 조합시킨 콜라주 작품에서 환각이나 무의식 세계를 파헤치는 실마리를 찾아냈다. A.브르통·P.엘뤼 아르·R.아라공·P.수포 등 잡지 《문학(1919 창간》에 의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다다는 차라·에른스트·피카비아 등을 맞아 강력한운동체가 되었다.
브르통과 수포는 보름간 스스로 일종의 치매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말을 기술한 시집《자기장(磁氣場)》을 만들었는데, 이 시도는 이미 파괴와 부정의 다다를 초월하여 무의식 영역에서 미지의 현실을 찾으려고 하는 창조적인 실험이었다.

파리의 다다는S.프로이트에게 공명하여 내적 세계로 눈을 돌린 브르통이 정치변혁을 지향하는 아라공·엘뤼아르와 결별했을 때 끝났으며 쉬르레알리슴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 Arp 아르프, Jean C.1887∼1966 프랑스
▣ Duchamp 뒤샹, Marcel 1887∼1968 프랑스
▣ Picabia 피카비아, Francis 1879∼1953 프랑스
▣ Ernst 에른스트, Max 1891∼1976 독일
▣ Grosz 그로츠, George 1893∼1959 독일
▣ Schwitters 슈비터스, Kurt 1887∼1948 독일
▣ Hannah Hoch 회흐 1889∼1978 독일

 

 

20세기 미술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미술운동.

1907∼1914년 파리에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에 의해 생겨났다. 입체파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종래의 이론에 반발하여 원근법·단축법·모델링·명암법 등의 전통적 기법을 거부함으로써 화폭의 2차원적 평면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자연을 예술의 근거로 삼았지만 그 형태와 질감 및 색채와공간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상을 철저히 분해하여 여러 측면을 동시에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입체파라는 용어는 화가인 앙리 마티스와 비평가인 루이 보셀이 1908년 브라크가 그린 〈레스타크의 집〉(스위스 베른 헤르만 루프미술관)을 보고 '입방체로 이루어진 그림'이라고 조롱한 데서 유래한다.

브라크의 작품에 나타난 집의 양감, 나무의 원통 형태, 황갈색과 초록색의 색채는 1909년까지 입체파 화가에게 많은 영감을 준 폴 세잔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새로운 표현 양식의 전조가 된 것은 1907년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이다.
이 그림에서는 세잔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색채를 통해 원근감이 표현되어 있는데, 따뜻한 적갈색 계통은 튀어나와 보이고, 차가운 파란색 계통은 들어가 보이도록 사용되었다.

1910∼1912년은 분석적 입체파 시대로 불리는데 이때 그려진 그림은.형태의 분해나 분석을 보여준다. 주로 직각과 직선 구도가 많이 쓰였으며 피카소의 〈만돌린을 켜는 소녀〉(1910, 뉴욕 개인 소장)에서 볼 수 있듯이 조각처럼 입체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보는 사람이 화가의 주요관심사(형태 자체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색채를 제한했기 때문에 단색조(황갈색·갈색·회색·크림색·초록색·푸른색 계통)의 경향을 보인다. 단색조는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상의 다면적이고 다각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이때부터 대상은 서로 겹쳐지는 불투명하거나 투명한 평면으로 분해 되어버렸는데, 이런 평면들은 깊이를 향해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아래에서 위로 화면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분석적 입체파에서 화면 구성은 피카소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1909~10러시아 연방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에서와 같이 대개 중앙에 형태가 빽빽하게 모여 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분해된 평면의 크기는 점점 커진다.
또한 구상적 소재와 글자를 결합하기도 하는데, 글자는 추상성에 대한 화가의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입체파 화가들은 주제로 악기·병·주전자·유리잔·신문 등의 정물과 인물 초상 및 인체를 주로 다루었다. 소재에 대한 관심은 종합적 입체파 시대인 1912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형태의 결합 또는 종합을 강조하고 있다. 종합적 입체파들은 형태가 보다 크고 장식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분절적·평면적인 반면 색채의 역할은 한층 증대되었다.

신문이나 담뱃갑 같은 비회화적 요소를 도입하여 물감으로 그려진 부분과 결합시키기도 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매끄러운 표면과 거친 표면이 서로 대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러한 콜라주 기법은 질감의 차이를 더욱 강조하는 동시에, 회화에서 현실과 환영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 Duchamp 뒤샹 , Marcel 1887∼1968 프랑스
▣ Braque 브라크, Georges 1882∼1963 프랑스
▣ Leger 레제, Fernand 1881∼1955 프랑스
▣ Delaunay 들로네, Robert 1885∼1941 프랑스
▣ Gris 그리스, Juan 1887∼1927 스페인
▣ Picasso 피카소, Pablo 1881∼1973 스페인
▣ Delaunay 들로네, Sonia 1885∼1979 프랑스

 

 

 

1921년경 러시아 혁명을 전후하여 소련에 나타난 전위미술(前衛美術)운동의 한 일파로, 동유럽에서 중유럽에 걸쳐 발전한 대규모의 국제적 예술운동.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있는 공업재료(금속·유리 등)를 사용해서 사실주의를 배격하고 물리학적인 균형 감각에 의거한 추상적인미(美)나 운동이라는 역동적인 미를 표현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20년의 로드첸코의 《매다는 구성》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기념탑》 등이 있다.

그러나 구성주의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21년 스템베르그형제와 메두네츠키의 전람회에서였다. 같은 해 로드첸코 등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서의 예술의 역할이란 직접 생산활동에 참가를 하는 생산주의예술(proizvodstvennoeiskusstvo)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예술의 유용성을 강조하자 순수조형을 지향하는 A.페브스네르와 N.가보형제·W. 칸딘스키 등은 유럽으로 망명하여 구성주의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 생산주의적 구성주의자는 예술 기술자로서 의자나 램프 등의 실용품·포스터·무대장치의 디자인·사진등을 직접다루고, 그 중에는 소련외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활약한 사람도 있다. 소련국내의 생산주의적 구성주의는 30년경 그 형식주의에 편중한 경향을 비판받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체된다. 한편 20년대 후반 건축의 영역에서는 서구의 근대건축 운동과 발맞추어 기능주의 건축을 주장했지만 30년대 초에는 복고적인 고전주의로 대체되었다. 22년 베를린의 러시아 미술전에서 처음으로 서유럽에 전해진 구성주의는 진보적인 전위예술가에게 받아들여져, 독일의 L.모흘리 나지, 네덜란드의 P.C.몬드리안·팬두스부르크(신조형주의),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A.오장팡(유리즘)·F.레제(기계주의) 등에 의해 넓은 뜻의 구성주의가 성립했다. 그들의 활동은 소련에서처럼 회화나 조각에서.디자인·무대장치·사진·영화의 분야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 중에서도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그 중심이 되었다. 서유럽의 구성주의는 파리의 <추상, 창조>그룹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콘크리드아트, 키네딕아트, 오프아트에 이어지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폴란드의 <블록>, 체코슬로바키아의 <디스크> 그룹등을 중심으로 동유럽에서도 구성주의운동이 일어났다.

▣ Lissitzky 엘 리시츠키, El 1890∼1941 러시아
▣ Malevich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1878∼1935 러시아
▣ Kandinsky 칸딘스키, Wassily 1866∼1944 러시아
▣ Moholy-Nagy 모호이 노디, Laszlo 1895-1946 헝가리
▣ Mondrian 몬드리안, Piet 1872∼1944 네덜란드
▣ Tatlin 타틀린, Vladimir Yevgrapovich 1885∼1953 러시아
▣ Rodchenko 로트첸코, Alexander 1891-1956 러시아
▣ Gabo 가보, Naum 1890-1977 러시아

 

 

 

1919년 독일 태생 건축가
W.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에 설립한 학교.

이곳에 있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해서, 새 시대를 향한 공예·디자인·건축의 쇄신(刷新)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그 뒤 33년에 나치스정권에 의해 폐쇄조치를 강요당할 때까지 근대디자인과근대건축의 여러 문제를 검토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공업생산에서의 디자인, 기능주의에 입각한 건축 등으로의 방향설정이 바우하우스를 거점으로 하여 제시되었다. 디자인과 건축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그로피우스의 교육방침에 근거하여, J.이텐·L.파이닝거·P.클레·O.슐레머·V.칸딘스키 등의 예술가가 바우하우스에 관여하였으며 그들은 간접적이지만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이념을 윤택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개교 당시에는 실습을 위주로한 공예학교의 요소가 강했는데, 차츰 본래의 궤도로 들어가 23년에는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일>이라는 주제로 바우하우스의 성과를 세상에서 평가받게 되었다. 23년에 제정된 교육과정에 따르면, 학생은 우선 예비과정에서 반년간 기초적인 조형훈련을 받고, 목공·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유리그림·물·인쇄의 각 공방(工房)으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학생은 예술가(형태교사)로부터 조형의 이론을 배우고, 한편으로 기술자(공작교사)에게서 보다 실제적인 기술을 습득한다는 시스템을 취했다.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뒤,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진학하게 된다.

23년 헝가리의 조형가 L.모홀리나지가 바우하우스에 영입(迎入)되어 교사의 진용(陣容)도 한층 정비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바이마르에 경제불황이 있어 국립바우하우스의 경제적 기초가 무너지고, 25년에는 정부의 압박 때문에 폐쇄에 이르게 되자 데사우시(市)의 초빙으로 시립바우하우스로서 재편되었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는 바이마르기(期)의 졸업생 J.알베르스·H.바이어·M.브로이어 등이새로 교사진에 참가하여 각 공방도 비약적으로 충실해졌다. 이 시기에 새로운 생산방식에 의거한 디자인의 자세가 추구되고, 또 공방의작업은 산업계와 실제로 제휴되어 성과를 올렸다.

26년 그로피우스의 설계로 지은 바우하우스의 교사(校舍)는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의 통일에 의해서, 데사우시기의 바우 하우스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25년부터는 바우하우스총서(叢書)가 간행되기 시작하여 폭넓은 디자인 사고(思考)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드 스틸>파와 러시아의 K.말레비치의 저작도 포함되어 있어 바우하우스의 국제적인 연계를 알 수가 있다.

28년 그로피우스가 퇴진하고 H.마이어가 교장이 되었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일면을 비판하고, 민중에 대한 봉사가디자인 본연의 일이라 강조하면서 새로운 노선을 개척하려고 했으나 데사우시와의 대립으로 30년에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그 뒤 바우하우스는 L.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인계되었고, 32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베를린으로 장소를 옮겼으며, 33년 완전 페쇄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망명한 교사·졸업생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특히 그로피우스와 브로이어가 가르친 하버드대학 건축학부모홀리나지가 설립한 시카고의 뉴바우하우스(인스티튜트 오브디자인을 거쳐 일리노이공과대학 디자인학부로 합병) 등, 미국의 디자인교육에 끼친 영향은 두드러진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졸업생 M.빌에 의해서 55년에 울름조형대학이 개교되어 재출발했다.
또한 데사우의 교사도 복원되어 베를린의 바우하우스자료관과 함께 바우하우스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 Kandinsky 칸딘스키, wassily 1866~1944 러시아
▣ Klee 클레, Paul 1879∼1940 스위스
▣ Itten 이텐, Johannes 1888∼1967 스위스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

바로크라는 용어는포르투갈어의 barroco에서 온 듯하다. ‘비뚤어진 모양을 한 기묘한 진주(眞珠)’라는 뜻인데, 이 말은 본래 16세기 유럽을 지배한 고전주의 르네상스 뒤에 나타난 양식에 대하여 모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라는 용어에서 ‘변칙·이상·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바로크는 미술사·예술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현재는 이 개념이 다른 예술양식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미술사가 H. 뵐플린은 19세기의 평가에 나타나는 이 양식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했다. 그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을 르네상스의 타락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이어서 양자는 근대미술에서의 2대 정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보헤미아·오스트리아·독일·에스파냐로 번져나갔고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종교적 도상(圖像)을 일신하고 종교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동시에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호사한 의식을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정(均整)·완결성 등에 대하여 경탄과 현혹(眩惑)을 지향하여 양감(量感)·광채·동감(動感)에 호소하였다.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飛翔)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복장 표현 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미술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는 이미 16세기에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품이나 틴토레토의회화에서도 엿보이는데 마니에리스모(Manierismo)와 공존하면서 16세기 말엽 로마에 등장한다.

종교건축에서의 C.마데르나와 G.베르니니의 작품(산피에트로대성당의 정면부 및 주랑, F.보로미니의 생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교회당), 조각에서 베르니니의 작품인 산피에트로대성당 고해단(告解壇)의 천개(天蓋)와 유물궤(遺物櫃), 나보나 광장의 분수, 종교적 공상의 세계를 그린 A.포초의 천장화(天障畵)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바로크는 이탈리아 각지에 전파되어 토리노의 성(聖) 신도네 교회,나폴리의 카세르테궁(宮),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성당과 G.티에폴로의 회화 등을 만들어냈다.
북방 바로크의 중심인 빈에는 마르티넬리, A.힐데브란트 등의 궁전교회 건축, B.페르모저 등의 조각, 모르베르슈의 회화가 있다.
뮌헨드레스덴·프라하도 그 중심지에 포함된다.에스파냐에서는 바로크가 전통적인 추리게레스코 양식과 결합하여 마드리드의 성(聖)페르난도구제원, 그라나다의 샤르트르회(會)성당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멕시코·브라질·콜롬비아·페루의 식민지에서 독자적인 장식양식을 낳았다.
벨기에에서는 P.루벤스의 회화와, 플랑드르 고딕과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다. 명석함과 중용을 국민정신으로 하는 17세기의 프랑스도 바로크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나 C.비뇽, S.부에, J.블랑샤르의 회화 활동도 시험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오늘날 바로크는 좁은 의미의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넓은 뜻의 문화양식으로서 다른 시대와 장르에도 확대 적용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말기, 중세 말의 후기 고딕1900년대의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에도 적용되었다.


▣ Guercino 구에르치노 1591∼1666 이탈리아
▣ Michelangelo 미켈란젤로,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
▣ Caravaggio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 이탈리아
▣ Correggio 코레지오 1494∼1534 이탈리아
▣ Tintoretto 틴토레토 1518∼1594 이탈리아
▣ Le Brun 르 브렁, Charles 1619∼1690 프랑스
▣ Vouet 부에, Simon 1590∼1649 프랑스
▣ Poussin 푸생, Nicolas 1594∼1665 프랑스
▣ Clanud Lorrain 클로드 로랭 1600~1682 프랑스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순수 형식 요소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미술.

넓게 보면, 모든 미술은 형태·색채·선·명암·질감 등 추상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자연세계나 인간의 문명세계를 묘사하고 도해 또는 재현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표현적 기능보다는 해설이 우위를 차지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추상미술은 19세기 미술의 산물이다.

이 시기에는 일화를 묘사하기 위해 공들여 그린 재현적 미술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온 한편, 주제와 화면의 시각적 요소들에 대한 관심을 통해 제재의 자연주의 전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화가들 도 있었다.
낭만주의시대는 모방과 이상화를 강조하는 고전주의를 거부하고 대신에 창조의 본질적 요인인 무의식과 상상력을 강조했다.
화가들은 점차로 이러한 태도로 뭉쳐서 새로운 자유를 누리면서 거기 수반되는 새로운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1890년 모리스 드니는 "회화란 본질적으로 그것이 군마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일정한 질서에 따라 채색된 평면이다"라고 단언해 당시의 상징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졌던 느낌을 요약했다.

야수파·표현주의·입체파·미래주의 등 20세기초의 주요운동들은 어떤 면에서 자연의 외관과 미술 간의 단절을 강조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외관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까지 변형시켰다 해도 현상에서 출발해 그것을 추상화시키는 것과 가시세계와는 관계없는 순수 형식적 요소들로 그림을 그리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4, 5년간 로베르 들로네, 바실리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블라디미르 타틀린 등의 미술가들은 근본적인 추상미술로 전환했다.

일반적으로 칸딘스키는 1910~ 11년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배제시킨 순수한 추상화를 그린 최초의 현대미술가로 간주된다.

그러나 진보적 미술가들조차도 대부분은 완전한 재현의 포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중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그룹과취리히의 다다 그룹은 추상미술의 영역을 좀더 넓혔다.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추상미술이 크게 발전하지못했다. 부분적으로는 전체주의 정치 때문에, 또 사회비판적 사실주의나 초현실주의 등 형상을 강조하는 새로운 미술운동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의욕적인 추상미술 유파가 등장하여 널리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이래로 추상미술은 유럽과 미국의 회화·조각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실행되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추상미술에 당황하거나혼란스러워 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느낌에 대한 표현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큰 가치를 갖는다.

▣ Kandinsky 칸딘스키, Wassily 1866∼1944 러시아
▣ Malevich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1878∼1935 러시아
▣ Mondrian 몬드리안, Piet 1872∼1944 네덜란드
▣ Picasso 피카소, Pablo Ruiz 1881∼1973 스페인
▣ Delaunay 들로네, Robert 1885∼1941 프랑스
▣ Klee 클레, Paul 1879∼1940 스위스
▣ Tatlin 타틀린, Vladimir Yevgrapovich 1885∼1953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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