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독일을 중심으로 있었던 표현주의 미술을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적" 혹은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할 때 어떤 걸 의미할까요? 미술에서 "표현주의"는 작가가 자신의 개인적 감정 - 흔히 불안, 공포, 고통 등 - 을 표현하기 위해서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하고 형태를 왜곡시키는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미술을 우린 이미 반 고호의 작품에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 고호는 표현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 고호 외에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르웨이 출신 화가 뭉크입니다. [에두와르 뭉크, <절규> 1893] 뭉크의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그림입니다. 뭉크는 불안, 공포, 고독, 성, 죽음 등을 주제로 즐겨 그렸습니다. 현대로 올수록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들이지요. 흔히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 반 고호처럼 정신이상이 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죠. 뭉크도 전형적인 표현주의자였었는데, 그의 경우 일찌기 어머니와 누나를 여읜 경험이 큰 충격으로 작용했습니다. 그의 유년시절엔 집에 늘 병자가 있었고, 또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뭉크는 자신이 겪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황혼녘에 긴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쳐 간 후, 노을이 지는 하늘을 쳐다 본 뭉크는 황혼이 마치 핏빛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순간 커다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 충동은 너무나 강렬해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것이었죠. 바로 그 순간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소리를 지르는 뭉크의 얼굴은 마치 해골처럼 보입니다. 왜곡된 형상이 고독과 공포에 휩싸인 그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정말로 핏빛처럼 붉습니다. 그의 머리 위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 마치 그의 절규가 강물을 타고 흐르는 것 같습니다. [에밀 놀데, <십자가에 못박힘> 1911-12] 표현주의는 노르웨이나 독일, 덴마크처럼 추운 지방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나 이태리처럼 따듯한 지방 사람들은 주로 밝고 명랑한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티스와 야수파를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프랑스 사람들입니다. 아마 기후가 사람들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나 봅니다. 이 그림은 놀데라고 하는 독일 사람의 그림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덴마크 국경 부근이었으니까, 그가 살던 곳도 비교적 추운 곳이었습니다. 놀데는 종교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예수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제단화 형식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단화라는 것은 교회의 제단에 비치하던 회화의 양식인데, 보통 3개의 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병풍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폭 제단화의 중앙에는 보통 가장 중요한 주제가 들어 가고요, 양측면에는 보조적인 주제가 묘사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힘>은 <예수의 생애>라는 제단화의 중앙면에 해당되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볼까요? 두명의 죄수와 함께 못박힌 예수님이 보입니다. 밑에는 울고있는 여인들과 내기를 하면서 히히덕거리는 로마 병사들이 보이는군요. 이 그림은 일종의 종교화인 셈이죠. 그런데 주제나 형식 모두 종교화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건 과거 종교화의 성스러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를 포함한 인물들은 모두 괴기스럽게 보이고, 왠지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죠. 자극적인 색채가 그런 느낌을 훨씬 강화시켜 줍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야수파처럼 놀데도 원시미술을 찬양했던 사람입니다. 매우 거칠고 직설적인 양식은 놀데가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원시적 회화 기법에서 나온 것이었죠. 놀데는 이렇게 그린 자신의 그림이 무지하고 소박한 농부들도 이해할 수 있는 대중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그림이 인간의 정신적 열정을 표현하는데도 아주 효과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종교화를 즐겨 그렸던 이유는 그의 신앙심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모종의 정신적 열정이 성서적 주제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군인으로 그려진 자화상> 1915] 1905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몇몇 화가들이 모여서 "다리파"라는 그룹을 결성합니다. 그 그룹에는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트러프 등이 속해 있었습니다. 에밀 놀데도 한때 이 표현주의적인 미술 운동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그는 곧 탈퇴하고 말죠. 왜냐하면 개성이 강했던 놀데는 그룹양식을 지향했던 다리파가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리파는 꽤 결속력이 강한 단체로, 매우 강한 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발기합니다. 선언문의 내용은 그들이 낡은 구세력에 저항하는 미래지향적 단체라는 것, 어떠한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 충동을 가식없이 표현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다리"라는 명칭도 그들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있었죠. 그들은 서구문명이 이룩해 놓은 전통적 요소를 거부하고 원시적이고 거친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그들은 삶 자체에 접근하고 그 진실을 표현하길 원했습니다. 키르히너는 다리파 운동을 주도했던 화가로, 다리파 멤버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도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원시미술에 열광했던 화가였습니다. 그와 다리파 화가들은 1909년~ 10년 사이의 기간동안 농촌에 내려가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부러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원시성에 접근하고자 했던 노력이었습니다. 1914년에 1차대전이 발발하자 키르히너는 군인으로 참전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어떤 정의나 진실도 아니고, 신체적 정신적 상처뿐이었습니다. 그림을 보십시오. 그의 자화상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키르히너는 여전히 화가로 나타납니다. 뒤에 모델이 보이지요? 그런데 키르히너는 담배를 꼬나 문 냉소적인 표정에 한쪽 손이 없는 불구로 그려집니다. 그는 이렇게 상처받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거지요. 전쟁은 키르히너에게만 상처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량학살의 장면을 목도하고 전쟁의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1차대전이후 서구인들은 서구문명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강화하게 됩니다. 즉, 산업 사회의 발달이 반드시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전이후 서구의 전통을 부인하고 원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표현주의 미술운동들이 전과 달리 상당한 대중적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독일의 뮌헨에서도 표현주의 미술운동이 등장했습니다.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청기사"라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1912년 "청기사"라는 이름의 연감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를 뛰어 넘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세계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를 위하여 청기사파는 이제껏 서구 전통에서 푸대접받던 원시적인 미술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그런 미술을 통해 보편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말을 탄 연인> 1906-7] 청기사파 운동을 주도했던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입니다. 러시아 출신 화가 칸딘스키는 원래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파리를 방문하여 프랑스 미술을 보게 된 후 칸딘스키는 법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으로 떠납니다. 이 그림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칸딘스키의 작품입니다. 마치 러시아의 전래동화를 그려 놓은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비잔틴 사원의 모자이크화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영롱한 색채와 까만 테두리가 그런 느낌을 줍니다. 한편 점을 찍듯이 그린 것이 쇠라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후기인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칸딘스키 특유의 색채감각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칸딘스키를 추상미술가로 알고 있습니다. 갖가지 색채의 선과 점, 그리고 원이나 삼각형같은 도형들로 채워진 그림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1910년 이후 거의 완전한 추상 미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추상 미술을 지향했던 것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가치는 가시적인 세계의 재현을 통해서 성취되기 보다는 추상적 구성과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no.7> 1910] 추상미술과 관련하여 칸딘스키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어느날 자신의 화실에 들어서던 칸딘스키는 거꾸로 놓여있던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거꾸로 세워져 있는 그림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림이 무엇을 그렸느냐와 관계없이 색채와 선의 구성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칸딘스키의 추상 미술이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깨달음은 구체적인 대상이 완전히 배제된 미술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위의 그림을 봅시다. 상당히 추상화가 진척된 그림입니다만,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산과 나무가 있는 풍경화라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화면에서 사람, 나무, 산 등이 색채와 선적 패턴들로 녹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왠지 자연이나 사람같은 생명을 지닌 어떤 대상을 연상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생명력있는 표현성을 특징으로 하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구체적인 대상을 배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체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특이하군요. 즉흥이라는 제목과 함께 번호를 달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칸딘스키는 음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말하자면, 인상, 즉흥, 구성 시리즈죠. 구성은 영어로 하면 composition인데, 음악에서 이 말은 작곡을 의미하지요.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이 순수하게 추상적이라고 생각했고, 미술에서도 음악과 같은 순수한 표현성이 성취되길 바랐습니다. 마치 음악가가 리듬, 음색, 멜로디 같은 음악적 형식들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듯이, 미술가도 색채와 선의 다양한 배열을 통해 공포, 비애, 환희 같은 자신의 내적 경험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no.7> 1913] 칸딘스키가 최초로 순수 추상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어떤 대상을 암시하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색채와 선의 다양성이 있을 뿐입니다. 칸딘스키는 미술가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순수 조형적 요소로 표현가능하다고 보았던 겁니다. 그는 각각의 색, 직선 및 곡선이 각자 의미하는 느낌이 있어서 이들의 배합으로 일종의 작곡(composition)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빨강 색은 뜨거운 정열을, 녹색은 평화를, 굵은 직선은 강인함을, 곡선은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화가는 이들 요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칸딘스키는 그림 자체만으로 충분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목을 따로 붙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엔 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뭉크, 에밀 놀데, 키르히너, 칸딘스키. 이들은 모두 저마다 개성이 다르지만, 미술을 통해 작가의 내적 경험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외적인 세계의 현상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현상을 보다 중요한 표현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그림에서는 그들의 고유한 겅험이 표현되기 위해 형태가 왜곡되고 비자연적인 색채가 사용됩니다. 이러한 미술의 진전된 단계를 우리는 칸딘스키의 추상 미술에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딘스키의 추상은 "표현적 추상"이라고 불리우곤 합니다.
출처 : http://my.dreamwiz.com/mijk/expressionism.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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