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3일 (수) ▶ 6월 12일 (월)
쌈지길 가운데 마당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38번지 쌈지길 TEL 02-736-0088(#607) FAX02-736-6720
체험전시: 2006년 5월 6일 토요일 오후 3:00 ~ 5:00
쌈지길 가운데 마당에 설치된 3개의 조형물에 작가와 함께 직접 색깔을 칠하고, 사진 등을 찍는 이벤트. (초등 학생 대상)
이웅배 작가의 조형물들은 다양한 형태의 배관을 이어 제작한 유기적인 형태를 지닌 스케일이 큰 조각 작품입니다. 이웅배 작가의 조형물들은 전통 조각 작품에서 보여지는 개념과 조형미를 담아 낸 듯하면서도 공공미술로서의 관객과의 거리 좁히고자 시도를 보여 줍니다. 작가는 놀이터를 포함한 다양한 공공 장소에서 그의 작품을 통해 대중과의 “접촉과 소통”을 시도해 오고있으며 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 역시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 놀 듯이 작품에 올라타고, 앉고, 매달리고, 두드리는 등의 유쾌한 전시장으로 탈바꿈 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의 잦은 왕래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쌈지길 내의 광장이면서 연극 무대와도 같은 대표적인 공공 장소인 가운데마당에서 열리는 본 전시에서 놀이기구, 퍼블릭 퍼니쳐와 조각작품이 혼성이 된 이웅배 작가의 조작전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쌈지길을 찾은 폭 넓은 세대의 관객들이 보고, 만지고, 느끼며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전시가 될 것 입니다.
이웅배 조각전, Public – friendly Sculpture
갤러리 쌈지 큐레이터 양옥금
개방형 미술관의 추구와 공공 미술의 대두, 그리고 현대미술의 다양한 방식을 통한 “소통”의 시도는 화이트 큐브 안에서만 존재했던 예술 작품들을 다양한 공공의 장소로 이끌어냈다. 기존의 모뉴멘트적 공공미술(public art)을 넘어서고 좌대와 가드레일로 둘러싸인 작품 주변의 엄숙주의와 “작품에 손 대지 마시오”, “사진 촬영 금지”의 표지판의 부정적 아우라를 벗어버린 동시대의 공공미술은 공원, 광장, 쇼핑몰 등의 공공의 장소에서 폭 넓은 계층의 대중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접촉과 소통”이라는 주제를 담은 이웅배의 스케일이 큰 입체 작품들은 속이 비어있는(void) 오브제, 빌딩과 빌딩을 연결하거나 기체나 액체 등의 운반을 위해 사용되는 배관(配管)을 이어 제작한 유기적인 형태를 지닌 조형물이다. 이러한 배관의 연결체들은 일련의 흐름, 교차, 응축과 확산의 형상화를 시도하면서 때로 하나에서 여러 개로 이어지고 개별적인 유니트와 연합의 구조를 동시에 갖는다. 주철이나 스테인리스 배관의 연결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면이거나, 밝은 원색으로 칠해진 매끄러운 표면이거나 이웅배의 조형물들은 언뜻 보기에는 전통적인 조각 작품들이 보여주는 개념이나 조형미를 담아낸 듯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그 외에도 관객들의 다양한 감상과 사용(public use) - 올라타기, 매달리기, 두드리기 (이웅배의 조형물들은 철의 재질, 부피와 배관의 연결 방법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냄), 얹어 놓기, 기대기, 걸터앉기 등 – 을 적극 허용한 놀이 기구나 퍼블릭 퍼니쳐에 가까운 퍼블릭 프랜들리(public – friendly) 조형물이다.
이러한 반달리즘(vandalism)을 제외한 관객의 사용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를 완성시키는 이웅배의 조형물들이 쌈지길 가운데마당에 들어선다. 건물 자체가 수직적 길(道)이 되는 쌈지길 건축 공간은 그 자체가 지닌 개방성과 건물 가운데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싼 난간이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를 만들어 냄으로써 공예쇼핑몰 혹은 복합 문화공간으로서의 용도를 넘어 공간 자체로 끊임없는 소통을 하는 퍼블릭 아레나(arena)가 된다. 이러한 개방형 퍼블릭 아레나의 중심에 놓이는 이웅배의 조형물들은 완만하게 수직으로 올라가는 길의 각 지점에서 다양한 시점으로 감상 할 수 있는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또는 쌈지길을 찾은 방문객들이 기대어 쉬거나 어린 아이들이 올라 타거나 매달려 놀 수 있는 놀이와 유희를 제공하는 하나의 기구로 거듭난다.
박삼철의 “왜 공공미술인가 (학고재)”의 “사용미학”에 관한 부분을 빌자면, “사용은 ‘존재자(being)’를 ‘관계자(becoming)’로 확장 시킨다. 미술관 안의 작품은 스스로 완결되어 외부를 향해 지시하는 기호지만, 사용 공간에서의 작품은 사용될 때마다 새롭게 해석되고 향유 됨으로써 또 다른 의미의 존재가 된다.”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웅배의 작품은 쌈지길의 장소성과 어우러진 관객과 작품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각기 다른 해석과 향유의 여지를 내포한 “개방”과 “사용미학”으로 완성되는 진정한 공공미술이다.
[작가노트]
<소통과 접촉>
공동체의 표현 방법
I 나는 전쟁 이후 실향민이 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에게 어른들이 가지고 있던,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슬픔의 전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에겐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이 보이는 고향땅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 나는 이런 아픔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학 졸업 후 군복무 기간을 통해 분단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또한 나의 성장기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기와 대체로 일치되는데 내가 이 시기에 알게 된 것은 근대화로 인해 또 다른 종류의 고통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온통 소통의 단절과 갈등으로 뒤덮인 이 시대에 나는 <소통과 접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제로섬으로만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인가, 타자(他者)와 접촉하고 소통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자문한다. 그리고 표현한다.
II 근대 이후 서구 사회는 인간을 사유(思惟)하는 존재로 규정해 왔다. 사유를 통해 나는 나와 다른 것을 서로 구별할 수 있고 나에 대해서 나라고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유는 나의 나됨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요 본질이므로 세계의 모든 중심에 사유하는 내가 있는 반면 이런 나에게 다른 이와 다른 것을 복종시키고자 했다. 즉, 다른 것을 다르게 놓아두지 못하고 나의 틀 속에 다른 것을 강제로 맞추었다. 그런데 프랑스 현대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 - 1995)는 타자는 적대적 대상이 아님을 발견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안에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대신하는 삶을 살아 갈 때 이기적인 욕망의 내가 타인에 대한 책임 있는 주체로 바뀐다고 생각했다. 즉 이웃에 대한 헌신과 개방, 책임감을 가질 때 무한을 향한 개방(Ouverture vers l'infini)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섬길 때 우리의 온전한 주체가 탄생된다고 본 것이다.
III <소통과 접촉>이란 주제는 먼저 작업의 재료로 쓰이는 배관(配管)에서 시작된다. 배관은 그 자체로서 소통과 접촉이란 개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주제를 작업에 담아내기 위해 최근 몇 년 동안 금속제 배관을 사용하고 있다. 금속제 배관이란 가스나 물, 공기 등을 흐르게 하고 그 방향과 양의 변화를 돕는 데 쓰이는 것으로 주로 주철이나 스테인리스 등이 있다. 시판되는 배관들 중에서 각각의 기능에 따라 T형, 레듀사(reducer), 엘보우(elbow)와 파이프의 마감을 위해 쓰이는 캡(cap) 등이 있다. 각 배관들의 형태적인 기능과 다양한 규격을 합해보면 거의 3,000종류에 달할 정도로 많다. 내 작품은 이런 다양한 규격을 가진 배관들의 연합을 대전제로 한다. 나는 수많은 배관 중에서 같은 규격의 지름을 공유하는 배관을 선택해서 견고하게 이어 놓는다. 각각의 배관들은 서로 만나고 이어지고 연합되면서 유기체적 형태를 구축한다. 이렇게 될 때 내 작품 안에서 배관이란 오브제는 철저하게 그 개별적인 유니트로 존재하면서도 연합의 구조를 갖추는 공동체 안에서의 중요한 일원으로 존재하게 된다.
VI 나에게 <소통과 접촉>이란 주제는 현대 미술이 안고 있는 난해성에 대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대 미술의 이해와 감상에 있어서 관람자들이 느끼는 곤혹스러움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감에서 출발한 것이며 동시에 현대 미술의 다양한 방향성에 대한 새로운 실험 의식이다. 나는 작가와 관람객 그리고 작품의 관계에 새로운 접촉과 소통의 통로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조각 작품을 만지게 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전시장에 놓이거나 정해진 공간에 자리 잡으면서 손으로 만지는 등의 촉각적 감상이 금지되어있지만, 나는 만지고 접촉할 수 있는 작품을 관람자에게 제시한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조형물을 시각적으로만 감상하게 했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3차원으로의 조각을 직접 손으로 만져서 느끼게 하자는 것이다. 내 작품은 관람자가 만져보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이상의 접촉의 가능성을 던져 준다. 더듬어보기나 만지기, 그리고 기대기, 걸터앉기, 얹어놓기, 올라타기, 매달리기 등의 접촉이 관람자들의 몫이 된다. 이때 사람들의 참여가 생산되므로 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곧 관람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내 작품이 공공장소에 놓인다면 작품이면서 동시에 의자가 되고 가로등도 되며 테이블로도 쓰일 수 있는 그러나 여전히 조각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내 작업은 관람자와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제작한 작가와의 <소통과 접촉>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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