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삶의등대▲

내 거위는 모두 백조?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4:11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을 지휘한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티데스는 정반대 성격의 인물이었다. 전자가 탐욕스럽고 간교한 인물의 대명사라면 후자는 정직하고 청렴한 인물의 전형이었다. 특히 아리스티데스는 '정의로운 자'라고 불릴 만큼 사심이 없었다. 의심 많은 아테네군이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서둘러 철수하면서 그를 전리품 분배 책임자로 믿고 남겨둘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인들의 버림을 받는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일화를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사상 최초의 국민투표로 기록되고 있는 기원전 482년 아테네의 도편(陶片)추방 투표일. 투표장 앞에 서 있던 아리스티데스에게 글 모르는 농부가 다가와 자기 도편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달라고 청했다. 당황한 아리스티데스가 이유를 묻자 농부가 대답했다. "그가 허구한 날 정의롭다고 떠드는데 신물이 난다오."

그런 것이다. 늘 자기만 옳다는 떠벌림을 누가 끝까지 들어주겠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은 분명 아집이며 독선으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아집과 독선에는 현실감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지도층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백성들이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것은 2500년 전의 그리스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나 다를 게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전리품을 떼먹지 않고 고루 나눠준다 해도 현실감각이 없는 지도자가 초래할 위험을 안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 없이 도편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농부에게 건네줬다. 그러고는 아테네를 떠나 10년 동안 방랑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표 결과에 군말 없이 승복한 인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침략 위험에 국론이 양분돼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 준비를 위해 전함 200척을 건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티데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호언했다. 두 사람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고 정국의 교착상태를 풀려면 둘 중 하나를 추방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투표일이 다가왔을 때 전쟁의 먹구름이 아테네를 뒤덮었고 결국 아리스티데스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현실을 무시한 아집이 위험천만하기에 자고로 동양이건 서양이건 그것에 대한 경계가 많았다. 공자는 권도(權道)를 깨우치는 것이 학문의 완성이라고 했다. 절대 불변의 이치가 상도(常道)며 상황에 따라 이를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권도다. 어떤 이치를 터득했다고 매사에 그것만 판단기준으로 삼으면 독단에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가르침이다. 서양에서는 "자신의 거위는 모두 백조란다(All his geese are swans)"는 속담을 등대 삼아 아집의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힘썼다.

하지만 부두에 선 사람을 아집의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은 결국 '말'이다. 생각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 옳다는 생각에 거침없이 쏟아냈다가 부메랑이 돼 돌아온 말폭탄을 얻어맞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을 어디 한두 번 봤는가 말이다.

'시경(詩經)'에 "흰 구슬에 있는 티는 갈아 없앨 수 있지만 말에 박힌 티는 갈아도 없어지지 않는다(白圭之 尙可磨也 斯言之 不可磨也)"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제자 중 남용이란 사람은 이 구절을 하루에 세 번씩 외우는 것만으로 공자에게 잘 보여 그의 조카사위가 됐다. 공자 사위가 될 일은 없겠지만 마음속에 담아두면 뒤늦은 후회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금언이다.

사실 누군가에게 들려주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거명하지 않고 글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어디 그들뿐이랴. 글쓴이 역시 행여 그랬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하고 있으니 눈 흘기지 마시길. 다만 그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 잡는 데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게 할 힘이 있는 그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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